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현실 차이 체험한 인파이터 형식 깨고 날것의 언어 끌어올리다
아버지는 서울 청량리역에서 열차를 수리하던 철도공무원이었다. 어머니 역시 힘든 허드렛일을 했다. 누나가 셋이었다. 가난이 집안을 억눌렀기에 박성준(27)은 일찍 철이 들었다. 안양예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아르바이트로 혼자 감당했다. 중학교 3학년 때 120㎏이던 기골장대형의 그는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았을 정도다.
고교 백일장에서 많은 수상을 한 것도 그만큼 생활이 절박했고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판 일당은 인력중개소에서 10%를 떼였고, 파스를 사붙이고 나면 하루 5만원 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걸로 책도 사고 학비도 내고 지방 백일장에도 갔다. 고교 동창들 사이에서 그는 “너희들이 입시용 시를 쓸 때 나는 사회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무서운 친구였다. 생활 자체가 시적이었다. 문학과 현실의 차이를 몸으로 체험한 인파이터라고 할 박성준은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해서도 장학금을 받아야 했으므로 절박하게 공부를 했다.
2009년 계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해 펴낸 첫 시집 ‘몰아 쓴 일기’(2012)는 웬만한 시집 두 권 분량인 260여 쪽에 이른다. 그는 고통과 치유라는 두 개의 혀를 번갈아 사용하며 자신의 몸에 가득 담긴 이야기들을 디지털 시대의 래퍼처럼 쏟아낸다.
“시를 열심히 쓰던 동기들은 모두 어머니가 아팠다. 암부터 관절염까지, 최근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것도 쉽게 병으로 바뀌었다. 한낱 술자리에서/ 가장 아픈 엄마를 가진 동기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우리는 은연중에 동의했다. 우리는 좋은 시를 쓰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부러워하면서, 읽고, 찢고, 마셨다./ (중략)/ 그리고 등단자가 나타났다. /우리의 모임이 해산되었다.”(‘대학문학상’ 부분)
문학 지망생 사이에서 유명한 이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라는 단어엔 실제로 낳아준 어머니와 신병을 앓던 열두 살 터울의 큰누나 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린다. 곁에서 바라보기에 너무 어렸고 무서웠다. 마치 누나가 자신을 대신해 아픈 것 같았다. ‘나’와 ‘누이’ 사이에 두 개의 혀가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런 누나가 부끄러웠다. 그러다 박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리고 있는 말들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구비문학이나 옛 구어체를 사용하는 변사의 목소리를 닮았다. 형식을 압도하면서 전선줄이 녹아내릴 것 같은 고압의 감성 상태. 잘 다듬어지고 예쁜 시를 쓰도록 교육 받아온 그는 오히려 그런 형식을 깨부수고 날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를 쓰고 싶었다.
“시는 치유의 장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아프게 하는 장르죠. 아픈 것을 들춰내고 꺼내 와야 하니까 더 아픈 게지요. 만약 제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시도 안 썼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본의 일부(부품)가 되는 삶을 살았겠죠. 이런 논리는 위험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시를 쓰는 자아란 이미 아픈 것이고 나빠질 때까지 피가 나는 상태인 것이죠.”
그는 요즘 다인칭의 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 주체들, 나와 너와 당신과 그들이 시에 함께 들어와 있는 그런 시편들이다.
“옛말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어야만 소원을 들어준다는데/ 우리는 소원을 말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 (중략)// 소원을 말해봐, 소원을 말한다면;/ 내 소원은/ 내 소원은/ 죽지 않고 오직 소원을 말해보는 것/ 그러나 나의 태생은, 그 어느 누구의 소원도 아니었다는”(‘소원을 말해봐’ 부분)
박성준은 “두 번째 시집은 자폐성 자체를 하나의 스타일로 만든 작품으로 묶어보고 싶다”며 이렇게 말한다. “미래요? 미래는 불안하죠. 자꾸 어른이 되는데, 책임감도 가져야 되고 우선은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게 목표죠. 돈도 생계 이상으로 더 버는 게 싫고요. 저는 지금 아주 소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