겸재정선의 〈산천재도山天齋圖〉
글 :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정선의 〈산천재도山天齋圖(지본담채. 30×44cm. 1753년作). 김병희 소장〉는, ‘재제(題材)’, ‘기법표현技法表現’, ‘화제(畫題)’, ‘서체(書體)’, 관서(款書)와 인장(印章) 등이 역사적, 문화사적,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부족했던 정선의 만년기의 상황과 화풍에 대한 연구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정선은 1753년 11월, 바람소리 은은히 들리는 밤중에 일어나 앉아 등불을 밝히고 생각에 잠기다가 붓을 잡아 산천재 일대를 그렸다. 산천재 일대의 논과 논두렁, 대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 소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봉우리 가운데의 초가집과 밭 등의 경치를 향토성 짙게 그려냈다. 정선은 생전에 전국 명승을 두루 섭렵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나, 〈산천재도〉의 제재와 같은 평범한 논과 밭을 제재로 채택한 예는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관심을 쏟은 장소는 금강산과 관동팔경, 서울과 한강, 개성, 영남지방 등의 경치가 빼어난 명승고적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경교명승첩》, 〈금강산도〉, 〈인왕제색도 〉, 〈청풍계도〉, 〈박연폭도〉, 〈관동팔경도〉 등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장엄한 산이나 강 그리고 아름다운 집과 소나무가 등장하는 풍경이었다. 이로써 보면, 정선의 〈산천재도〉는 이미 제재부터 색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정선의 〈산천재도〉에 출연하고 있는 주된 제재인 산천재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은거지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명소 중에 명소이다. 하지만 시골 어디를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논과 밭이 있는 아주 평범한 풍경으로, 소박하고 서정적이며 그래서 왠지 편안하고 정감이 넘쳐 그의 다른 대표작과는 크게 차별된다.
정선의 〈산천재도〉에 나타난 기법표현 역시 그의 다른 작품의 기법표현과 확연히 구별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크게 눈길을 끄는 것은 새처럼 부감시로 상상하여 화면을 꽉 채워 아주 크게 보여 지게 한 공간 구성력이다. 또한 화면 중경을 먹색으로 과감하게 늘어트려 처리한 시도 역시 매우 창의적이고 독자적이며 현대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근경의 중심이 되는 논과 논두렁 그리고 중경의 숲과 산 중턱의 간단한 여백으로 처리된 집 등이 자연스럽게 균형, 조화를 이루는 있는 것 역시 아주 매력적이다. 이렇게 정선의 〈산천재도〉에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공간 구성력, 대담한 변형과 생략,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필선과 미점 등이 돋보이고 무엇보다도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경물이 서로 에너지를 보충해 주면서 향토성 짙은 느낌을 받게 한다.
한편, 정선의 〈산천재도〉의 화면 왼쪽 윗부분에는 ‘화제(畫題)’와 ‘겸재(謙齋)’라는 그의 호(號)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원백(元伯)’이라는 백문방인이 찍혀있는데 화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산천재에서 사흘을 묵어 그리워하는 정이 있기에 계유년 11월 그믐에 이중원을 위해 등불 아래에서 그리다.
겸재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윤진영 책임연구원 해석 -
내가 산천재에서 삼일의 시간에 급박하여 계유년(1753) 11월 말 이중원을 위해 촛불아래서 그렸다. 겸재 - KBS진품명품의 김영복 감정가 해석 -
여어산천재 (余於山天齋)
유삼숙지연 (有三宿之戀(혹은 급急?))
계유복월회 (癸酉復月晦)
위 (爲)
이중원촉하작 (李仲元燭下作)
겸재 (謙齋)
※ 산천재(山天齋) :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만년(晩年)에 강학(講學)하던 곳으로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소재함.
※ 삼숙지련(三宿之戀) : 연연(戀戀)하여 잊지 못함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30 〈양해열전(襄楷列傳)〉에 “승려가 뽕나무 아래서 사흘을 머물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름으로 인하여 은애(恩愛)가 생기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정진의 지극함이다 “浮屠不三宿桑下, 不欲久生恩愛, 精之至也.”라고 하였다.
※ 계유(癸酉) : 1753년(영조29)
※ 복월(復月) : 음력 11월. 12개의 괘卦를 1년 열두 달에 배속한 십이벽괘설(十二辟卦說)에 기인함.
어쩌면 정선의 〈산천재도〉는 그림보다는 위와 같은 ‘화제(그림에 쓰여 있는 글귀)’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화제를 통해 〈산천재도〉를 그린 제작시기, 제작동기, 제작장소, 정선의 학문적 수준, 서체 등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화제는 짧지만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산천재도〉의 제작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선은 78세 때인 1753년(영조 29년) 11월 그믐에 경남 산청 기슭에 위치한 ‘산천재’를 찾아 그곳에서 머물며 〈산천재도〉를 그려냈다. 추적해보면, 정선이 〈산천재도〉를 그려낸 그해 9월에는 ‘현릉령’에 올라 아주 바쁜 일정을 보내던 때이다. 정선은 그와 같은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홀연히 산천재를 찾아 〈산천재도〉를 그려냈기에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게 된다.
둘째, 〈산천재도〉의 제작동기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정선은 이중원李仲元을 위해 산천재 풍경을 진경산수화로 그려냈기에 특별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즉 정선은 남명 조식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고자 산천재를 찾아 3일을 지내는 가운데, 이중원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등불아래서 붓을 휘날리며 그림을 그려 냈다. 여기에서 계속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은, 정선과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이중원이 누구인가? 이다. 일단은 자가 중원仲元이고 호가 양오헌(養梧軒)인 서화가 이현곤(李顯坤)(1699〜1743)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다양한 방향으로 접근해서 신중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셋째, 〈산천재도〉의 제작장소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선이 그려낸 〈산천재도〉의 장소는 다름 아닌 조선 중기의 실천유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산천재이다. 다시 말해 산천재는 조식의 유거와 정사, 후학을 가르치던 서원이며 이후에는 선비들의 은거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와 같은 조식의 산천재를 정선이 찾아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명 조식이 누구인가, 조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선비의 고장인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조선조 명종에게 어진 정치를 바라는 을묘 단성소를 올린 참 유학자로 그에게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그런 까닭에 〈산천재도〉를 계속 감상하다보면, 조식을 떠오르게 되고, 정선이 퇴계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안동의 ‘도산서당'을 모델로 한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25.3x39.8cm)-시냇물 흐르는 곳 위에 자리를 잡고 고요하게 지낸다’는 뜻〉와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정선은 어떤 이유로 조식의 산천재를 찾았을까? 어떠한 이유에서 〈산천재도〉를 찾았든 간에 〈계상정거도〉와 전혀 무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을 것으로 본다. 물론 깊게 생각한 결과일 수 있겠지만, 정선의 〈산천재도〉 를 〈계상정거도〉 도상에 대입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된다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당시 상황을 적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정선의 학문적 일면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정선은 성리학에 기초를 둔 유학에 능통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산천재도〉의 화제를 통해서도 정선의 학문적 깊이를 보다 깊게 접근해 확인할 수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유삼숙지연(有三宿之戀)(연연하여 잊지 못함’의 글귀는 《후한서》의 〈양해열전〉에 나온다. ‘삼숙지연’이란 “부도불삼숙상하(浮屠不三宿桑下), 불욕구생은애(不欲久生恩愛), 정지지야(精之至也)”를 뜻한다. 이와 같은 짧은 글귀로 정선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서화에 있어서 시(詩)와 글씨는 모든 작가들이 알아야 하는 기본이기에, 정선의 학문적 깊이를 이해하는 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위의 화제를 통해 정선이 많은 책을 가까이 했으며 다방면으로 학문이 깊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다.
또 다른 한편, 정선의 〈산천재도〉에 대담하게 휘갈긴 서체(書體) 역시 그가 수십 년에 걸친 활동을 통하여 형성된 고유한 필법의 특징이나 습관이 드러나 있는 노필(老筆)로, 그의 초기와 중기 및 말기 작품의 서체 변화 전모를 파악, 비교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와 함께 〈산천재도〉의 謙齋라는 호의 관서와 元伯(좌우8mm×상하1cm)이라는 자의 방형주문인장이 그의 다른 작품과 서로 일치해서 이 역시 그의 만년기의 관서와 인장을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정선이 78세(1753년) 때 그린 작품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반갑게도 정선의 〈산천재도〉가 발견되어, 정선의 만년기인 78세 전후 상황과 작품에 대해 보다 깊게 접근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산천재도〉에서 드러난 ‘제재’와 ‘기법’ 그리고 ‘화제’와 ‘서체’ 등을 통해 정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가치를 일깨울 수 있다. 물론 그의 대표적인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등과 같은 장쾌하고 호탕한 필묵법으로 그려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충분히 언급한 것처럼, 정선의 〈산천재도〉와 비교해 유사한 상황을 제재로 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고, 작은 화지인데도 산천재 주변을 적절히 조절하여 꽉 채워 넓게 보이게 하는 화면 구성력에 의한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며, 전혀 예상치 않은 새로운 취향의 기법표현은 우리 땅을 그리는 또 다른 정형을 이룩해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논두렁과 봉우리 가운데 초가집, 중경의 울창한 숲과 오래된 나무들이 서로 가려주고 비추면서 향토성 짙은 강한 기운을 내뽑는 모습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끝으로 정선의 〈산천재도〉에 적힌 ‘화제’는 제작시기, 제작동기, 제작장소, 정선의 학문적 수준, 서체 등을 환하게 밝혀주는 자료로써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