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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갈라 3,1-5
복 음 : 루카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신자들을 호린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다교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다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한 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유다인이었던 이들과 달리 이교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경우,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 규정들을 따르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유다교를 거쳐 그리스도교로 가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 이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라고 힘껏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염려한 것은 “율법에 따른 행위”(갈라 3,2)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쟁자는
나 자신이고, 내가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들의 뒷부분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구원된 이의 삶은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과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에 뒤따르는 결과이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교인과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산다면 오히려 그가 정말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이 구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꿈’이 무엇인지 발표하게 하셨습니다.
다양한 꿈이 나왔는데(당시 한 반에 70명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던 꿈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친구는 자신있게 ‘교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의 말에 다들 크게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이 친구는 전혀 교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수업 시간에도 항상 딴짓만 했습니다.
당연히 늘 반에서 꼴찌는 이 친구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교수님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지?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히 훌륭한 교수님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친구는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수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친구는 끝까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표(꿈)을 향한 과정 안에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여기에 들어갈 노력의 크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노력 없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주는 것은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절로 얻고자 한다면 큰 욕심입니다.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것만을 좇으면서 풍요와 안락을 달라는 것은 더 큰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으로는 절대로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고,
또 실제로 그렇게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지요.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여기에서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청하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이요,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 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희망하는 바를 ‘말’로 청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찾으며,
사랑하는 바를 ‘마음’으로 두드리며 전인격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몸을 맡기는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 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직 말을 못 해서 자신의 의사 표시를 울음으로 합니다.
엄마는 아이의 울음을 듣고 아이가 원하는 걸 해결해 줍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하고, 젖병을 물려 주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혀 주기도 합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학생이 되면 울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로 합니다.
이제 무조건 울기만 해서는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학생이 되면 이제 엄마와 밀고 당길 줄도 압니다.
설거지를 도와 주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합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면 성당에 가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성적이면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엄마는 자녀가 원하는 걸 기꺼이 들어 주게 됩니다.
이제 학생이 어른이 되면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꿔 드리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기도 하고,
엄마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우는 아이에서, 엄마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학생에서,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는 어른이 되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울기만 한다면 엄마의 마음이 아플 겁니다.
주교님은 사제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사제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임무를 맡겨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어떤 사제를 마음에 들어 할까요? 우는 사제가 있습니다.
능력도 안 되는데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공동체를 어렵게 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고, 교우들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꼭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 주교님은 무척 난처할 겁니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목하고 싶다고 하면서 미리 일본어 어학 시험에 합격합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일본으로 보내 줍니다. 일본 교구에서 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2년 전에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주교님께 교포 사목을 청했습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저를 교포 사목 사제로 파견하였습니다.
능력과 사목의 역량이 검증된 사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가는 곳마다 신자가 늘어나고, 공동체가 활기를 되찾고,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본당을 분가시킵니다.
이런 사제를 ‘해결사’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제가 많으면 주교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주교님이 원하는 걸 알아서 해 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타 교구에서 공소 사목 사제를 원할 때입니다.
기꺼이 손을 들어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인사 적체로 본당 신부의 자리가 부족할 때입니다.
후배 사제를 위해서 기꺼이 특수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고속 터미널 성당에도 지원하고, 시장 성당에도 지원합니다.
6년 전입니다. 저는 특수 사목을 5년 했기에 본당 신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 신부로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결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저를 미주가톨릭 평화신문 지사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신문을 홍보하고 만드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곳 달라스를 마치면 주교님이 원하는 걸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지만 제 부하들에게 명령하면 부하들은 제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아픈 부하가 곧 나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우는 아이의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밀고 당기는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걸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떠나게 한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결국 성령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기도! 하면 대체로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청원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네. 기도해 드릴게요.’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물론 오늘 주님 가르침에 따라, 간절한 원이 하나 있다면, 정말 절박하다면,
마음과 정신, 목숨과 영혼을 다해 아버지께 청할 필요도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
사실 내가 건강해야 복음 선포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합격해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당당히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가화만사성 해야,
그를 바탕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기도는 청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려는 노력입니다.
기도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쁘고 충만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일입니다.
기도는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힘차게 활동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 인생 여정을 항상 인도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기적을 기꺼이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느님께서 기도를 빨리 안 들어주시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꾸준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바로 줍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에 손님을 맞은 친구는 먼저 자는 친구를 깨웁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그러나 계속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줍니다.
그 친구는 속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들어줘야지.
아니면 또 찾아와서 괴롭힐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빵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친밀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계속 청해도 된다고 믿는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아내만이 남편에게 계속 청할 수 있고 아이만이 엄마에게 계속 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청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청을 거부한다는 말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청하고 받고 또 상대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앤 롤링의 ‘해피 포터’ 시리즈 출판 여정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원고는 최종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12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믿고 그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믿고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게 점원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손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꼭 입고 싶은 옷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비쌀까 봐 문을 열고 머리만 집어넣고 점원에게 묻습니다.
“이 옷 얼마예요?”
점원은 “100만 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그 옷을 살 확률이 높을까요?
아마 “당신은 저 옷을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죠.
가격만 빨리 알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라고 느낄 것입니다.
“뭐? 나를 무시해?”라며 보란 듯이 옷을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에게 옷을 사서
기쁨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직원은 어떻게 말할까요?
“아, 예! 잠깐 들어와서 앉으세요.
제가 가격을 알아보는 동안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그 친절함에 점점 보답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원은 눈썰미로 이미 그 사람의 치수를 알아서
맞는 옷을 가져와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어보니 딱 맞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150만 원이라고 해도 그 옷을 살 것입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청을 들어주면 다시 필요한 게 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놓고 싶어서 지금 청하는 것을 당장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외삼촌 라반의 동네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좋아하였고 라반에게 청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축복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년을 일해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7년을 일하고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있었습니다.
라반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금방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7년만 더 일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래서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라반의 마음과 같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생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청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이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원리를
쉽게 정립하여 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그러나 그 약속은 이사악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청은 그냥 들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
박상대 마르코 신부
기도 중의 기도요,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일용할 양식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할 것을 허락하신다.
아니, 청할 것을 서둘러 권고하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청원 기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는 청원기도를 드리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도의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이다.(5-10절)
둘째는 청원기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11-13절)
우선 루카복음이 독자적으로 보도하는 예화가
바로 기도에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화는 한밤중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은 다른 친구가 내놓을 빵이 없어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을 청하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화의 결론은 사람이 우정만으로는 빵을 얻지 못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원기도에는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청을 거절하지 않고 꼭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나 청원이 이루질 때까지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원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일단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들어줄 줄 아는
이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과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비교하는 對比論法을 통하여,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암시하신다.
나아가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던,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을,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이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주고,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주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보다 더 좋은 “하느님 당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사와 찬양으로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비운 두 손을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림으로써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청하는 것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청한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신께서 가난하셨는데, 내가 어찌 부자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 예언자를 돌로 쳐 죽인 자들의 후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내가 어찌 사람들 눈에 유명하고 권세 있는 자 되기를 애써 바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희망을,
그 희망이 결국은 절망을 가져다줄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희망을 가슴속에 품어 기르겠습니까?”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