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는 ‘계절’을 찾습니다
불규칙한 한반도 여름 강우 패턴
뒤죽박죽 … 가을엔 엘니뇨 영향
‘가뭄’ 겪을 수도
올해 한반도에 여름은 없었다. 싱거운 장마가 끝난 7월 말부터 잠시 반짝 더위가 있었을 뿐 여름다운 여름을 보여주지 못하고 내내 집중호우를 뿌려댔다. 장마가 끝난 뒤인 8월4일부터
나흘 동안 서울에만 무려 472mm를 비롯, 전국에 내린 비는 강우 규모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광범위한 집중호우였다. 집중호우는 8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계속됐다.
8월 초의 집중호우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남부지방인 김해 함안 합천 등이었다. 피해액은 39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고, 한 수재민은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번 수해를 인재로 규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을 상대로 수천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8만5000평 부지에 해수욕장과 놀이시설을 갖추고 피서객을 맞이하는 인천 송도유원지도 최근 몇 년간 기상이변 때문에 많은 손해를 입었다. 이곳은 이용시설이 대부분 실외용이어서 비가 올 경우 이용객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유원지는 올해만 해도 매출이 작년보다 40% 이상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유원지의
한재성 과장(36)은 “몇 년 전부터 여름철에 비 오는 날이 많아 매출이 줄어들었다”면서 “이제는 맑은 날씨만 기다릴 수 없는 처지라 보완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장마 끝난 8월 초 집중호우 피해 막심
몇 년 새 여름철 날씨가 예년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원래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의 전형은 6월
하순부터 지루한 장마가 시작되고, 7월 말 장마가 끝나면 8월 중순까지
무더위가 지속되는 형태였다. 즉 더운 공기와 찬 공기가 만나는 한대전선이 한 지역에서 남북 200~300km 이내에 정체하거나 움직이는 동안 지속적인 비와 소나기를 발생시켜 왔다.
그러나 최근 장마기간이 짧아지고 비도 적게 오는 반면 장마가 끝난 뒤 국지성 호우 현상에다 많은 비가 오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장마전선에
이상이 생겨 장마비가 과거와는 달리 변동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
지난 98년에는 장마가 7월28일에 끝났으나 7월31일~8월18일 전국적으로 평년의 2배에 달하는 평균 449mm의 비가 쏟아졌다. 99년에도 장마 뒤인 7월27일~8월4일 남해안과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323.1mm의 비가 내렸는데 이는 평년의 3.5배에 달했다. 2000년에도 장마가 끝난 뒤인 7월22~23일까지 평년의 2.5배인 82.1mm가 내렸고, 올해는 8월4~15일까지 전국적으로 평년의
3.8배인 399.4mm가 내렸다.
기상청은 이런 원인을 우선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중국 북부 내륙지역이 더워지는 데서 찾았다. 즉 장마 기간에 중국 내륙에서 다가오는 따뜻하고 건조한
성질의 대륙 기단 때문에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이거나 강수량이 많지 않게 된다는 것. 반면 북태평양 고기압이 확장돼 수증기 양이 증가하는 7월 말에는 시베리아 쪽에서 찬 공기가 내려와 우리나라 부근의 기층이 불안정해져 국지성
호우가 자주 내리게 된다는 설명이다.
온실기체 증가, 삼림면적의 밀도 감소, 인위적 오염방출 등으로 지구 온난화
현상은 앞으로 더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당분간 이런 기상이변은
해마다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 97년부터 장마전선의 변화를
관측, 학계에 발표해 왔던 한국교원대 정용승 교수도 “장마철 강우 일수가 줄어든 것은 기후변화의 뚜렷한
징조”라면서 “지구 온난화에 따라
아열대 북방경계선의 북상 현상도 나타나고, 최근에는 소나기성 강수와
호우성 강수가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중요한 변화”라고 밝혔다.
기상청 박정규 기후예측과장은 “지구 온난화가 지속될 경우 중국 북부 내륙지역의 고온 현상으로 상층 고압대가 발달한다”면서 “이로 인해 장마 후에
호우가 자주 발생하는 여름철 기후 형태는 앞으로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의 온실가스가 일본 중국 등 주변국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8월 중순 기상청 기상연구소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1990~2000년 제주도 서쪽 고산마을에서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한 결과 10년 사이 농도가 353ppm에서 373ppm으로 20ppm이
증가했다. 같은 기간 일본 쓰쿠바와 몽골 울란울은 16ppm, 중국 왈리관은
15ppm이 증가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산업혁명 전인 1750년 이후 250년 동안 30% 증가한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가 최근 10년간 5.8% 증가한 것은 엄청난 변화다.
결국 이런 변화는 한반도 주변의 기온상승이나 산림생태계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기상연구소는 밝혔다.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 10년간 5.8%나 증가
기상이변이 잦아지면서 기상청은 기후 예측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계절마다 지역마다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에 차이가 생겼고, 과거에 나타났던 현상들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고 있기 때문. 대륙은 점점 사막화되는
반면 바다 근처는 점점 습해지는 이중적인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기상청은 이미 지난 7월25일 중국에서 다가오는 저기압의 영향과 대기 불안정 때문에 8월의 국지적인 호우 가능성을 예보했지만 이번처럼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매일의 예보는 지역에 따라 빗나가기
일쑤였다.
지난봄 우리를 몹시도 괴롭혔던 황사 역시 근래 뚜렷한 변화 양상을 보였다.
발생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농도도 심해졌다. 지난봄의 황사는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로 심각했고, 규모 역시 전국적이었다. 예년에는 4, 5월에 황사현상이 나타났지만 최근엔 봄이 시작되는 3월 초에 나타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기상청은 황사의 이변 역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중국의 겨울이 따뜻해져
땅이 얼지 않은 데다 건조해진 탓으로 분석하고 있다.
올 가을에는 특히 엘니뇨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엘니뇨 현상은
지구상의 절반을 강타했던 97, 98년 이후 5년 만에 발생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엘니뇨의 간접 영향권이지만 엘니뇨가 다른 요소들과 결합될 경우 큰 피해도 예상된다고 기상청은 밝히고 있다. 즉 북태평양 중위도 해역에 발달하고
있는 고수온대와 중국 내륙의 중위도 기압계의 상호작용에 따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예측이 가능한 것은 지난 4월부터 엘니뇨 감시 구역인 열대 태평양 해수면의 온도가 0.5~2℃ 가량 높은 고수온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
이는 우리나라 기상청 모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엘니뇨 예측 모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결론이다.
과거에 엘니뇨 초기 상태에 나타났던 우리나라 가을철 기상 특성을 보면 기온은 평년과 비슷하나 11월에는 고온현상이 나타났다. 강수량은 9, 10월 평년보다 적은 가뭄을 겪었고, 태풍은 9월에 1개 정도가 영향을 주었다.
기상이변, 국가차원 새로운 방제대책 세워야
엘니뇨는 스페인어로 ‘작은 아이’라는 뜻이고 이를 대문자로 쓰면 ‘아기 예수’가 된다. 19세기 페루 선원들이 몇 년 간격으로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연안해역의 수온이 올라가고 해류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작은 아이’는 전 세계에 걸쳐 심각한 기상이변을 일으켜왔다. 엘니뇨는 기존의 기상패턴을 반대로 뒤바꿔놓아 따뜻한 겨울과 서늘한 여름을, 혹은 습한 지역에 가뭄을, 메마른 지역에 홍수를 몰고 왔다.
겨울철 역시 기온상승이 뚜렷해졌다. 아직도 중·고교 교과서에는 한반도의
겨울철 날씨의 특성을 삼한사온(三寒四溫) 현상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이제는
이 문구를 바꿔야 할 판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88년 이후 한반도의 겨울은 너무 따뜻해졌다. 날씨의 특성도 10~20일 이상고온이 지속되다가 하룻밤
새 영하 20℃ 안팎의 한파가 몰아닥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겨울철 기온상승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반도 주변의 해수면 온도다. 특히 북위 30~40도 태평양의 이상 고수온대가 최근 4~5년 지속되고 있어 이것이 고압대를 이루고
겨울철 기온상승을 유발하고 있는 것.
정용승 교수는 올 여름철 수해를 비롯, 모든 기상이변은 인간이 자연의 섭리를 거역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오염물질을 내뿜어왔습니다. 지난 세기 북아메리카의 절반 이상이 파헤쳐졌고, 남아메리카의 울창한 산림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중국과 몽골 러시아 북한의 산림도 엄청난 양이 줄어들었습니다. 누구나 맨땅 위에 있을 때와 숲 속에 있을 때의 기온 차이를 알 것입니다. 지표면의 변화는 당연히 기온 변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게다가 대기오염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기후변화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종합대책을 새로 수립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여름철 강우 패턴의 변화는 일상생활 및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방재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
한편 뒤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지구환경연구센터는 올해
8월부터 2003년 3월까지 기후변화 대응 환경부문 종합계획을 수립할 계획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벌써부터 가을 가뭄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연간 강수량은
1200ml로 비교적 풍부한 나라에 속하지만 이번 여름처럼 장기간 기상이변으로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나면 나머지 계절에는 심한 가뭄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 이래저래 올 가을도 실종되지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 정현상 기자 > doppelg@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