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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리차드 로티
Richard Rorty 로티는 1931년 미국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티는 분석철학이 강한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다가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발표한 이후, 1982년부터 버지니아대학, 1998년 이후 스탠포드 대학으로 옮겨서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75세 되던 2007년 6월 8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로티의 철학적 입장은 네오프래그머티즘, 인식론적 행동주의, 탈 근대시민 자본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그의 관심은 세세한 철학적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메타 철학적인 물음
이었다.
그는 기존의 철학이 갈수록 전문화, 세분화, 지역화 되어 세상과 담을 더욱 높게 쌓고 있으며, 특히 분석 철학자들이
형식 논리학과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세상과 소외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로티는 이러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실천적인 대화를 지속해 나간다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42.프레데릭 제임슨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은 예일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싸르트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 캘리포니아대학, 예일대학 등을 거쳐 듀크대학 교수로 있다.
제임슨(Fredric Jameson) 후기 마르크스주의(Late Marxism)
제임슨은 아도르노의 현실성을 하이데거, 푸코의 권력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한
부정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에서 아도르노를 해석하는 것을 유일한 현실성의 길로 격상시
킨다. "그의 철학적 저서나 미학적 저서가 갖는 독창성은 후기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기발함에 있다."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 1981)은 맑스주의 및 현대이론들에 대한 섭렵과 평가를 토대로 하여 자신의
맑스주의 문학연구 방법론을 확립하는 동시에, 맑스주의 이론을 은밀히 침식해 들어가는 후기구조주의 이데올로기 및
포스트맑스주의에 대항한다고 하는 이중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책이다.
이후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론, 영화론, 아도르노론, 브레히트론 등 수많은 저서를 출간하게 되지만, 그의 이론의
골간은 여전히 ‘정치적 무의식’에 있다고 하겠다.
43.에른스트 라클라우/샹탈 무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표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교조화되고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주류 흐름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정치이론과 사회
이론을 모색한 1980년대 이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계급성'과 '경제결정론'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안토
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재해석하여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사상을 다루었던 강좌에서처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를 이해할 때도 우리는 과연 무엇이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정통성을 강조하며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결정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던 것을 해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토대와 상부'라는 사회구조에 관한 고정된 인식과 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변혁적 주체를 설정
하려는 관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론적 정합성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체제 혹은 진영
내부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의 권위와 독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좌파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실천이론을 모색하던 당시에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원어로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연구했던 무페는 이데올로기 담론 분석연구를 진행했던 라클라우와의 협동 연구로,
우선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쟁점화된 정치적 기획의 실패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그람시를 분기점으로 삼아 마르크스
주의적 해방에서 결여되어 있는 정치적 전략을 만들어가려 했다.
그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본질주의 담론에서 비롯
된 헤게모니 지형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룩셈부르크, 카우츠기, 베른슈타인, 혁명적 생디칼리즘 등은 이 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을 세웠지만 그들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특히 파시즘의 승리로 끝나 버린 1930년대 서유럽에서의 가장 결정적인 실패는 참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람시는 "레닌주의의 계급동맹 개념을 극복하는 헤게모니적 결합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했다는 점
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해석하여 부르주아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지배 질서에 적대적인 새
로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혁명적 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혁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이
다한 다음에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단계가 도래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과연 지배와
부자유가 사라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 전략과 오늘날의 세계
라클라우와 무페가 개진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두 번째 문제제기는 '급진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 그람시의 헤게
모니 이론에 결핍된 전략적인 방안들을 구상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좌파들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기보다는 이것을 더욱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기획으로 재생산하여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전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물음은 대항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정치적 실천의 주체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무엇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디를 지향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된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총체성'은 대중들의 서로 다른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 연대 전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늘 유동적이고 현실에 밀착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 전략과 급진 민주주의의 정치실천에서 좌파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근본족인 갈등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는 적대적 관점의 실천성이다.
'적대' 개념에 근거한 갈등과 차별의 요소가 다원적 민주주의와 헤게모니 정치전략을 추동시키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지난 시기 동안 좌파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적 절차의 중요성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현존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시도를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동반했다"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의 지적이다.
1970년대말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양극화로 황폐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약삭빠른 기득권층은 이해관계에
따라 여전히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금융자본은 먹잇감을 찾아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그리고 '적(敵)'이 사라진 시대, '전선(戰線)'이 애매해진 시대에서 구태의연한 진보 진영의 한 쪽은 무능하게 자멸하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대응전략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달려 있다.
44.아즈마 히로키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 , 1971년 5월 9일 ~ )는 일본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이다.
스스로를 ‘사상가 견습’이라고 칭한다. 애칭은 아즈망(일본어: あずまん)이다.
도쿄 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인문학원 디렉터·특임교수, 와세다 대학 문화구상학부 교수로서, 학위로는 박사(학술,
도쿄 대학·1998년)를 취득하였다.
도쿄 대학 대학원 정보학환 객원조교수, 고쿠사이 대학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센터 부소장·교수 등을 역임했다.
1971년생의 도쿄 도 미타카 시 출신으로, 대학 전공은 현대사상, 표상문화론, 정보사회론이다.
1993년에 호세이 대학의 가라타니 고진의 강의에 숨어서 참가한 아즈마는, 자신이 쓴 평론을 그에게 직접 전달했다.
후에 그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라게리 수용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련의 작품을 논한 〈솔제니친―
확률의 감촉(ソルジェニーツィン-確率の手触り)〉(《비평공간(批評空間)》)으로 평론가로 데뷔, 평론 활동을 시작
한다.
본인은 ‘현대사상을 좋아하는 오타쿠’(現代思想好きのオタク)라고 자인한다.
또한, 2009년에는, 처음으로 소설 《퀀텀 패밀리즈(クォンタム・ファミリーズ)》를 발표했다.
일본 SF 작가 클럽 회원이자 일본 추리작가 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45.에드워드 사이드
에드워드 사이드 1935년 11월 1일 당시 영국령이었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태어났다.
1947년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해 공부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미국의 영문학자·비교문학가·문학평론가·문명비판론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현대 중동학에서 가장 인정 받고 있는 학자 중 하나로, 대표적인 저서 《오리엔탈리즘》으로
제국주의에 근거한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하였다. 또한, 평생 조국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7년에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망명 팔레스타인의 입법기관)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을 지지했지만, 1990년대 초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이스라엘이 맺은 오슬로 협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중동 지역을 다룬 저서로는 〈팔레스타인 문제 The Question of Palestine〉(1979)을 비롯하여 〈이슬람을 옹호함 :
미디어와 전문가는 어떻게 다른 세계에 대한 시각을 결정하는가 Covering Islam: How the Media and the Experts
Determine How We See the Rest of the World〉(1981),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공동으로 쓴 〈희생자를 비난함 : 거짓
학자와 팔레스타인 문제 Blaming the Victims: Spurious Scholarship and the Palestinian Question〉(1988), 〈강탈
정치학 The Politics of Dispossession〉(1994), 〈평화와 불만 : 중동평화과정 속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Peace and Its
Discontents: Essays on Palestine in the Middle Ease Peace Process〉(1995)가 있다.
그 외 유명한 저서로는 〈세계, 불만 : 중동평화과정 속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
(1983) 및 〈국가주의, 식민주의와 문학 : 예이츠와 탈식민화 Nationalism, Colonialism, and Literature: Yeats and
Decolonization〉(1988), 〈음악은 사회적이다 Musical Elaborations〉(1991),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
(1993)가 있다. 자서전 〈Out of Place〉(1999)에서 사이드는 서양과 동양 전통의 중간에서 살면서 느꼈던 자신의 양면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정치적 및 학문적 활동 외에도 사이드는 뛰어난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로도 알려져 있다.
46.테리 이글턴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맨체스터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와 20세기 영미문학을 연구하면서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폭로하는 데 주력했던 그는 문화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왕성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동시에 영국 내의 좌파 조직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이미 가톨릭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정치·문화론에 관한 글을 썼다.
그 후 구조주의 기호론, 정신분석학 등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유물론적 문예론을 펼쳐나갔다.
서구사회에서 문학이 담당해온 역할에 다분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문학이라는 대상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살
피고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트리니티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이 알튀세의 영향을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학문의 세계를 여전히 넓혀나가고 있다.
2003년에 펴낸 『이론 이후』에서는 그간의 태도와 달리 문화이론과 문학이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대적인 것 거부를 비판하며 절대적인 것, 진리를 옹호한다.
주요 저술로는 『이성, 신앙, 혁명 : 신에 관한 논쟁 고찰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2009), 『삶의 의미』(2007), 『성스러운 테러』(2007), 『영소설』(2004),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문화의
이념』(2000),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상The Illusions of Postmodernism』(1996), 『미학의 이데올로기The Ideology of
the Aesthetic』(1990), 『문학이론 입문』(1983) 등이 있다.
47.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독일어: Hans-Georg Gadamer, 1900년 2월 11일 - 2002년 3월 13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해석학
(Hermeneutik)으로 이름 붙여진, 언어 텍스트의 역사성에 입각한 독자적인 철학적 접근으로 알려진다.
제삼 제국 시대로 잠시 하이데거로부터 떨어져 있던 가다머이지만, 1940년대말에, 다시 하이데거의 강한 영향권에 비
집고 들어갔다.
하이데거 철학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빌헬름 딜타이 등의 낭만주의·역사주의적인 해석학이 껴안는 문제에 대
해서 결정적인 의의를 가진다는 인식을 가다머는 그 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초두, 그는 일서를 쓸 결의를 해, 9년을 걸치고, 자신의 지금까지의 연구나 강의를 집약하는 형태로,
1960년에 '진리와 방법'으로서 간행되는 원고를 가다듬어 갔다.
'진리와 방법'의 제2부에서, 가다머는 지금까지의 해석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을 세웠다.
낭만주의·역사주의적인 해석학은 텍스트 없이 역사적 사건을 그 시대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역사적 의식의 요구에
따라서, 형식적인 해석학적 순환을 텍스트나 역사에 적용해, 이해하는 사람의 역사성을 부정해 버렸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해 (요해)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존재 양식으로서 그것 자신 역사적이다.
인문과학으로의 이해, 과거부터 전승된 텍스트의 이해는 낭만주의·역사주의적 해석학이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현재
와 현재에 유래하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시대를 뛰어넘고, 성립시의 텍스트나 그 저자의 심정을 재구성하는 것은 아
니다.
이해는 과거가 현재에 매개 (중개)되는 사건, 과거부터 전해진 텍스트의 의미에의 참여이다. 이해가 매개·참여인 이상,
텍스트의 내용을 현재에 활용하는 적용은 이해에서 언제나 벌써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텍스트 그 자체의 의미를 파악한 후에, 그것을 나중에 스스로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이해를 가다머는 또, 플라톤의 문답방법에 따라서, 물음과 대답의 변증법이라고도 기술했다.
우선, 과거부터 전승된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말을 걸어 물어 본다.
텍스트의 내용의 진실성에 작동되어 해석자에게 자명하고 무의식적인 것 (선입견)이 자명성을 잃는다.
이에 따라서는 비로소, 해석자는 스스로의 선입견을 음미해, 텍스트에 물음을 세우게 된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위르겐 하버마스의 비판 (1967년)과 거기에 계속 되는 그와의 논쟁은 가다머의 이름을
일약 세계에 알리게 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퇴관 (1968년) 후도, 가다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이나 유럽
의 제대학에서 불려 다수의 강연이나 강의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과학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도 말해야 할 하버마스의 비판에 의해서, 가다머는 그 해석학의 인문주의적
인 좁음을 변명해 극복하도록 강요당해 그 결과, 그의 해석학은 인문과학론으로부터, 언어에 매개된 세계 경험에 대
한 이론으로 중심을 변화 시켰다.
하지만, 이는 '진리와 방법'으로는 미전개인 제3부의 언어론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와 방법' 후의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으로 간 슈라이에르맛하나 디르타이의 해석에 대해서, 그 전문의 연구자로
부터 비판을 받으면, 자기의 해석을 변명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어론을 발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퇴관 전후로부터 트란 등의 현대시를 해석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을 구체적 사례에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세련된 것으로 해, 또, '진리와 방법'으로의 적용론을 1980년대에 실천
철학론으로서 전개했다.
48.테오도르 아도르노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1903년 9월 11일 - 1969년 8월 6일)는
독일의 사회학자, 철학자,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그리고 작곡가였다.
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학자로는 이 외에도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이 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 는
2세대 학자이다.
아도르노의 대표 저서로는 미국 망명기간 동안에 호르크하이머와 공동으로 작성한 계몽의 변증법을 비롯하여,
부정 변증법, 미니마 모랄리아, 신음악의철학, 미학이론 등이 있다.
문화산업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을 받는 대중문화는 대량생산체제를 바탕으로 한 기계적 생산에 문화적 의미가 변질
되기 때문에 진정으로 문화가 담고있는 본질이 파괴되며 이를 수용하는 대중은 표준화, 규격화, 상업화된 문화에
종속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바라보는 문화란 이성에 바탕을 둔 인간의 고유한 활동으로 본다.
아도르노는 문화가 자본주의적 사회화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 매개적 기능이 문화산업으로 대행되었다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에 의하면 이 문화산업이란 야만적 무의미, 동조, 권태, 현실로부터 도피의 조달자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아도르노는 소비가 조장되는 문화산업으로 인한 상품들이 대중에 대한 정치,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더욱이
자본주의 체제의 현상유지에 대중을 유착시키고 의식을 내면화하여 현 체제에 순응하게 한다고 보았다.
아도르노에게 문화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었으므로 그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생산에 의해 변질된 문화상품은 더 이상 사회변화의 기제가 될 수 없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물질화가 이루어지고 통제된 사회에서 생산 노동 기술 및 당은 체제 유지에 도구화된 메카니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기존 질서의 유지는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여 내면화하도록 되었고 그 의식의 내면화는 문화산업에 의해 별
다른 저항없이 이행된다고 아도르노는 믿었다.
그래서 아도르노에게 문화산업은 해방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설명하는 데 있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첫째, 문화산업은 광고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중들의 관심, 흥미를 끌고 계속 사로잡아야 하고
둘째, 문화산업의 산물들이 대중들의 의식에 맞게 설정되어 생산물들을 선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의 상업적 목적을 지닌 산물들은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게 하지만 대중들로 하여금 능동적, 비판
적인 태도를 무마시키고 무비판적인 시각으로 수용되도록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에 의한 문화산업의 발전과정 내용, 기능을 살펴보면
첫째, 문화산업의 발달은 고전적인 광고미학과 표준화된 광고미학 사이의 격차를 점점 더 크게 함으로써 자율적
예술의 진지함과 그 도전적인 특성은 유용성에 대한 점진적인 추구로 인하여 보다 약화된다고 보았다.
둘째, 문화산업의 내용으로서 시장논리에 입각한 문화산업이란 문화발달에 관한 관심보다 경제적인 이윤추구를 목적
으로 설립된 영리 산업이며 따라서 대량생산되는 문화항목은 곧 문화상품내지 상품문화인 것이다.
셋째, 문화산업은 이데올로기 조작에 의해 소비자를 위로부터 통제하려고 하며 거기에는 동조가 의식을 대신하고
규범으로서 어떤 일탈도 허용되지 않으며 문화산업은 반계몽적이며 자기자신이 판단하거나 결단을 내리는 자율성을
가진 개인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허위의 욕구라고 말하고
있다.
49.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1892년 7월 15일 ~ 1940년 9월 27일)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
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게르숌 숄렘의 유대교 신비주의와 베르톨트 브레히트로부터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또한 비판
이론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도 관련이 있다.
베냐민의 사상은 무엇일까. 명백한 해답은 없다. 아니, ‘영원히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맞으리라.
숄렘은 그의 사상이 결국 유대교 신학, 특히 카발라 비교(秘敎)신학을 전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등 베냐민의 원고를 품에 안고 미국으로 간 아렌트는 베냐민이 그녀의 스승 후설처럼
유럽 문명의 몰락을 고민하며 그 정신을 재구축하려 애쓴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회 비판적, 체제전복적인 성격에 주목해 헤겔을 비롯한 독일 철학의 계보를 이어받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에 전해준 이론가로 보는 시각이 있고, 그를 급진적이고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동양어학자 셰더는 그를 ‘유사 플라톤주의자’로 보았고, 아도르노는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했다.
이런 시각은 모두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만이 참된 베냐민론이고, 다른 베냐민론은 그릇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베냐민의 글은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나 있다. 니체처럼 격앙된 비유로 점철되지도 않고, 비트겐슈타인처럼 극단적인
절차탁마 끝에 토해낸 무색무취한 공식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그는 전통적인 용어의 의미와 논법을 뛰어넘어 자신만
의 질서에 따라 단어를 배열한다.
그의 글은 언뜻 읽으면 사적인 ‘주절거림’처럼 보이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군데군데 암호화된 강령처럼도 읽힌다.
보수적인 듯하지만 혁명적이고, 몽환적인 가운데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토록 여러 갈래의 베냐민 해석이 있고, 그토록 많은 베냐민 관련 논문이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어쩌면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여러 학문 전통을 융합해 사상을 구축하고, 거의 강단 밖을 떠돌며 비평, 번역,
윤문, 창작 등 온갖 글쓰기를 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베냐민의 심연에는 ‘낙원’에 대한 영원한 동경이 깃들어 있었다.
‘참된 본질로의 복귀’, 그것이 그의 사상 전반을 관류하면서 출발점이자 최종 목표가 되고 있다.
베냐민은 한 세대 앞선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그와 자신의 유사성에
한껏 주목했다(그리고 차이점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프루스트도 ‘병약한 도련님’으로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으며,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섬세하면서도 복잡한 기질
을 연마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미래에 대한 벅찬 희망이나 이상적인 미래를 창조하
리라는 의지가 아닌 낙원과 같았던 어린 시절,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회복으로 가득하다.
베냐민도 그랬다. 그는 성인이 된 후 더 많은 지식을 지니고 더 복잡한 경험을 하게 되었지만, 진솔한 꿈과 행복과
충족이 있던 어린 시절에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절이 영영 상실되었다기보다는 영혼 깊이 아로새겨져
베냐민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기에, 그 시절은 ‘지금 이 시간(Jetztzeit)’이기도 하다.
과거 시간과 지금 이 시간의 본질적 동일성과 실존적 상이성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일, 그것이 베냐민의 개인적
과제이자 사상적 과제였다(과거와 현재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사고와 비슷하다고
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릴 때 풍요와 영광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유물과 옛이야기로만 간접 체험했던 레비스트로스가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구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었던 반면, 베냐민에게 과거란 생생한 실제로, 뜨거운 홍차에 곁들인 마들
렌 과자 맛처럼 감각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령 언어. 번역을 하는 사람은 보통 딜레마에 빠지는데, ‘원문의 어의를 최대한 정확하게 살려서 번역할 것인가, 읽는
이가 원문의 큰 뜻을 이해하기 쉽게 과감한 의역을 시도할 것인가’다.
그러나 베냐민은 두 가지 모두 잘못이라고 보고, 번역은 ‘잃어버린 본래의 언어’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여겼다.
말하자면 ‘태초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 보이는 대상을 두고 ‘사슴’, '나무’, '시냇물’ 등으로 이름을 지은 아담의 언어는 곧 의미의 창조였다.
그 언어는 이른바 기의와 기표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되면서 ‘나무’는 ‘tree’로도, ‘baum’으로도, ‘もく’
로도 대체할 수 있는 한낱 기표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의미 자체가 아니라 의미의 전달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번역 과정에서(물론 창작 과정에서도) 그런 잃어버린 본래의 언어를 되살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지,
원저자와 독자사이의 소통을 보조하는 기능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덕분에, 번역 시장에서 베냐민은 그리 인기가 없었다).
또한 역사. 대체로 역사관은 어떤 세계나 사회가 생로병사를 무한히 반복한다는 순환적 역사관과 일방적인 진보를
거듭해나간다는 발전적 역사관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베냐민에게 역사란 진보면서 순환이다. 아니, 일정한 방향 자체를 논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전환이 반복된 끝에 ‘혁명’ 또는 ‘메시아의 강림’이 일어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 이는 한편으로 예전의 역사로 되돌아가는 것도 된다.
이렇게 볼 때, 전혀 상반되는 듯한 유대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유대교는 메시아의 강림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원시 공산주의’로 되돌
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베냐민 예술론에서 유명한 개념인 ‘아우라’ 역시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아우라는 예술 작품 본연에 속해 있으면서도,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관심에 따라 형성되는 작품이면서
작품 이상의 감각 경험, 실존을 넘어서는 본질의 빛이다.
현대의 기술 복제는 유일무이했던 예술 작품을 무한히 양산하고 보급함으로써(사진, 영상 등의 형태로), 소수만 가능
했던 예술품의 감상을 대중화해 작품의 아우라를 소멸한다.
이는 비극적인 과정이지만(본질의 빛과 무관한, 조야하고 천박한 감각 경험만이 넘치게 됨으로써), 경배하는 예술만
있던 시절 감상하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 사이에 노정된 권력관계가 허물어지고, 본래는 가벼운 유희에 지나지 않았
던 예술의 본모습이 회복되고, 프롤레타리아의 손으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나갈 가능성이 열리는 희망적인 과정
이기도 하다.
50.수잔 손택
Susan Sontag은 1933. 1. 16, 미국 뉴욕 뉴욕 시에서 출생한 미국 작가로 현대문화에 관한 수필로 유명하다.
애리조나 주 투산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랐고 1년 동안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를 다닌 뒤 시카고대학교로 옮겨
1951년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1954 문학석사)과 철학(1955 문학석사)을 전공했으며, 첫 소설 〈은인 The Benefactor〉(1963)
을 출판하기 전까지 몇몇 칼리지와 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1960년대초에 몇 편의 수필과 서평을 썼으며, 그중 대부분이 〈뉴욕 리뷰 오브 북스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코멘터리 Commentary〉·〈파티전 리뷰 Partisan Review〉 같은 정기간행물에 실렸다.
이 짧은 글들 중 일부가 〈해석에 반대하여 Against Interpretation and Other Essays〉(1968)에 들어 있다. 2번째 소설
〈Death Kit〉(1967)을 발표한 뒤 평론집 〈Styles of Radical Will〉(1969)을 냈다. 중요한 후기 작품으로는 〈사진 이야
기 On Photography〉(1977)·〈은유로서의 병 Illness as Metaphor〉(1979)·〈사투르누스의 별자리 Under the Sign of
Saturn〉(1980)·〈에이즈와 그 은유들 AIDS and Its Metaphors〉(1988)·〈The Volcano Lover〉(1992)가 있다.
손태그의 평론에 나타나는 특징은 현대문화의 다양한 면과 성격에 대해 진지하고 철학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1964년 〈'캠프'에 관하여 Notes on 'Camp'〉라는 평론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 평론에서는 특정사회집단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 취향의 특성을 다루었다.
영화·사진·연극 등과 같은 주제와 나탈리 사로트, 로베르 브레송,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인물에 대해 글을 썼다.
평론과 소설 이외에 영화대본도 썼으며 롤랑 바르트, 앙토냉 아르토의 작품을 편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