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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기체적 사유와 소통의 문법-이승하 시집 서평/박남희
<현대시 서평>
유기체적 사유와 소통의 문법
-이승하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박남희(시인)
1.절규와 소통의 시
절규도 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때때로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몸의 언어로 체현해내는 시인들을 볼 때마다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절규란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때 몸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이다. 만약 절규도 시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 몸과 마음의 심연에 닿아있는 본원적인 질문들이 소통의 언어를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이승하 시인의 시를 읽을 때 그 고통의 언어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절규를 감지하게 된다. 이승하 시인의 등단작 「화가 뭉크와 함께」가 말더듬이 화가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를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절규는 보통 동물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승하 시인은 식물이나 먼 우주에 있는 별의 절규도 듣는다. 아니 그것을 몸으로 느낀다. 부조리한 삶의 조건이나 소통의 부재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절규를 낳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이승하의 시는 고통과 절규의 산물이다. 그를 고통에 이르게 한 것은 폭력과 광기의 가족사 내지는 인간사이지만, 푸코가 그의 저서『광기의 역사』를 통해 개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폭력과 광기의 역사는 한 시대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승하의 초기 시는 부조리한 시대적 병마와 싸운 기록이며, 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어둠속에서 스스로 불이 되어 타오르려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개인사에서 출발한 그의 고통의 언어는 차츰 시대적 어둠과 범세계적인 폭력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과 폭력은 그로 하여금 인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하게하고 이러한 것들이 언어의 그릇에 담겨져서 시라는 고통의 성찬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에서, 이승하 시인에게 있어서의 고통은 오히려 시의 원동력인 셈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물질이 주는 자극에 대한 정신의 반작용이다.(이승하의 산문 「무인도에서의 SOS」) 물질과 정신은 그 성질이 상반된 것이지만 결코 동떨어진 곳에 존재할 수 없다.
이승하 시인은 그의 첫 번째 시집 『사랑의 탐구』(1987)에 실려있는 시「詩論」에서 “말의 관성과 가속도와 반작용”이라는 어구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시의 제목처럼 그의 시론을 요약한 말이다. 그에 의하면 관성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가속도는 시의 사실성과 실험정신을, 그리고 반작용은 자신의 시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시론은 그의 시집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이승하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관성과 가속도와 반작용에 대한 명상」) 그는 이 글에서 그의 시집을 각각 ①관성-『사랑의 탐구』(1987),『박수를 찾아서』(1994) ②가속도-『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생명에서 물건으로』(1995)③반작용-『우리들의 유토피아』(1989),『욥의 슬픔을 아시나요』(1991)로 분류한 바 있는데, 그의 최근의 두 시집『뼈아픈 별을 찾아서』(2001)와『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2005)는 빠져있다. 이 두 시집을 굳이 세 가지의 범주에 넣는다면 ②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범주에 넣지 않고 순수한 관점에서 보면, 이들 시집은 그 전의 시집들에 비해 타자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유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인의 눈이 두드러져 보인다. 타자성에 대한 관심도 따지고 보면 인간과 자연, 우주가 하나이고 자아와 타자가 하나라는 유기체적인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사유는 이승하 시의 뿌리를 이루는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는 부조리한 세계와의 싸움과 풍자로 비쳐지던 그의 시세계가 차츰 연민과 화해와 소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 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2.비판과 풍자에서 화해와 소통으로
이승하의 시는 폭력과 광기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내재해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첫 시집 제목이『사랑의 탐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적 화자의 극도의 불안감을 말더듬이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의 등단작 「화가 뭉크와 함께」에서 시인이 ‘同化’와 ‘童話’라는 동음이의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시인 자신이 폭력으로 대변되는 어른들의 세계에 同化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유년의 童話적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의 중의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양상은 첫 시집에 실린 또 다른 시 「동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화자는 시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훗날 부모가 되면/우리를 낳아주신 두 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누이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러한 화자의 진술은 폭력적인 부모와 同化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상태를 나타내 주는 말이고, 후반부의 “동화 속에서만 나는 자유롭고 조금도 안 무섭고”라는 진술은 현실을 부정하고 동화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그의 초기 시는 폭력적인 부모와 부조리한 시대에 동화될 수 없는 마음의 단절감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시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고, 이러한 고통은 그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하기도 하고(「詩」,「酒法」)때로는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며 위안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목숨」,「또 하루」) 특히 인간과 우주를 일체로 느낄 수 있는 우주의 신비야 말로 부조리한 세계와의 단절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밤이 오기를 기다렸네/목마른 별무리 고개를 수그리고/점점이 다가올 무렵이면/울음 우는 사람 곁에 다만 서 있고 싶었네/그대와 내가 실상은 한 핏줄이듯/그대와 뭇 별들이 또한 한핏줄임을/얘기해주고 싶었네//한 아기 태어나 울음 터뜨릴 때/은하의 바깥에서 별 하나 사라진다/끝에서 시작하여/처음에 이르는 것들이여/하나의 별자리는/한 개의 눈물방울/저마다의 가슴에서 시작되어/영원도 되고 순간도 된다/
―「또 하루」부분
시인은 밤하늘을 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우주의 섭리 속에서 유기체적인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고통과 슬픔 속에 있던 시인으로 하여금 커다란 위안을 준다. 그는 결국 인간과 우주는 한핏줄임을 느끼면서 생성과 소멸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삶의 근원적 실체에 대한 탐구를 그의 시의 요체로 삼는다. 유기체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그의 첫 시집부터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승하 시의 요체라고 말 할 수 있다. 필자가 이글의 텍스트로 삼고 있는 그의 여덟 번째 시집『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의 맨 앞에 실려있는 시를 읽어보자.
오죽했으면 죽음을 원했으랴/네 피고름 흘러내린 자리에서/꽃들 연이어 피어난다/네 가족 피눈물 흘러내린 자리에서/꽃들 진한 향기를 퍼뜨린다//조금만 더 아프면 오늘이 간단 말인가/조금만 더 참으면 내일이 온단 말인가/그 자리에서 네가 아픔 참고 있었기에/산 것들 저렇듯 낱낱이/진저리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전문
시인은 피고름 흘리며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는 인간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식물을 한 몸으로 일체화시켜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죽음과 고통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했다는 진술은 역설이면서 역설이 아니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데 식물은 봄이 되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은 서로 상반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역설이지만, 자연의 커다란 섭리의 테두리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역설이 아니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그 뒤에 실려있는 시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머리맡에 있는 몇 송이 꽃/힘겨운 밤을 함께 넘기느라/고개 푹 수그리고 있다”(「찬양 아침」)는 구절은 인간의 아픔을 동감하는 식물의 모습을, “방아쇠를 당긴 순간/흙먼지 일어난 땅 바로 옆에서/막 피어난 꽃이 있었을까/이라크의 나무여 오래 아팠기에/때맞추어 꽃 피워낼 수 있구나”(「목숨들」)라는 구절은 인간의 전쟁과 자연의 생명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각각 유기체적 사유가 감지된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시인이 젊은 시절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바탕이 된다. 범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폭력과 증오는 한 순간의 먼지와 같은 것이고, 생명의 소멸과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택시를 잡으러 가는데 업힌 사내/신음소리 사이로 아니고, 이렇게 죽을랑갑다……/무게를 못 이겨 두 번 함께 거꾸러진다 그러나/지금 당장 택시를 잡아야 한다/응급실로 이 환자를 모셔가야 한다/오늘따라 잡히지 않는 택시/내 등판에 축 늘어진 노인네를 보고/빈 택시 두 대 쌩쌩 달아난다/사내는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기침소리 이상해지더니……/다시 속엣 것을 올려놓는다 금방 축축해지는/어깨와 등, 나는 잠시 사내를 길바닥에 내려놓고/웃옷을 벗어 토사물을 털고 닦는다/길 한 복판으로 달려가 두 손을 흔든다/“택시―! 울 아부지 다 죽어가요―!”/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그날, 들쳐업다, 그 사내」부분
어린 시절 시인에게 폭력의 대명사로 느껴졌던 아버지는 이 시에서는 더 이상 폭력의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시에서의 아버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들의 등에 업혀서 응급실로 실려 가야만 하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 시의 상황이 사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시인은 이제 아버지를 더 이상 폭력의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오히려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로 그 상황이 역전되어 있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은 바로 앞 시집인 『뼈아픈 별을 찾아서』에 이미 확연히 드러나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아버지를 뇌사상태에 빠트리기도 하고(「아버지 뇌사상태에 빠져계시다」), 중환자인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기도 하고(「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급기야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들기도 한다.(「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다」) 그런데 시인에 의하면 이러한 시적 상황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이다. (산문,「아버님께 올리는 편지」)
그렇다면 시인은 왜 정정하게 살아계신 아버지를 시 속에서 병들게 하고 죽게 했을까? 시인의 창작의도를 곰곰이 추리해보면 한편으로는 과거의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늙으신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동안 시인의 내면에 쌓여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화해와 용서로 전환시켜보려는 시인의 제의적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필자가 여기서 ‘제의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굿에서의 살풀이와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이러한 살풀이 의식의 이면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오이디프스 신화의 ‘부친 살해 모티브’는 이승하 시인의 시에서 일종의 살풀이 행위인 시 쓰기의 형식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3. 바벨탑과 사이버 우주
이승하의 시에는 생태시나 문명비판 시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들도 그의 유기체적 상상력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시간을 견디지 못해 범람하는 언어가 있다/실시간 實時間의 언어, 인터넷의 언어/화상회의의 언어, 가상세계의 언어/.../한세기 내내 분해한 촌각의 시간들이/신과 대결하여 조립한 첨단의 시간들이/쌓이고 쌓여 탑이 된다/소통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단절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다시, 바벨탑을 세우며」일부(『뼈아픈 별을 찾아서』소재)
인터넷 세상은 하나의 우주/쇼핑, 게임, 영화관람, 은행업무……/네 모든 생활 인터넷으로 시작되고/E-메일. 채팅, 메신저, 컴섹……/타인과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인터넷으로 이뤄진다/요람에서 무덤까지,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너를 미치게 하는 것들 2」일부(『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소재)
부조리한 세계와의 불화에서 얻게 되는 인간의 상처와 고통을 시 쓰기를 통해서 치유해보려는 이승하 시인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운 데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흡사 남성적 억압에 대항하는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를 연상시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의 이러한 노력은 또 다른 복병을 만나게 된다. 인간이 사는 우주가 시인에게 있어서 상처를 치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가상 우주인 인터넷은 온갖 가짜 언어들이 판을 치면서 오히려 시인에게 상처를 주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유기체와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유기체가 아니다. 따라서 유기체인 인간이나 자연과는 근본적으로 한 몸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인터넷은 시인에게 또 다른 폭력과 광기의 원천인 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승하 시인의 시세계는 자연(우주)과 인간(문명), 생명과 죽음, 단절과 소통이라는 이원론적 사유가 바탕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반된 사유들이 이원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유기체적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그의 시에 나타나는 유기체적 상상력은 그의 모든 시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구심점이며, 폭력과 광기에 의해서 단절되었던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현대시>2005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