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보내는 편지(83)
샬롬 !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고 저녁이 되면 다시 어둠이 깔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어느 날은 그것조차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비가 내립니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는 우리의 마음까지 고요 속으로 파묻히게 만듭니다. 이름하여 봄비이지만 타들어 가는 가뭄 때문에 반갑다기보다는 대구 지하철 참사 후 내리는 비여서 구슬프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도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시면서 위로와 생명의 빗줄기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우리의 절망과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아픔을 치유하러 오신 그 예수님을 마음으로 만나시기 바라며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사랑을 보냅니다.
정말 뉴스만 보고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슬퍼서 말이 안나옵니다. 할말은 정말 많은 것 같은데 다 저와 같은 생각이시겠죠. 한 사람의 실수가 얼마나 큰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기관사라고 피해를 줄이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만 문명의 이기라는 그놈의(?) 마스컨키(마스터 컨트롤키)가 문제 될 줄은 또 누가 알았겠습니까? 까아만 공포의 도시로 변해버린 달구벌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은 님들의 비명소리와 못내 이별연습도 하지 못한 구슬픈 님들의 못 다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뒤범벅되어 하나 둘 삶의 여백 속에 파고드는 듯하여,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습니다. 다만 주님! 떨어진 생명의 씨앗들이 용서와 회복의 씨앗 되어 한으로 가득찬 우리민족의 가슴속에서 갈등을 뛰어넘는 화해와 사랑으로 열매맺게 하옵소서! 기도할 따름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이 삶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선생님께 전화해서 하염없이 운다면 뭐라고 위로해 주실른지요? 힘들지만 좀 참으라고, 더 큰 불행을 만난 이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그냥 실컷 울도록 내 버려 두던가 같이 우실건지요. 반대로 선생님에게 어떤 뼈아픈 사연이 생겨서 눈물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어떤 위로를 받고 싶으신가요? 우리가 받고 싶은 그 위로가 바로 우리가 주어야 할 위로일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처럼 참사소식을 듣거나, 이웃의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거나 어느 탈렌트가 죽었다는 소식, 친척의 부음을 듣고, 그제서야 사람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오늘 하루도 죽음을 향해 걷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흙으로 된 몸이 풀어지기 전에 오늘은 죽음을 앞둔 불치병 환자의 심정으로 유서 쓰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살아온 수십 몇 년의 시간을 뒤돌아보시고 남아있는 시간의 의미를 새겨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서 쓰기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나 써 본 후에는 시간의 관념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법이 달라지고 세상을 사는 법이 달라질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겸비해 지고 솔직해 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펑펑 함박눈이 내린 후에 나뭇가지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송이를 가만히 들여다 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어떤 눈송이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기도 하고 어떤 눈은 예쁜 레이스처럼도 보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눈송이 가운데에는 반드시 이물질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떠돌아다니는 먼지나 이물질 주변에 물방울이 엉겨 붙어 눈송이를 만들게 되는데 이 이물질은 십만분의 일 밀리미터도 안될 만큼 작지만 이것이 없이는 그토록 아름다운 눈송이가 생기지 않는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도 눈송이 속에 숨어있는 더러운 이물질 같은 아픔이 늘 다가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질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이에게는 이번처럼 불의의 사고가, 또 다른 이에게는 실패와 좌절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믿음을 방해하는 유혹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이물질을 피해서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 이물질을 이겨내면서 아름다운 눈송이를 하나씩 만들어 내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연단된 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눈송이처럼 아름다운 인생의 흔적을 남기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때문 혼자서 밥을 해먹곤 합니다만 그때마다 쌀이 밥이 되는 기적(?)을 보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쌀을 물에 씻고, 조리질을 하고 밥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흐릿한 가치와 판단 등이 이제 매일의 일상을 통해, 때론 조리로 걸러지는 사건들을 통해 변화되고 나의 영혼은 새 옷을 갈아입는 듯 합니다. 단순한 물과 같은 일상의 삶이 나를 준비시키고 희망의 삶을 살아야 함을 느끼게 합니다. 단지 내가 할 일은 조리에 걸러질 때 씻겨지는 더러움이나 돌들을 숨기거나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쌀이 밥이 될 때 또 하나의 신비는 밥솥의 1/3만 쌀을 안쳐도 많은 양의 맛있는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불 속에 가열되는 시련의 시기는 나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대와 은총의 시기이기에 난 단지 의탁하며 신뢰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의 부족함과 약점인 딱딱하고 굳은 쌀이 하나님의 따뜻한 불과 열기로 맛있는 밥이 되듯 하나님께 믿고 의지하는 만큼 쌀이 많은 밥이 되는 은총의 양이리라. 매일 먹어도 지루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맛있게 먹히는 밥은 매일 빵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주님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빵으로 먹히고 계시듯, 나 또한 어렵고 힘겹지만 다른 이에게 먹히는 삶을 살 때,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으로 나아가는 출발이 되며, 이것이 진정 복음의 증인이 되는 밑거름이 되어지는 것을....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코뚜레를 할 때가 되자 맏이 송아지가 농부한테 "저한테는 코뚜레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사정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가 되고 말텐데."하고 말했습니다. 맏이 송아지는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하여야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니 일을 곱절로 잘한다는 말을 제가 듣고 말테니까요" 농부는 맏이 송아지의 말을 들어 아래 송아지한테만 코뚜레를 하였습니다. 맏이 송아지는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를 지고 쟁기를 끌었으며, 코뚜레를 한 아래 송아지가 지쳐 쉴 때도 더욱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하였습니다. 송아지들이 자라서 어느덧 소가 되었습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이한테 차츰 꾀가 늘면서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고 잡으러 오는 농부를 뒷발로 차주기도 했습니다. 코뚜레를 한 아래 소가 어느 날 들에서 돌아와 보니 맏이가 보이지 않아서 어디 갔느냐고 묻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도살장으로 보냈지."
사랑하는 선생님 여러분! 코뚜레없는 송아지였으면 하지만 마음이 쓰리고 아려오는 아픔 속에 지금껏 우리를 남겨주시고 어였삐 보시어 중등부 교사의 사명을 감당케 하심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로움이 숨어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 중등부의 꿈을 향해 도전과 모험을 시작하려 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암담하면서도 한 영혼을 아끼시고 사랑하는 열정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먼저 그들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꼬옥 안아주십시오. 늘 말하지만 그들은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반별 친목회는 바로 그 초석이 될 것입니다. 가능하면 음식점이 아닌 선생님들 댁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번잡하시리라 생각하지만 먼저 그들에게 열어 보이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초대하여 떡볶기나 만두에 선생님들의 사랑 담긴 조미료를 넣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리면 그들의 언어요 친구인 이멜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사연을 남기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봄방학이 최고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번 23일 오후예배 후에는 2월 교사 월례회로 모입니다. 안건은 임역원수련회, 3월중 행사계획, 동아리활동의 활성화, 장학생추천, 반별친목회 등에 대해 함께 의논하며 모사를 이루어 가길 원합니다.
빨리 목련꽃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나리도 화들짝 피었으면 싶습니다. 새 봄에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가다듬고 싶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와진 영혼으로 이웃을 보고, 나무를 보고, 꽃을 보고,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