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인 2021.01.15 10:38:07
먼저 보림사의 등장배경을 다시 살펴본다.
지난번 칼럼 ‘보림사 구룡, 천관산 구룡’에서 그 구룡(九龍) 지위의 차이점을 대비해보았다. 그렇다면 비교적 가까운 백리 거리에서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나아가 그런 상대적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보림사는 왜 유치 가지산 계곡에 입지하게 되었을까? 기실 보림사 자리는 수행에 적합하고 풍광이 좋은 명산대천이라 볼 수 없고, 신라 경주 중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시골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헌안왕(재위857~861)은 ‘체징(804~880)’ 선사를 그 백여년전 759년에 ‘원표 대덕’이 개창했던 가지산寺로 860년경에 초빙하였고, ‘체징’이 입적한 후 883년에 헌강왕(재위875~886)은 중국 남종선과 ‘육조대사 혜능’의 적통성을 인가하는 징표로 ‘보림사’ 사액을 내렸다. 경주의 왕실과 부호들은 보림사 불사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체징’ 제자들은 800여명에 달하였다고 했다. 장흥 유치 골짜기에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개인적 추론이다. 돌이켜, 828년에 개설되어 ‘장보고’가 머물던 ‘청해진’으로 신라 왕권계승을 다투다 패배한 ‘김우징’이 837년에 피난을 와 의탁할 때, 그 가까운 천관산은 장보고 청해진의 전략요충지가 되었으며, 당시 정권을 잡은 민애왕(김명, 재위838~857)에 대한 반대세력의 집결지였으며, 천관산 화엄 신중들은 ‘김우징’을 외호하였다고 했다.
‘장보고’가 거느렸다는 5천 기마(騎馬)는 완도 ‘장도’ 그 작은 섬에 머물 수 없으며, 아마 천관산 내륙 쪽에 있었을 것. 그런데 ‘장보고’의 공으로 신무왕(839년,김우징)과 문성왕(재위839~857)이 들어섰음에도 ‘장보고의 딸을 왕비(차비 납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어긴 데서 결국에는 그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는바, 무주 사람 ‘염장’에게 ‘장보고’는 846년에 암살되고 청해진은 851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이에 경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해로변 지역과 천관산 지역은 反신라왕실 세력으로 돌아섰을 것. 당시 무주도독 등을 역임하며 ‘김균정, 김우징’ 부자를 지지했던 ‘김양(808~857)’은 신라 무열왕 후손으로 초기에는 장보고 후원세력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장보고 배척세력으로 변했다. 그 ‘김양’의 딸이 문성왕의 왕비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남부 지역의 반발여지에 급격한 정세변환에 불안을 느낀 경주 왕실은 그 타개책으로 신라왕성 김씨로 무열왕계에 가까운 진골 출신 ‘체징’을 초빙 형식으로 그 천관산 북쪽의 유치 가지산 계곡으로 불러들인 것 아닐까? ‘체징’은 837년에 도당(渡唐)하여 840년에 귀국하여 859년경에는 무주에 있었다.
마침 그 가지산寺는 경덕왕(재위742~765)을 법력으로 보좌했던 ‘원표 대덕’이 759년에 개창하여 머물던 구거(舊居)로 경덕왕이 면세면역의 ‘장생표주’를 내려줄 정도로 신라왕실에 친화적이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온 체징’은 ‘먼저 있었던 원표’의 후광(後光)을 이용하면서 화엄종 본존불 ‘비로자나불을 왕즉불(王卽佛)’ 사상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융합할 수 있었을 것. (‘화엄사 원표’도, ‘선사 체징’도 모두 그들을 지원해주는 신라 왕실에 가까웠다) 또한 교리적으로도 화엄종 비로자나불은 선종 법신불로 그대로 수용될 수 있었을 것. 바로 그런 융합적 사정이 뒷받침되었기에 ‘원표 대덕’의 행적은 ‘보조선사 창성탑비(884)’에 긍정적으로 기록되어졌을 것이다. 또한 <보림사 사적기>에 기록된 ‘보림사 연기설화’에 일부 내용적 모순을 빚으면서도 심지어 ‘보림사 개산조 원표’ 형식으로도 아울러 수용했을 것. ‘원표 대덕’에 관련하여, ‘법력이 높은 고승이 냇물의 상류에 위치한 명당으로 거슬러 찾아온 설화, 이른바 천하 삼(三) 보림사(또는 세 곳 지제산 가지사) 설화, 독룡의 항복을 받은 독룡조복(毒龍調伏) 설화’ 등은 보림사의 대외적 위상을 드높이고 그 정통성을 보강하는 상징적 배경장치로 활용되었을 것. 요컨대 장흥 보림사는 ‘신라왕실의 내부적 왕권투쟁, 신라왕실과 장보고의 정치적 갈등, 청해진 시대(828~851) 명암’의 잔영에 따른 지정학적 위치와 상황에 대응하여 설계되고 입지된 것 아닐까? 860년경 정치적 상황에서 그 배후로는 북쪽의 무주 후원세력에 가깝고, 그 앞으로는 남쪽 천관산 반발세력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이 선택되었을 것. 영암 ‘곤미현’과도 통하며, 그 가까이에 ‘수인산성, 유치 빈재’가 위치하였다.
보림사 지역- ‘체징 선종’, 구산선문, ‘원표 화엄종’, 매화보살 설화, 비로자나불 왕즉불, 親신라왕실 경주세력, 북쪽 무주 지원세력, 反구룡(독룡조복)
천관산 지역- 화엄종, ‘의상 대사’ 설화, 의상암, 親장보고, 지제산, 천관보살신앙, 남방해상세력, 親구룡(구룡기우) (필자 개인적으로는 천관산록의 ‘대덕연지 왕비사당’을 오래 전부터 ‘장보고 딸’을 모신 곳으로 추론해 왔다)
이제 “원표”에 대해 살펴본다.
일제시대 자료에 의하면, “유치 보림사 지역의 서부도 지역에서 ‘원표선사(禪師) 부도’가 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원표’는 누구인가? 천보 연간(742~756)에 활동하며, 중국 복건성 곽동산 지제산 천관대에서 화엄경 80본에 근거한 천관보살신앙을 전파하며 지제산 화엄사에서 45년을 머물다가 ‘하늘로 떠나갔다는 원표’는 누구인가? <보조선사 창성탑비> 등에 나오는 ‘원표 대덕’의 행적에 비추어 보면, 비록 ‘보림사 법통(法統)’은 ‘도의ㆍ염거-체징’으로 이어질지언정 ‘보림사 사통(寺統)’은 ‘원표-체징’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한편 신라왕자 ‘김교각(김지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구화산茶’라는 신라茶를 개발했다고도 하며, 흥덕왕 시절 828년에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김대렴’이 귀국길에 茶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시배하였다는데, 755년경에 귀국하여 759년경에 보림사 전신되는 가지산寺를 개창한 ‘원표 대덕’이 ‘보림사 茶’의 시원(始原) 전파자가 될 여지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