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한겨울의 기억
『설산 보러 갈래?』
어느 날 눈 덮인 산이 너무 보고 싶었던 저는 친구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래. 가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시원하게 대답한 친구는 다음 날 월차를 냈고, 그렇게 우리는 소백산으로 즉흥적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등산에 취미가 없었고, 겨울 산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는 아무런 장비 없이 몸도 마음도 가볍게 떠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 무모했던 것 같아요. 폭설이 지나간 자리라 자꾸만 발이 푹푹 빠지며 미끄러졌고, 산 입구에서 주운 나무 막대 하나를 의지하며 끝까지 올랐는데 그 때 마주했던 새하얀 세상이 아직까지 잊히질 않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해 다시 단양을 찾았습니다. 소백산밖에 몰랐던 이곳은 제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 6년 전 겨울, 소백산 비로봉 가는 길. 처음 본 설산의 풍경이 아직까지 잊히질 않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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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를 땐 아이젠을 반드시 착용해야 합니다. 아래의 사진은 소백산 비로봉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아이젠 없이 겨울 산을 오르는 것은 정말 힘들고 위험한 일입니다. 양 옆에 계신 분들의 복장을 참고해 주세요. 아이젠과 함께 스패츠와 등산 스틱은 안전한 산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초심자의 행운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요. 그런 행운이 두 번 다시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한 번 경험한 뒤론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지만, 가끔은 무지에 의해서라도 무작정 부딪쳐 보던 경험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생각도 많아져 놓친 기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5년만에 다시 찾은 단양
여러 매체들을 통해 '단양8경'의 몽환적인 풍경을 종종 보게 되는데요. 그만큼 '단양군'은 인근의 제천과 함께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단양8경은 단양군을 중심으로 주위에 산재하고 있는 8개의 명승지(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를 말합니다. 단양은 걷기길이 잘 되어있어 걷기를 좋아한다면 이 중 몇몇 장소는 걸어서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곳들보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어요.
단양의 낮
단양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큰 곡선으로 흐르는 남한강과 수많은 산들에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의 마을이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단양팔경의 명성처럼 수려한 경치는 한 폭의 산수화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엔 정오에 도착해서 저녁까지 머물렀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보다 단양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궁금했던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미리 받아 본 관광책자에 ‘느림보 강물길’, ‘느림보 유람길’, ‘소백산 자락길’ 이렇게 도보 여행길이 잘 안내되어 있는데 따뜻한 계절이라면 더욱 걷기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지도 앱을 통한 도보 길 찾기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요 시간을 예측할 수가 없었는데 궁금해서 직접 걸어봤습니다. 단양역에서 상진대교를 건너 단양관광호텔까지 약 25분가량 소요되며, 호텔에서 '구경시장'까지는 30분, 구경시장에서 고수대교를 지나 관광안내소까지 15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즉, 단양역에서 관광안내소까지 대략 70분 정도 걸린 셈인데 개개인의 체력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평소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거나 느긋한 걷기 여행을 좋아한다면 도담삼봉이나 석문까지 충분히 걸어 다닐 만합니다. 무엇보다 남한강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걸으며 보는 아름다운 풍경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 남한강과 산수유
양방산 전망대 가는 길
이날 목적지는 이름도 생소한 '양방산'입니다. 관광안내소와 고수대교를 지나 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이날따라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3.5km 정도로 안내되어 있지만 가는 길이 좁고 가파르며 심한 굴곡으로 인해 사람도 차도 오르기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틈틈이 패러글라이딩 차량이 오가긴 했지만 걸어 올라가는 사람은 제가 유일했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더군요. 어디를 가든지 사람 마주치는 일이 어렵지 않고 늘 북적거리는 곳에서 살아온 제게 이런 적막감이 무척 생소했습니다. 산 중턱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중에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모를 동물을 마주치곤 화들짝 놀랐어요. 저보다 더 놀랐는지 펄쩍 뛰며 달아나 버린 녀석을 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저 끝에 다리가 보이시나요? 단양역 근처의 '상진대교'입니다. 꽤 먼 거리를 걸어왔지요.
산 정상에 이를수록 바람은 매서웠고, 가파른 길 곳곳이 결빙되어 있어 상당히 미끄러웠습니다. 소백산을 오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도 참, 단양에 올 때마다 고생해서 산을 오르네.’ 스스로 한 선택에 괜히 속으로 투덜대며 오르다 보니 전망대가 보였고, 드디어 그렇게 보고 싶었던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정말 놀랍더군요. 고생해서 오른 보람이 있었어요.
왼쪽 끝에는 상진대교,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고수대교입니다. 제가 걸어온 길과 단양 읍내가 한 눈에 보입니다. 아름다운 풍경 뒤로 계단식 논 같은 산은 시멘트 채석장인데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라도 훼손된 산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덧 해가 질 시간입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해야 합니다.
단양의 밤
어둠이 내리자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면서 이곳은 금세 형형색색 화려함으로 물들었습니다. 이곳의 밤은 영화 ‘라라랜드’처럼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이 낭만적이었습니다. 맑은 하늘엔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고, 바람은 잔잔했지만 그래도 겨울 강변이라 꽤 쌀쌀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함과 적막감, 이 상반된 느낌이 모두 들던 곳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빛조차 없었다면 검게 변한 주변의 산처럼 칠흑같이 어둡겠지요? 화려한 조명들이 밤을 밝히며 이곳이 낯선 여행자에게 안전한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상진대교와 산 위의 만천하스카이워크. 그리고 다리 아래 보이는 노란 조명은 단양 잔도길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여러모로 놀라운 풍경들을 많이 마주했던 이 곳에서의 하루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