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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천일의 앤 ]
영화 <천일의 앤>은 헨리 8세의 아내가 되었다가, 후에 영국의 위대한 여왕이 되는 딸 엘리자베스를 낳지만 끝내 비운의 죽음을 당한 앤 볼린 왕비의 이야기를 그린 사극입니다.
사극 명작들을 남긴 극작가 맥스웰 앤더슨의 1948년도 원작 무대극을 영화화한 것으로, 찰스 재럿 감독의 치밀한 연출과 함께 리차드 버튼-쥬느뷔에브 뷔졸드의 빛나는 명연으로 영화사에 남을 사극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관록의 대배우 리차드 버튼의 상대역으로 그 전까지는 국제 무대에서 무명이었던 카나다 출신의 쥬느뷔에브 뷔졸드가 버튼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열연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조르쥬 들르류의 수려한 음악도 좋아서, 주제곡 ‘Farewell My Love'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청하는 영화음악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 제목인 <천일의 앤>은 앤 볼린이 왕비로 있었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영화는 영국의 왕 헨리 8세(리처드 버튼 분)와 비운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쥬느비에브 뷔졸드 분)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역사 재현 드라마라기보다는 역사를 소재로 한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 손에는 헨리 8세를,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영국을 움켜잡으려는 영리하고 깜찍하고 야심만만한 앤 볼린과 아들 후계자를 원하는 호색한 헨리 8세의 궁중에서의 사랑과 암투를 아기자기하고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 장래의 장인이 될 앤의 아버지, 딸을 달라고 살살 구슬리는 헨리
아울러 이 작품은 귀족들의 냉혹한 욕망과 야망을 쫓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 그리고 권력을 둘러싼 이들의 암투와 정치적 모략 등을 다양하고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두 번의 결혼과 알콜 중독으로 피폐해져 이제는 재기불능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리차드 버튼, 그는 이 작품으로 화려하게 스타의 자리에 다시 복귀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배우는 앤 볼린 역을 맡은 쥬느비에브 뷔졸드였습니다.
* 형장으로 가는 앤
그녀는 반항적이고 오만하면서, 현명함을 잃지 않는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멋지게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비운의 캐서린 왕비 역의 아이린 파파스, 추기경 울지 역의 앤서니 퀘일 등이 이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앤 불린은 특유의 재기와 강단으로 헨리 8세의 마음을 얻었지만, 헨리 8세의 정치적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여 그 강단이 파멸의 지렛대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앤은 외교관 아버지를 두었기에 일찍이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헨리 8세와 성서에 관한 담론을 나누면서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한편 왕비가 되는 날까지 절대 몸을 내주지 않으면서 확실한 미래를 약속받으려 했다고도 합니다.
앤의 야생화 같은 매력과 야망은 그녀가 단두대에서 흘린 피에 녹아들어, 유럽의 변방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해상 강국으로 거듭나게 한 엘리자베스 1세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각색은 이루어졌지만 역사적 사실의 흐름을 최대한 반영한 흔적이 보이는 명작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앤은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내 딸 엘리자베스는 당신네 가문의 어느 왕보다 더 위대한 왕이 될 거예요. 그 아이는 당신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영국을 통치할 거예요. 나의 엘리자베스는 여왕이 될 거예요. 그래서 나의 피는 뜻있게 쓰여질 거예요."
[ 간략한 줄거리 ]
앤 볼린(쥬느비에브 뷔졸드 분)은 영국 신흥귀족 볼린가의 둘째딸로 1507년에 태어나서 1522년까지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영국에 돌아와 헨리8세(리차드 버튼 분)의 왕비인 캐서린(아이렌 파파스 분)의 시녀가 됩니다.
헨리8세는 왕비 캐서린이 유산과 사산의 반복 끝에 1516년 딸을 낳고 아들이 없자, 이혼을 생각하고 있던 중 왕의 무도회에서 약혼자 퍼쉬와 함께 참석한 앤 볼린을 만나게 됩니다.
울지 추기경(안소니 쿼일 분)이 이 두 젊은이의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지만 당시 궁중의 금발과 풍만한 몸매의 여성과 달리 가냘픈 몸매와 신비스런 검은 눈을 가진 앤 볼린을 마음에 둔 왕 헨리8세는 이들을 떨어지게 하여 자신이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왕에게 농락당해 아이를 갖게 된 언니의 모습을 보고 앤 볼린은 일언지하에 왕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럴수록 더욱 후끈 단 헨리는 앤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난리를 피우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앤은 끈질긴 헨리 8세에게 자기를 정식 왕비로 맞아줄 것과 자신의 소생 자식에게는 왕위 계승자가 되게 하는 조건으로 당시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533년 1월 25일 결혼합니다.
학문에 능하고 패션 감각도 뛰어난 앤은 절제된 궁중생활로 모범이 되었으며, 1533년 9월 7일 딸 엘리자베스를 얻었으나 다음 해는 유산하고 1536년 1월에는 아들을 사산하자 왕자를 염원하던 헨리8세의 마음은 점차 멀어져 갑니다.
왕은 후사를 얻고자 다른 여자를 택하기 위하여 장애물인 앤을 어거지로 간통죄를 뒤집어 쒸우고 1536년 5월 2일 런던탑에 가둡니다.
* 왼쪽 크롬웰, 오른쪽 울지
앤은 간통혐의를 인정하면 목숨만이라도 보전해 주겠다는 왕의 제안에도 자신의 결백과 딸의 왕위 계승을 위하여 거절하고 끝내 죽음을 선택합니다. 2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한 앤 볼린, 그러나 그녀가 남긴 딸 엘리자베스는 대영제국의 영광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여왕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 인간 헨리 8세와 그의 여성 편력 ]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군주란 모름지기 예의가 바르고 무용이 출중하며 언행이 엄격하고 무엇보다도 신앙이 독실해야 했습니다. 아울러 교양있는 방종, 화려한 풍채가 구비되어야 했고 때로는 잔인할 것도 요구되었던 시대였습니다.
헨리 8세야말로 이러한 성격을 모두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종도 부부관계에서 이탈하지 말 것과 교양도 신학과 스포츠 정도였고, 사치도 취미였고 잔인성도 법률을 벗어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영국적인 특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들의 눈에는 헨리8세가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기있는 군주로 남았습니다. 후세의 일부 사가들도 그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 출생과 성장
헨리 8세는 귀족과 왕족들 간의 권력다툼이었던 장미전쟁이 끝난 6년 후인 1485년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부왕 헨리7세나 형인 아서 왕자를 수행하면서, 외교적 동맹관계를 잘 이용하면 유리하다는 점을 유년기부터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겨우 10살에 형수를 맞이하러 형을 대신하여 에스파냐에 다녀왔으나 형 아서 왕자는 결혼 후 6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
부왕인 헨리 7세는 살아남은 차남을 철저히 보호하기 시작했고, 헨리 왕자에게 통치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전수하고자 했습니다. 말년에 헨리 7세는 헨리 왕자를 계승자로 정하고 평화적으로 왕위를 양도했습니다.
* 젊은날의 헨리
헨리는 형인 아서 왕자가 스페인의 캐서린과 결혼할 당시 10살 소년이었습니다. 당시 헨리 7세는 강력히 부상하던 스페인 왕국과 국교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고, 장남인 아서 왕자를 스페인 왕녀 캐서린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이듬해에 아서 왕자는 몇 달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캐서린은 양쪽의 부왕의 뜻에 따라 이전 혼인을 무효화하고 다시 미성년인 헨리 왕자와 약혼했습니다. 헨리 7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즉각 캐서린과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몇 년간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연회를 함께 즐기는 등 서로가 좋은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영화에서 첫째 왕비 캐서린
1509년 즉위 당시 18살의 헨리 8세는 스포츠, 문학, 음악, 시 등 다양한 인문적 취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토피아>를 쓴 대학자 토머스 모어를 가까이하여 그의 강연을 즐겨 들었고, 나중에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인문학자로 소문났던 에라스무스를 역시 케임브리지 대학에 초빙하여 그의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헨리 8세는 활쏘기 부문에서는 전문가를 뺨칠 수준이었으며 말 경주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투계장을 둘 정도로 닭싸움도 즐겼습니다.
또한 문학적인 소양이 있어 시를 직접 창작하기도 했으며, 각종 악기를 수십개씩 소유할 정도의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던 다재다능했던 군주였습니다.
아울러 그의 정력이나 재능에 걸맞게 능력도 탁월해서 영국을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강국으로 부상시켰습니다. 이는 나중에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영국의 황금기를 여는데 큰 밑받침이 됩니다.
또한 캐서린과 이혼, 그리고 앤과의 결혼과정을 통하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과감하게 독립하며 영국 국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러나 공포감 없이 헨리 8세의 치세를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두사람의 왕비와 세사람의 총신의 목을 자른 헨리 8세...
런던탑의 단두대와 스미스필드의 화형장은 그의 치세기간 동안 항상 분주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를 변호하기 위해 이러한 소름 끼치는 처벌은 제한된 소수에게만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이런 대규모 잔인성이 필요로 했는지에 대하여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절대권력이란 인간의 최악의 본능을 나타나게 하는 법입니다.
* 헨리 8세의 화려한 여성 편력
* 헨리 8세와 여섯명의 왕비들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1536년 한 해 동안에만 헨리 8세의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사망했고 두번째 왕비인 앤 볼린은 참수되었으며, 제인 시모어가 세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제인 시모어가 유일하게 아들을 남기고 사망한 1537년, 헨리 8세의 상심은 꽤 컸습니다.
* 앤이 참수되던날, 제인 시모어를 만나러 가는 헨리, 웃는건지 뭔지 표정이 묘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3년간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40년 토머스 크롬웰의 적극적인 권유로 또다시 독일 클레베의 왕녀인 앤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해에 앤이 못생겼다는 바로 이혼하고 역시 같은 해에 다섯 번째로 당시 19살의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년 뒤인 1542년에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참수되었고, 이듬해인 1543년 헨리 8세는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와 결혼하여 비교적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그의 여성 편력의 배경에는 사실 아들을 낳아 튜더 왕가를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는 강한 의중이 실려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의 여성 편력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봅니다.
** 첫번째 왕비,에스파냐의 캐서린
고귀한 왕가의 딸로 태어나 왕비의 삶이 예상되었으나 아들을 생산 못해...
에스파냐의 페르디난도 왕의 딸이었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첫 왕비이자 후일 메리 1세의 어머니입니다. 캐서린이 당시 15살의 아서 왕자(헨리 7세의 장남)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들어올 무렵,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캐서린을 호위하는 행렬에 있던 헨리 왕자(후일 헨리 8세)는 10살이었습니다.
캐서린은 당시 우아하고 경건한 왕실의 여인으로서 품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원래 병약한 체질이었던 아서는 캐서린과 결혼한 지 몇 달 후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헨리는 캐서린은 이때 제대로 신방을 치르지 못했다 하여 이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하게 됩니다.
헨리 7세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캐서린과 아서의 동생인 헨리 왕자를 약혼시킵니다. 당시 헨리는 미성년이라 아직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후에 에스파냐와의 동맹 관계가 필요하지 않게 되자 헨리 7세는 이 결혼에 명분이 없음을 아들에게 알리고, 헨리는 이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헨리 7세 사망 후 즉위한 헨리 8세는 즉시 캐서린과 결혼식을 치르고, 이후 몇 년간 두 사람은 다정한 사이로 지냈습니다. 캐서린은 첫 아들을 낳았으나 몇 주 만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캐서린은 다섯 번의 임신과 유산을 거듭하지만 결국 생존한 유일한 혈육은 딸 메리뿐이었습니다. 캐서린에게 왕자 생산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헨리 8세의 마음은 돌아섭니다. 헨리는 때마침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볼린에게 끌리게 됩니다. 먼저 그는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캐서린은 이혼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결국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1532년에는 딸 메리와도 격리되어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결국 1536년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캐서린은 자신만이 영국의 정통성 있는 왕비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일한 혈육 메리에게 에스파냐의 유명한 교육자들을 데려와 양질의 교육을 시켰고 카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메리는 후일 메리 1세로 즉위한 뒤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을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어머니를 폐비시킨 신교 세력을 탄압하며 피비린내를 불러 일으킵니다.
** 두 번째 왕비, 앤 볼린
당차고 똘똘했으나 그녀 역시 아들 생산에 실패하여 목까지 잘리는...
앤 볼린은 캐서린처럼 왕실 출신은 아니었으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토머스 볼레인과 명문가인 하워드 가문 출신인 어머니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앤은 12살부터 프랑스의 궁정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나중에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는 프랑스의 왕비 메리 스튜어드의 시녀로 발탁되었으며, 왕비의 통역도 도맡아 했습니다.
뛰어난 용모는 아니었으나 활기찬 성격에 매력적인 검은 눈의 소유자였던 앤은 1522년 영국으로 돌아와 왕실에 들어갔고, 캐서린 왕비의 시중을 들다가 헨리 8세의 눈에 뛰게 됩니다.앤은 헨리의 마음을 얻게 되자, 대담하게도 왕비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동침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헨리 8세를 더욱 애타게 했고 왕은 대신과 의회를 달달 볶아 마침내 캐서린과 이혼했습니다. 이혼하기 직전인 1532년 12월에 앤은 결국 임신했으며 1533년 1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그러나 그해에 태어난 아이는 공주인 엘리자베스였으며 이는 헨리를 무척 실망시켰습니다.
* 런던탑 감옥에서...
이후 앤은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으나 계속 실패하면서 왕의 신뢰를 점차 잃어갔습니다. 앤은 캐서린 왕비처럼 든든한 친정의 인맥도 없었고 대중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급속히 몰락해 갔습니다.
헨리의 사주를 받아 그녀를 제거하려던 세력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녀와 친오빠 간에 간통죄와 근친상간죄를 뒤집어 씌웠 버렸습니다. 헨리 8세는 냉정하게 앤을 외면하면서 변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은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고 법정에서 자신의 죄목을 차분하게 하나하나 부인했지만 모두 묵살되었습니다. 그녀는 1536년 목이 잘렸습니다.
* 영화에서...엘리자베스 1세의 어린 모습
**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아들 생산에 성공했던 그녀, 그러나 짧은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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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시모어는 앤 볼린과 마찬가지로 왕실 출신이 아니었으며 궁녀였다가 헨리 8세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되었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침착하고 검소한 제인 시모어는 앤 볼린과는 성격이 정 반대되는 여자였습니다.
헨리는 제인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려 했으나 제인은 이를 돌려보냈고, 오직 결혼할 때만 지참금으로 일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할 정도로 소박했다고 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제인은 왕비가 된 후에는 헨리 8세의 맏딸 메리 공주의 신분 복원을 왕에게 간절히 요청했고, 부녀 사이의 화해를 중재하기도 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왕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돌아온 메리 공주를 환영하여 화평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헨리와 결혼을 할 무렵 제인은 이미 27살로서 당시에는 결혼과 출산을 위한 적절한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허약한 체질이었던 제인은 1537년 출산 때 무려 사흘이나 걸려서 간신히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습니다.
헨리 8세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의 탄생에 눈물까지 질질 짤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런던탑에서는 2,000여 발의 축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제인은 출산 후 산욕열로 2주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헨리는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그는 왕자를 낳아준 제인 시모어를 특별하게 여겼고, 사후에 제인 곁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 네 번째 왕비, 클레베의 앤
못생겼다고 소박맞았던 촌닭, 그러나 무난한 삶을 살아간...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클레베 공작 요한 3세의 딸로 태어난 앤은 헨리 8세의 네 번째 왕비가 되었으나 6개월 만에 소박을 맞고 말았습니습니다. 당시 앤과의 결혼을 추진하던 이는 영국성공회를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총신 토머스 크롬웰이었습니다.
크롬웰은 당시 급부상하던 신교 국가인 클레베 공국의 앤과의 결혼을 통해 영국이 독일의 신교 국가와 동맹 관계를 맺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왕비의 외모가 몹시도 궁금했던 헨리는 궁정화가가 그려 보내온 앤의 초상화에 만족했고, 담박에 앤과의 결혼을 추진하도록 지시합니다.
헨리는 잔뜩 기대에 차서 그리니치 궁에서 로체스터까지 새 신부를 맞으러 직접 행차 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앤은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용모였습니다. 못생긴 외모에 독일어만 할 줄 알고, 궁정의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데다 문학 및 예술적 취향도 전혀 없었습니다.
책도 읽지 않고 오로지 바느질만 할 줄 알았던 앤은 왕을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헨리 헨리는 아예 앤과의 합방도 하지 않았고 결혼 이후 앤을 ‘플랑드르의 암말’이라고 공공연히 조롱하였습니다. 6개월 뒤에 이혼 수속을 밟습니다.촌닭같이 순박하기 짝이 없던 앤은 첫째 왕비 캐서린과 달리 이혼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왕비가 아닌 '왕의 누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대신 얻은 것에 만족하며 영국에 머물렀습니다.
그녀는 후에 왕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이따끔씩 조언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헨리 8세가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를 간택했을 때는 모두들 만장일치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앤은 캐서린 파의 용모가 자신보다 못하다 하여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전해집니다.
**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
남자를 너무 밝혀 목이 잘렸던 캐서린...
네번째 앤 왕비의 시중을 들다가 헨리 8세의 간택을 받은 캐서린 하워드는 앤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명문가인 하워드가 출신으로서 앤 볼린과는 외사촌 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앤 볼린의 딸인 엘리자베스(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와 가깝게 지냈으며, 후일 캐서린이 참수되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캐서린 하워드는 15살에 이미 프랜시스 더햄이라는 정부를 둘 만큼 남자를 밝혔습니다.당시 47살이었던 헨리 8세는 19살인 캐서린 하워드의 활기차고 발랄한 스타일에 빠져들었고, 어린 새 신부에게 보석과 토지와 의복 등을 마구 퍼주며 기쁨에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뚱보가 되면서고 둔중해진 중년의 왕에게 캐서린은 곧 싫증을 느꼈습니다. 자유분방한 캐서린은 정부였던 프랜시스를 시종으로 삼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전의 구혼자였던 토머스 컬페퍼에게는 절절히 사랑이 담긴 연애편지를 보냈습니다.
결국 그녀는 곧 추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어린 신부를 가시 없는 장미라는 애칭으로까지 부르며 예뻐했던 헨리 8세는 처음에는 귀를 막고 이 추문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추문들이 점차 사실로 밝혀지자 격노하면서 캐서린의 두 정부를 잡아다가 중형에 처했습니다.
헨리는 분노했지만 한편 스스로의 연민에 치를 떨며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간통죄로 런던탑에 갇힌 캐서린은 왕비가 된 지 두 해 만에 참수되었습니다.
**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
후덕했던 왕비, 노쇠하고 힘이 빠진 헨리를 끝까지...
마지막으로 1543년 헨리는 당시 왕실의 가정교사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했습니다. 캐서린 하워드가 런던탑에서 목이 잘린 지 1년 만의 결혼이었습니다. 캐서린 파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첫 남편이었던 에드워드 버로우 경과는 1529년 사별했고, 두 번째 남편 래티머의 영주 존 네빌 경과 결혼했으나 곧 남편이 병약해진 탓에 캐서린 파는 런던으로 이사 와서 남편을 간호했습니다.
런던에 온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의 자녀들을 만나 교육을 담당했고, 특히 에드워드 왕자의 작은 외숙인 토머스 시모어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청혼은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1542년 캐서린 하워드를 참수하고 새로운 짝을 찾아 방황하던 헨리 8세는 아직 남편이 죽기도 전인 캐서린 파에게 항상 하던 방식인 선물 공세를 퍼붓습니니다.
캐서린 파는 남편 토머스 경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왕에 대한 임무를 선택하였고, 결국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가 되었습니다.결혼할 당시 캐서린 파의 용기는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미 앤 볼린, 캐서린 하워드를 참수시켰고, 첫 왕비와 클레베의 앤과는 이혼을 감행했던 헨리 8세의 왕비가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왕은 이미 노쇠했고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등 세 명의 자녀들까지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캐서린 파는 진보적인 신교 사상을 교육받은 온화한 여성으로서 왕비의 임무를 잘 수행해 나갔습니다. 그는 왕이 화를 내면 차분히 토닥거려주고 두 딸과 왕의 관계를 중재했으며, 왕의 아픈 다리를 무릎에 얹고 주물러 주면서 극진히 간호할 정도로 자상했습니다.
결국 헨리 8세는 1547년 1월 에드워드에게 양위한 뒤 사망했습니다.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사망하자마자 바로 그해에 이전의 구혼자였던 천하의 난봉꾼이었던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3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첫 임신을 했지만, 출산 도중 사망했습니다.
** 헨리 8세가 목을 잘랐던 총신 : 세 사람의 토머스
이 여섯명의 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처형의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세 사람의 토머스가 있습니다. 바로 토머스 울지, 토머스 크롬웰, 그리고 토머스 모어입니다. 이들은 이름이 모두 토머스라는 공통점 외에 모두 헨리 8세의 총신이었고 또한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토머스라는 이름이 흔했다고 합니다.
*** 토머스 울지
울지는 입스위치의 부유한 식육상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헨리가 교황에게 특별히 청탁하여 추기경으로 만든 총신이었습니다. 그의 특성은 허영과 야망이었습니다.
대주교, 대법관, 추기경으로서 헨리 8세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 데 누구보다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울지는 권력 남용과 귀족 억압, 그리고 부정 축재로 지탄의 대상이 된 끝에 실권하고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목이 잘리기 전에 병사했습니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울지는 별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헨리에게 버림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토머스 모어
또 한 사람의 토머스는 소설 <유토피아>로 유명한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였습니다. 그의 식견에 매료된 헨리 8세는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며 친구처럼 신임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모어는 정치가라기보다는 대학자이자 문필가였습니다. 그는 헨리 8세의 뜻을 정치적으로 받들어 그냥 충실히 이행하는 집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학술 고문과 비슷한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데 반대한 모어는 교황청에 보낼 이혼 청구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카톨릭 신앙을 부인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그래서 모어는 1935년에 가톨릭 성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반역죄로 1535년 7월 목이 잘렸습니다.
모어는 단두대서 “나는 국왕의 충실한 종복, 그러나 그보다도 신에게 충실한 종복”이라고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이 위대한 사람의 머리는 런던교에 효수되었습니다.
* 대학자이자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가족
*** 토머스 크롬웰
모어 이후 헨리 8세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 울지의 측근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이었습니다. 그는 대금업을 하다가 울지 추기경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추악하고 잔인하며 돼지상에 실눈과 심술궂은 입을 가진 땅딸보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박식했으며 호탕했고 기지가 풍부했으며 절제를 할 줄 알았으며 종교에는 무관심했습니다.
헨리 8세는 크롬웰을 멸시했고 늘 ‘양털이나 빗질하는 놈’이라고 부르면서 냉대했습니다. 그러나 헨리는 그의 수단과 노예근성, 그리고 실행력을 높이 샀습니다. 몇 해 안되어 이 ‘양털이나 빗질하는 놈’이 국새상서,시종장관,에섹스 백작으로 승승장구합니다.
크롬웰은 왕의 총신이 되자 헨리의 입맛대로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등 교회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수장법(왕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는 법) 제정과 의회 통과에서도 그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크롬웰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서 중요한 해결사 역할을 한 셈입니다. “정치가는 모름지기 아무도 모르게 왕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헨리 8세의 충복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롬웰의 운명은 한때 자신이 모셨던 울지와 같았습니다. 일련의 개혁 조치를 추진하면서 많은 정적을 만든 크롬웰의 운명은, 사실상 자신이 추진해 성사시킨 못생긴 앤을 헨리 8세와 결혼을 추진하면서 순식간에 추락했습니다.
추진할 때부터 이 결혼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적을 많이 만들었던 크롬웰은 정적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그의 책임론을 강하게 제시했고, 결국 왕의 이혼 직후(1540년 7월)에 목이 잘립니다.
* 악명 높았던 런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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