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日 축시(丑時)
-청소년 국제 월드컵 8강전을 보며-
글 德田 이응철(春川産)
장마가 인색하게 내리던 지난밤이었다.
풍수해를 심하게 입은 내력이 전무해서 그런지, 아니면 일찍 찾아온 폭염으로 기력이 쇠잔해 종일 흔들리는 망초가 되어서인지 장마다운 장마를 심히 학수고대하던 하루였다.
어제 7일 일요일은 종일 분주한 하루였다. 유난히 호박장을 좋아해 고향에서 애호박 한 자루를 둘러메고 한 시간 이상 도보로 후평동 자택까지 오니 전신이 쑤시고 스멀거린다. 오후엔 며느리 일계급 특진으로 사돈 내외와 신바람 나는 점심을 먹으며 한껏 삶을 노래하며 축하해 준 날이 아니었던가! 육체적으로 피곤했지만 정신적으로 달고 시원한 날이 있어 살맛이 난다. 자식 둔 맛을 톡톡히 음미한 날 영혼 또한 순수로 채색된 날이다.
그래서인지 초저녁부터 숟갈 놓기 무섭게 피곤이 엄습해 녹초가 되었다. 매일 심한 운동은 못해도 들짐승처럼 한 시간 이상 정기적으로 이 골목 저 들판으로 쏘다니며 나름대로 산책을 한다.
거실에서 새우등을 하고 비몽사몽의 제 3 세계를 넘나들다가 대충 깨보니 자정이 막 넘었다. 창밖은 어떤가! 무엇이 두려운지 장마라고 이름 붙어진 빗줄기는 망구(望九)를 바라보는 노년의 미력처럼 소리조차 없고 이따금 번쩍-하고 겁을 주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아파트 숲이 훤하다. 순간 ? 하면서 몸을 추스르고 5번부터 채널을 수색하니 와-, 20세 이하 한국청소년 축구 8강전이 숨 가쁘게 열리고 있는 중이 아닌가! 라이브(live)-. 스코어는 1-1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내일 아침 얼마나 탄식했을까!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꽤나 내린다고 예고하던 밤이지만, 무엇에 주눅이 들었는지 영 심상치 않다. 빗소리조차 크지 않아 예전 엄니한테 야단맞은 며느리 윗방에서 숨 쉬 듯 자작자작 들려올 뿐이다.
8강까지 오면서 다소 실망한 청소년 축구-. 탈락될 우려도 있었지만 용케도 이날 이라크와 4강을 놓고 격돌하는 라이브를 관전하는 맛은 어디에 비유할까? 초록 산모롱이에서 흐드러진 멍석딸기를 발견하고 마구 따서 바구니에 담는 격이리라.
실점하면 쫒아가고, 다시 실점해 2-1이 되어 전반전이 끝났다. 실망의 바람 한 줄기가 분다. 잠시 다른 세상 채널을 열고 분청자기 설명에 빠져있다가 다시 컴백하니 후반전이 시작되었는데 아니 어느 사이 추가점을 얻어 2-2 동점이 아닌가!

조선일보 7/9일자
와-. 눈을 비비고 스코어판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연장전-. 다시 한 골을 실점을 해 3-2, 기적의 후반 종료까지 남은 시간 2분-. 패색이 짙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추스르고 기도까지 하던 중, 와! 기적은 찾아왔다. 2분을 남기고 정현수선수가 오른발로 때린 중거리 슈팅이 상대 머리를 스치면서 골대 한 구석의 그물을 출렁일 줄이야-. 구사일생 3-3 동점!!
앞뒤로 우거진 후석로 아파트 숲에서 와- 하고 함성이 터진다. 그 탄성의 짧은 순간을 어찌 감칠맛 나게 표현하지 못한 나의 둔필이 원망스럽다. 참 대단하다, 한국의 뚝심이 빛을 발한다. 그때 쾌감은 겅중겅중 들판을 내달리는 기분이랄까! 외화에 취해 있다가 안방에서 어느새 곯아떨어진 갱년기 아내를 흔들어 스코어를 마구 외치며 기쁜풀이를 하고 나온 시간은 축시(丑時)을 넘어섰을 때다. 그 때의 맛깔난 공간을 포장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상품일까!
그래! 승리의 여신은 진정 우리 편이구나!! 신에게 감사한다. 경기장은 그야말로 극명하게 대조를 보인다. 다 이겼다고 널브러져 만면에 미소를 짓던 이라크 감독은 어떤가! 동점이 되자 쏟아지는 두통을 견딜 수 없는 편두통 환자처럼 머리를 그라운드에 박고 궁둥이를 하늘로 부쩍 세우고 고뇌를 토로한다. 우리 편은 어떤가! 행복의 여신을 맞이하듯 온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한껏 춤을 춘다.
진정 기적이었다. 기적은 하느님의 몸짓이라고 했다. 하느님이 형제의 나라 터키 카디르 하스 스타디움에 홀연히 오신 것이다. 아! 오늘 국내는 희비 교차가 얼마나 언론매체를 달구었나! 무사고를 자랑하는 아시아 항공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꼬리 동체가 하강하면서 잘려나간 날이요, 전날 밤부터 온 국민의 관심사인 남북 개성공단 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되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히 해 준 날이 아니던가! 그 참에 30년 만에 노렸던 4강 청소년 축구였다.
그러나 한밤중을 출렁이게 한 기쁨은 이내 승부차기에서4-5, 이라크에 승리의 여신은 손을 들어주고 우리 편에 분루를 삼키게 했다. 승부차기는 공포의 게임이란다. 쓰리고 아픈 승부차기-. 얼마 전 콜롬비아와 승부차기에서 8-7로 승리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콜롬비아 국민들 마음을 헤아려 본 축시였다.
기상청 예보가 빗나간 야심한 하일(夏日) 심야 축시(丑時) 3시 반-. 하나 둘 아파트 숲에 등불이 약속이나 한듯 꺼지고 가슴을 덮으며 느낀 것은 무엇인가!
-그래! 후회 없이 펼친 한판이 아닌가! 이광훈 선수의 실축만 입에 올려선 안돼! 잘 했어-. 승리의 여신은 항상 우리 편 만은 아니지, 지나치면 그건 심한 이기주의야!
삶의 기적을 우리도 오늘밤 공유했으면 그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잘 했어! 과정이 진정 훌륭했고 상대편 또한 개인기 정말 뛰어났어, 브라질 선수를 대하는 것 같았어!
회색으로 주춤거리는 새벽 장마를 커튼으로 닫고, 이미 깬 아내의 손길도 모른 채 묶어가도 모를 꿈나라로 직행하고 말았다.(끝)
(끝) 7/8 새벽에
첫댓글 신나던 그날, 선배님의 글로 감격을 더 합니다.
짜릿하여 패했지만 오래 위안이 되었지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