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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48
5월2일 [부활 제5주일(생명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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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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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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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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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든든한 지주이자 뿌리이신 주님>
새벽시장에서 일하시는 한 형제님을 만나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때 경기가 좋던 시절도 회상하셨습니다. 장사가 너무나 잘 돼 돈을 일일이 셀 시간이 없었답니다. 할 수 없이 그날 번 돈을 큰 보따리에 집어넣고 발로 꾹꾹 밟았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아이들 못 보게 하고는 흐뭇한 얼굴로 돈을 세던 그런 시절도 있었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경기가 너무 좋지 않아 현상유지만 해도 다행이랍니다. 그래도 한밤중에 물건을 구매하러 올라오는 지방 상인들을 맞이하려 저녁 무렵 가게로 나가셔서 새벽까지 가게를 보신답니다.
계속 건네시는 말씀이 저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잠시 가게 문을 닫아건답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향하는 곳은 침대도 아니요, 사우나도 아니요, 성당이랍니다.
새벽미사가 시작되기 전 그 어둠을 뚫고 몇몇 신자상인들은 성당으로 모인답니다.
그 이른 새벽녘에 미사 전까지 성체조배를 하고, 또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하신답니다. 그런 고된 일상 가운데서도 그분들이 늘 챙기는 곳은 어려운 복지시설입니다. 뭣 하나 더 해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십니다.
고달픈 일상생활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과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그분들 삶에서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시댁 식구들이 사이비성이 농후한 종교를 믿는 집안에 시집가서 오랜 세월 무지막지한 고초를 겪으셨던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컸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은 그녀 삶에서 목숨과도 같은 부분이었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천주교와 무슨 악연이 있었던지 그녀의 입에서 천주교 '천'자만 나와도 '재수 없다'며 벼락같이 화를 내고 노골적으로 천주교를 반대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시어머니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자신들의 집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대로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시집 식구들의 물샐 틈 없는 감시체제 하에서도 그녀는 은행이나 시장을 오갈 때 생기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살짝 살짝 가까운 성당을 찾아 성체조배를 하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갔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그러다가 발각돼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 오랜 세월,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녀가 받아왔던 고통이나 수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참을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오신 그 자매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이란 때로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잘 참아온 그녀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시댁 모든 식구들의 천주교 입교라는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주시더군요.
그녀의 독특한 신앙여정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아주 부족한 저이지만 늘 애타게 갈망하는 소원 한가지가 있습니다. 세파에 흔들리는 아이들의 든든한 뿌리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든든한 뿌리인 저를 통해 비쩍 마른 아이들이 왕성하게 영양분을 흡수해서 보란 듯이 한번 일어서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바람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의 든든한 지주이자 굳건한 뿌리가 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분은 영양결핍증세가 심각한 우리에게 매일 영양분을 공급해주시는 생명의 뿌리입니다. 죄와 악행으로 시든 우리 영혼의 가지에도 다시금 생명의 수액을 보내주시는 구원의 근원입니다. 가지가 뿌리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주님 없는 우리 삶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 안에 머물러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진 신앙의 박해 가운데서도, 끝도 없는 방황과 좌절 사이를 걸어가면서도,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끝까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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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SUq-HMvV1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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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기도 지향의 위험성 : 기도의 맛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성 목요일 만찬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이뤄내려는 시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제가 주님께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 제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무언가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유일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는 것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만약 기도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마음이 자라남을 느낀다면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던 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오래 다닐수록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방에서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기도의 방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도의 맛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맛은 기도 안에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바랄때 잃게 됩니다.
마치 과자를 먹을 때 단 맛을 원했는데, 짭짤한 맛이었을 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짭짤한 것도 맛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원했던 맛과 다를 때 그 과자가 싫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가 짧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듯,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문제는 ‘지향’입니다.
기도지향은 자칫 기도의 목적을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나 기도 때 지향하는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 기도가 들어지면 이제 행복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구는 블랙홀과 같아서 주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에게 가장 많은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저를 떠나갑니다. 많이 들어주면 그만큼 많이 요구하게 되고, 그 많은 요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쓸모없는 도구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떠한 지향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이들과 주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청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청하는 것을 들어주면 이제 상대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아닌 호구로 여기게 됩니다.
처음엔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어도 그 욕구는 블랙홀이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이전의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구로 전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오히려 상대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여문의’라는 공정하고 청렴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 재상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 재상은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에 자비를 베푸는 바람에 그가 더 나쁜 상태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도 한없이 요구하는 이에게 한없이 베푸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참맛을 회복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시작하기 전 엄청난 기도지향을 읊는 사람을 보면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 수많은 미사 지향을 보며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미사가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히면 나머지는 굳이 청하지 않아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사 지향이나 기도지향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잃고 맙니다. 그러면 청원도 이뤄지지 않고 기도의 맛도 잃어 결국엔 기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리옷 유다의 경우는 잘못된 지향으로 예수님께 붙어있었습니다. 의도가 깨끗하지 못하니 그 가지를 통해서는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지향이 여전히 돈과 명예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다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청하십시오. 그리고 잊어버리십시오. 기도 때는 제발 지향을 잊어버리십시오. 오히려 기도 중에는 자신이 청하는 모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십시오. 더는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게 되기를 청하십시오.
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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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역사"로 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으로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하려고 한 것은(1코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서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사는 모습(1요한 3,18)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성령 안에서 결합한 이들은 가지라고 하신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 데 필요하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리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어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3절)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각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 사람의 숨겨진 뜻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어, 성령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어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덕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 확고히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줄기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지가 잘려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터 자라지만, 잘린 가지는 뿌리와 떨어져 죽고 만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가지가 줄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그분의 은총을 받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하기에 선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도 맺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모자람이 없는 자산이며 모든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로부터 생명을 끌어 올리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았던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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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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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1-4)
1)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이 말씀에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라는 말은, ‘나에게 붙어 있긴 하지만’,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긴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5-26) 여기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고, 또 ‘이웃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일은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죄를 지은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 실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도 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한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들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한 일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 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예언은 예언이 아니었고, 마귀를 쫓아낸 것도 아니었고, 진짜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죄’, 즉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들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2)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 말씀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포도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가지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으로 해석됩니다. (나무에 붙어 있긴 하지만, 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지는, 앞의 2절에서 말한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동적으로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머무르다.’ 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신앙인이 구원의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즉 예수님에게 붙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몸만 함께 있었고, 마음은 떠나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예수님 안에 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 사람은 겉과 속이 모두 충실한 ‘알곡’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쭉정이’입니다. 신앙생활을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또 자기 스스로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위선과 교만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알곡인가, 쭉정이인가?’를 잘 반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할 만큼 했다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쭉정이로 살았다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쭉정이 같은 생활을 했더라도 회개하고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3)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는 말씀은 ‘약속’이고, “내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당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너희 안에 머무르고 있으니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9)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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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미국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스마트폰에 인증번호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보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한국의 사이트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미국 카드회사의 보안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려면 인증번호나 보안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몇 번 시도를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무통장 입금을 하니 결재가 가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되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무료로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광고 없이 보거나,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보기 위해서는 매월 회비를 내는 곳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위해서는 나만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나만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합니다. 비밀번호가 발전해서 지문인식도 있고, 홍채인식도 있고, 목소리 인식도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잘 간직해야 하고, 가끔씩 변경해 주어야 합니다. 외부로 노출되는 경우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고, 경제적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가끔씩 비밀번호를 잃어버려서 문을 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모아서 보관할 필요도 있습니다.
작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주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집에 머물면서 작은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상추, 깻잎, 고추, 파, 방울토마토, 호박, 오이를 심었습니다. 올해도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었습니다. 모종을 심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아침 밭에 물을 주었습니다. 30분 정도 물을 주면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어 냈습니다. 고추나 오이는 지지대를 세워야 했습니다. 줄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린 모종이 조금씩 자라면서 줄기가 커지고, 잎이 돋아납니다. 예쁜 꽃들이 하나둘 피고,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열매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손톱만한 것들이 점점 자라서 알찬 열매를 맺습니다. 물과 햇빛 그리고 정성이 함께하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상추는 신기하였습니다. 잎을 따서 먹으면 곧 다시 잎이 나왔습니다. 올 여름에도 물을 주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회개’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는 회개함으로써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텃밭은 며칠만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틈틈이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를 미워한 사람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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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지수 아브라함 신부님]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 성모성월이여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5월 성모성월입니다.이 부활 시기에 사랑하올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상경지례하고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모든 신자가 기쁨의 부활 시기를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신도들과 모임을 함께 하려 했으나 그들은 사울이 개종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는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또,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한 일을 낱낱이 설명해줍니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바오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오로지 주님 말씀을 전하는데 나머지 인생을 투신하며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탄생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복음 15장1절-2절).”
여기서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가지는 제자들, 믿는 이들, 우리를 나타냅니다. 가지인 제자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요한 복음 14장 38절)”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야로 가실 터이니."(마르코 복음 16장 7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예수님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습니다."(요한 복음 15장 9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 역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 계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부활 시기를 살아가는 신자 여러분!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하며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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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원기 베드로 신부님]
<‘잘려 나가면 어떻게 하지?'>
‘참 포도나무’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장 먼저 저를 사로잡는 마음은 바로, ‘잘려 나가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신다.’라고 하시니, 이 불안한 마음은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걱정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싫어하게 만들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이 있으면 조금 더 노력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노력한 대로 일이 잘 풀리면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늘 노력한 대로 잘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하지요.
‘하느님께서 실망하실 텐데….’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텐데….’ ‘잘려나갈 텐데….’
예를 들어, 어느 훌륭한 분이 계시는데 이분께서 나를 볼 때마다 나에게 실망하시고, 심판하시고,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신다면, 우리는 이분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기는 힘들 것이고, 웬만하면 이분을 피해 도망 다니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좋아하기도, 가까이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더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에게서 떠난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 배은망덕한 일이 되거나 벌 받는다고 하니, 가까이 갈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숨막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놓이게 되면, 우리는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며 죄책감과 좌절감 때문에 우울해지거나, 이렇게 애쓰며 노력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안일하고 이기적인 주위 사람들을 비난하고 미워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그럼 된다.’라고만 하시죠.
사실 잘 가꾸어진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알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이미 ‘깨끗해진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약하지만 이런 우리를 아끼시고 살피시는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이 좋아지고 함께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너그러움을 만나면 감사하고 기쁘겠지요.
기뻐하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주님께 닮아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로움을 믿는것’ 뿐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해서임을 눈치채고, 그런 우리에게 여전히 너그러우신 주님을 다시 만나면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비를 더 깊이 만날 수 있기를 청하시고 청한 바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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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현수 바오로 신부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복음 15장 1절)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연병장에서 출발한 일 톤 트럭 뒤칸에 일용직 품팔이처럼 실려 도착한 곳은 동네 어귀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포도밭입니다.
길게 늘어선 지지대 사이로 허리춤 조금 위에 뻗은 포도나무 가지. 그 아래로 몸을 굽혀 들어갑니다. 이 빠진 낫과 녹슨 호미를 마른 손에 나눠 쥐고는 허리를 펼 수 없어 네 발로 땅을 기듯 김을 매고 잔돌을 치웁니다.
익숙지 않은 일에 부지런히 열심히 손을 놀리기는커녕 손목의 전자시계 분침이 채 한 바퀴도 돌기도 전에 지지대 밖으로 벗어납니다. 그제야 허리를 치켜세우며 지친 척 보이기 위한 거친 숨을몰아쉽니다.
포도밭 아래 선, 유독 느린 시계를 야속하게 바라봅니다. 아니 군 생활 내내, 시계는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밭 주인아저씨는 들락날락하기만 하는 미덥지 않은 군인 청년의 설익은 밭일에는 이미 익숙한 듯 무뚝뚝한 입술 사이로 뜻 모를 옅은 미소만 머금고, 가만히 지켜보며 한 켠에 서 있을 뿐입니다. 어찌 어찌 시간이 흘러 점심을 다 먹도록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떨떠름한 훈계나 타박조차 없습니다.
오늘처럼 복음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읽을 때면 가끔 기억이 납니다. 밭일엔 별 도움 안 되는 젊은 병사가 요령만 부리다 되려 밭을 망칠지 모를 일입니다. 한데 그런 이를 데려다가 일을 맡기는 헤아리기 힘든 농부 아저씨의 속내는 뒤로하고 농사일의 고됨을 과장 스레 포장해서 안주로 삼아 떠들수 있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복음 15장 5절)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 머물러 붙어있는 일상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든 일은 아닐진대, 변명과 핑계로 주님과 그분의 일을 힘겨워하는 모습. 멀리하거나 모른 척하는 일이 내 삶에 자리하고 있음을 곱씹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가장 고된 일로서 고랑을 파고 지지대를 세우고 비료를 주고 이곳저곳을 살피는 참 노동은 밭 임자의 몫으로 남아있을 텐데. 그 주인은 복음말씀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이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돌보아 주시는 농부이신 하느님은 오늘도 묵묵히 일하고 계십니다. 한데 나는 그것을 당연하리라 여김으로써 감사의 기억을 내려놓고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작은 고됨에 힘겨워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고됨에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방관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믿고 신뢰하여 내가 마땅히 견디어 내기를 응원하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분노와 화를 감출 길 없는 일들이 더 자주 눈에 보이는 요즘입니다. 그렇지만 더더욱 기쁨과 감사의 일들을 찾는 것에 주목해야 할 요즘이기도 합니다.
후자가 나와 나의 일상을 변화시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오늘을 보내시길 기도해 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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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15,4)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5월은 '가정의 달'이고, 5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가 우리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정한 '생명주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손수 만드신 당신의 모든 창조물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참 좋다."고 하셨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당신의 피조물들을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모습인 죽음의 문화가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살, 살인, 낙태, 이혼, 칠죄종, 생태계 파괴 등등 '코로나19'는 이러한 죽음의 문화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시작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인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가정생활의 주역인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가정 안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습입니다.
가정이 살아나야 교회도 세상도 살아납니다. 부모가 살아나야 자녀들도 살아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가족이 특히 부모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 살아나고, 생명의 문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무는 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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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유>
요한 15,1-8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자유>
당신께 매여야
나의 자유
계심에 매여야
있음의 자유
사랑에 매여야
사랑의 자유
정의에 매여야
정의의 자유
진리에 매여야
진리의 자유
살림에 매여야
살림의 자유
당신께 매여야
나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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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날치라는 밴드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판소리인데 판소리 같지 않으며, 너무 신나서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그래서 어떤 밴드인지 인터넷을 살펴보니, 보컬 4명이 모두 국악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실제 판소리를 편곡해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판소리를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음악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지만 사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날치의 노래는 젊은 아이들도 좋아하고, 심지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유의 음악을 이렇게 바꿔도 되는 것일까?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이날치 구성원 중 한 명이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때 했던 판소리와 정조 때의 판소리가 같을까요? 아니란 말이죠. 지금 제가 즐기는 게 21세기의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갓 쓰고 도포 입고서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고, 이날치가 이렇게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인 거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전통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없겠지요. 새로운 세상에 새롭게 맞춘 바로 ‘나’의 모습이 정답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전통이라는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꽉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과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다르다면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큰 손해를 입는 것은 가지인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꽉 붙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변화에 맞춰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야곱 시대에는 야곱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나’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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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감사한 선물>
이제 고령이신 언론인이며 문학 평론가이신 이어령 선생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기자가 했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집도, 자녀도, 책도,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선물이었다는 거죠.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요.”
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것을 지키겠다는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게 됩니까? 그러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다 감사할 일이며, 기쁘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게 됩니다.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삶을 마쳤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내 몸뚱이조차 못 가져갑니다. 결국 ‘내 몸’이라 불리는 이 몸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다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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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 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어두울 땐 안 보이는 것들이 불을 켜면 나타납니다.
눈 감았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눈을 뜨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없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마음을 두면 나타납니다. 사실 없는 것도 마음 두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마음을 없애니 사라집니다.
마음을 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마음 두는 것에는 시간도 거리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지고 아무리 오래 되어도 마음을 두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사실 마음에 두면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아내, 남편, 아니면 자식, 부모? 형제, 이웃, 재물, 명예...“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 둘 자리를 잘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머물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자주 미사를 참례했고 얼마나 더 많은 묵주기도를 드렸는가로 분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을 내 영혼 안에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함께야) 마음을 두어 그가 바라는 것, 기뻐하는 것을 행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2독서의 표현을 빌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기 때문에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15,7).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 머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내 된 사람은 남편에게 마음을 두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에게 마음을 두어야 ‘이심전심’, 마음이 통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화목합니다. 그러나 동상이몽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에게 지킬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부부로써 신의를 지키는 것, 스승에 대한 존경, 그리고 제자에 대한 사랑,
이웃에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일상 안에서의 계명입니다. 이것을 지킬 때 주님으로부터 더 큰 복을 얻게 되고, 청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말씀은 달리 말하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청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은 복된 어머니’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복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자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령 복되십니다.”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 하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우리도 먼저 믿음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믿음으로 청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분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행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까 남자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친구 같은 아내’, ‘현모양처’형을 선호하고, 여자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가정적인 남편’, ‘카운셀러 남편’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남편 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당신을 믿어요!’이고, 아내 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당신 너무 힘들지?’랍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를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남성은 71.5%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50.4%만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부부 불화가 생기는 원인으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의 일로 가정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이 45%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탓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부부도 서로의 관심이 다릅니다. 이 다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생애를 흔들림 없는 믿 음으로 예수님 곁에 서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무에서 가지가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 가지가 나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제자들 속에 주님께서 함께한 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는 이득도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지 하나를 잘라버린다면 여전히 그 포도나무에서 다른 가지가 돋아날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버리지 못하지만, 제자는 스승을 등지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려진 가지는 뿌리에서 분리되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없이 가지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1-34).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고달픔만 더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내 뜻을 먼저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청하여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있지만, 바로 그 앞부분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는 말씀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이 먼저입니다.
오늘은 주님 안에 머물러 꼭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주님 안에 머물러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한 일은 헛수고임을 일찍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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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제자되어 참으로 살기>
-공동체 삶의 축복-
한 번 뿐이 없는 유일회적 삶에 누구나의 소망은 참으로, 진짜 살기일 것입니다. 임종을 맞이하여 후회없는 만족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고백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서 묻는 단 하나의 질문은 ‘행복하게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 신록의 계절 5월 성모성월에 계속되는 부활축제 시기요, 하느님 주신 생명의 선물에 감사하며 참으로 행복하게,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하는 참 좋은 부활 제5주일, 생명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도 참 정답게 들립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참으로 농부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이들이 지상에서 농사에서 전념하는 농부들일 것입니다. 땅처럼 푸근하고 넉넉하고 한없는 인내심을 지니고 기다리며 때에 맞게 농사일에 전념하는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농부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믿는 이들은 '삶의 농부'라 해도 좋겠습니다. 엊그제 고추, 상추, 파, 오이, 가지, 토마토, 야콘 모종후 적기에 내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신 단비를 통해 새삼 우리 하느님은 최고의 농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채소 농장을 하는 농부 스테파노 수사님, 이런 농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깨달으며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사는 분들이 참으로 사는 이들입니다. 어제 한 달에 한번 방문하여 성사를 보는 형제님과의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기에 덥석 안으며,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답변하며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모르는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살아있는 형제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또 이 거룩한 성사를 통해서 만나는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어제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20년 동안 항구히 정주중인 반가운 손님 마티아 수사님이 방문하여 저녁 식사후 떠나니 이 또한 형제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겠습니다. 얼른 정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과 더불어, ‘뉴튼 수도원 마티아 사도 방문 축일 기념’이란 말마디를 전송하니 마음 흐뭇했습니다. 또 어제 명동성당에서는 참으로 주님의 종으로 사셨던 정 추기경님의 장례미사가 있었고, 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 소개된 ‘추기경의 묘비명’에 대한 일간신문 기사도 이채로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는 사목 표어이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평소 좋아한 성구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가 추모객을 맞이한다. 지난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묘비명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다. 실제 고인은 장기와 가진 것 모두를 내주고 떠났다.”(5.1경향22면)
참으로, 진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참 삶의 지표를 보여준 두 분의 추기경입니다. 과연 어떻게 각자 나름대로 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참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바 공동체 예수님이요, 우리는 모두 그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공동체 삶의 축복입니다. 세 측면에 걸친 공동체 삶의 축복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입니다.
너무 잘 잊고 지내는 하나라는 자각입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구원받지 못합니다.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 보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자도생의 고립단절은 스스로 자초한 지옥입니다. 함께 더불어의 삶이 바로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결국 하나가 지칭하는 바 주님입니다.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하나인 주님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주님 참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하나로 연결되어 붙어 있을 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요, 영이자 생명이신 말씀은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점차 주님을 닮아 참 나를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하나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성체를 받아 모시며 주님의 한 지체임을, 한 형제임을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다양합니다.
공동체의 다양함이 축복이자 부요입니다. 획일화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사랑의 일치입니다.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 서로 다름을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모두의 모습이 다 다릅니다. 그대로 5월 신록의 나무들 같고 꽃같습니다. 신록의 색깔도 다 다르고 꽃들도 다 다릅니다. 꽃의 크기, 모습, 색깔, 향기가 다 다르듯 사람도 똑같습니다. 꽃같은 인생, 꽃처럼 고유의 크기와 모습, 색깔과 향기로 참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런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공존공생, 상호보완의 공동체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이런 다양한 형제들이 하나 되어 갈수록 점차 공동체를 통해 또렷이 드러나는 참 포도나무 예수님 모습입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일이 없도록 항상 공동체의 큰 그림을 통해 예수님 얼굴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공동체가 그 다양성의 모범입니다. 바르나바, 사울을 비롯한 제자들이 다 다르지만 주님 안에서 참 아름다운 형제애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형제들이 곤경중인 사울을 보호하는 배려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참 포도나무 예수님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참 풍요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셋째, 우리는 하나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머무르다는 말이 오늘 복음에 무려 8회 나옵니다. 늘 공동체 안에, 주님 안에 머물러 시냇가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관계의 뿌리, 믿음의 뿌리, 사랑의 뿌리 를 깊이 깊이 내리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 예수님 안에 정주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중심에 머물러 깊이 뿌리내리는 정주의 삶이 없어 그리도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 깊이 믿음의 뿌리 내리고 살 때 안정과 평화에 감사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금과옥조의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대로 참 삶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리라.”
이래야 비로소 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은 우리 안에 머무르는 상호내주의 일치는 바로 사랑의 일치를 뜻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을 떠나 뿌리없이 잘린 가지처럼 가짜의 헛된, 유령같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지요! 주님이 아닌 엉뚱한 세상에 머물러 살기에 끊임없는 불안에 두려움입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를 이루며 참으로 살아갈 때 그대로 소원 성취의 삶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몰라서 불평 원망이지 주님을 알면 찬미와 감사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지 않아 스스로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구원이요 주님을 떠날 때 심판이니 구원과 심판은 선택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 관상의 일치는 자연스럽게 이웃사랑의 열매를 통해 표현되고 검증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 행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촉구합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간곡한 호소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기적 탁한 맹목적 욕망의 늪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애착의 끈적끈적한 불순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이 실행하는 아가페 깨끗한 형제적 사랑입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존중과 배려, 공감과 연민의 무사無私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하지 않는 사랑, 생명을 주는 아가페 깨끗한 사랑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 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의 사랑은 그대로 깨끗하고 무사한 형제사랑으로 표현되고 이런 형제사랑의 실천은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을 더욱 깊이함을 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참 삶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결국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꽃 사랑은 열매 사랑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참 사랑, 참 삶임을 입증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랑의 열매, 구원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시고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진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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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머무름"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머무름은 예수님이 여러 차례 반복하실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머무름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머무르고 또 예수님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니까요.
머무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의 활동이라 자유롭기에 반드시 어떤 도식 하나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대개 기도는 주님 앞에서의 일방적 독백이 상호적 대화로 넘어가다가, 신뢰와 사랑이 깊어지면서 침묵으로 흐르고, 결국 서로에게 머무름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기도는 어떤 행위에서 그저 존재하는 자체가 되어갑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분 안에 머무르고 또 그분에 대해 아는 바에 머무르며 그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 관상기도일 것입니다. 머무름은 고요하고 정적으로 보이나 그 침묵 아래는 거대한 역동성이 해류처럼 흐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말씀이 우리를 정화합니다. 말씀에 머무르는 이는 말씀이신 예수님께 머무르는 것이고, 머무름으로 우리 존재에 새겨지고 물든 그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주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의 기도는 그분의 뜻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그가 깨끗하게 되었고, 그의 바람이 주님의 바람과 일치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바라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하니 그대로 이루어짐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주님께 머무르는 이의 기도가 자기 정욕이나 탐욕, 저주나 오만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머무름은 반드시 선하고 진실된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5,5 참조)
제2독서에서도 머무름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요한 서간의 저자는 믿음과 사랑을 머무름의 방식으로 꼽습니다. 즉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1요한 3,23)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이미 주님 안에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이도 마찬가지지요. 그는 "행동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주님과 서로에게 머무름으로써 사랑이 되어 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머무름으로 회득한 사랑이 열매를 맺는 일화가 등장합니다.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 이야기해 주었다."(사도 9,26-27)
사도행전 저자는 바르나바를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고 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주님께 머무르는 이의 특징이며 그에게 머무르시는 성령이 그 증거입니다.
사울은 기를 쓰고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을 단죄하고 박해하였기에 그가 어떤 신적 체험을 했건 여전히 두려운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구원 계획을 위한 도구로 세우시기 위해 사람들에게 신망이 큰 바르나바를 쓰시지요.
사울에 대해 바르나바가 보여 준 관대한 수용력과 신뢰는 그가 사울 안에 머무르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시선에서 나옵니다. 이미 그 자신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은총이지요.
"이제 교회는 ...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사도 9,31)
주님께 머무르는 이는 다른 이들을 머무름으로 초대하여 교회를 더욱 영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평화와 굳셈, 경외와 성령의 현존은 주님께 머무르는 이들이 맺는 역동적인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말씀을 품고 그분 사랑의 품에 깊이깊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애틋하고 애잔한 자애의 눈길에 자신을 온전히 놓아두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 주시는 그분 손길에 우리 영혼과 육신을 기꺼이 내어맡깁시다.
주님께 머무르고,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시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는 이 힘겹고 버거운 세상살이 안에서도 사랑이 되어 가는 중이니까요. 주님과의 상호적 머무름으로 참행복지수를 높여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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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 4)
머무는 곳에
마음이 있다.
머물러야
서로를
알 수 있다.
머무름은
나눔이다.
나누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우리들
관계이다.
머무름은
만남이다.
함께하는
참된
기쁨이다.
머무름은
열림이다.
열매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머무름을
통하여
삶을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으로
사랑은
시작된다.
머무름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
주님은
머무름이시다.
머무름이
우리를
품어준다.
머무름이
행복이다.
우리 삶이
가야할 방향은
다름아닌
머무름이다.
머무름은
마르지 않는
생수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머무름도
있다.
머무름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이
우리를
채워주시고
도와주신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머무름의
은총이다.
은총가득한
머무름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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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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