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중국 베이징사범대부속여중(현 베이징사범대 부속 실험중학교) 회의실. 문화대혁명 때 이 학교에서 홍위병 활동에 앞장섰던 졸업생과 당시 이들을 가르쳤던 교사 20여명이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는 혁명 원로 쑹런충(宋任窮)의 딸 쑹빈빈(宋彬彬·67)이 참석해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는 1966년 8월 18일 홍위병 대표로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마오쩌둥의 팔에 빨간색 완장을 채워준 인물이다.
참회하는 쑹빈빈
이 사건으로 그는 중국 전역 1000만 홍위병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홍위병이 마오의 조종을 받으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파괴행위를 저지른 것은 중국 현대사의 씻지 못할 비극으로 남아있다. 이제 스스로 노인이 된 쑹빈빈은 이날 48년 전의 그 잘못을 빌었다.
최근 중국 내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반성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혁명 원로 천이(陳毅)의 아들 천샤오루(陳小魯)가 문화대혁명 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공개 사과한 바 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준 시대”라고 규정하고 “영혼의 정화를 위해, 사회 진보를 위해,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이런 사과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반성이 없다면 논의의 진보도 없다”고 말했다.
쑹빈빈이 발표한 사과문은 다음과 같다.
☞‘나의 사죄와 감사’
오늘 저는 아주 감격스럽습니다. 진작에 이런 만남의 자리를 갖고 싶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성사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70도 안됐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선생님께서는 모두 저보다 연세가 많으십니다. 주쉐시(朱學西) 선생님께서는 아흔이 다 되셨습니다. 강추위에도 연로하신 선생님들께서 회의에 참석해주시니 아주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교우 여러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40년 넘게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던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베이징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의 문화대혁명은 1966년 6월 2일 붙은 대자보를 기점으로 시작됐습니다. 저는 대자보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대자보는 학교의 정상적인 질서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많은 선생님을 다치게 했습니다. 저는 우선 당시 학교에 계셨던 선생님과 교우에게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공작조(工作組)가 학교에 들어온 이후 임명한 학생회 책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공작조가 나가고 나서 일주일 후 교정에서는 선생님들을 구타하는 폭력이 벌어졌고 볜중윈(卞仲耘) 부교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8·5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와 류진(劉進·당시 학생운동 주동자)은 운동장과 뒷마당에 두 차례 가서 말리기도 했습니다. (교사 구타 현장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이 흩어진 것을 보고 별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저도 자리를 떠났습니다.
부교장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제 책임입니다. 당시 저는 공작조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잘못은 저희에게도 있습니다. ‘범죄집단 타도에 반대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교장 선생님과 다른 학교 간부들에 대한 구타를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헌법 상식과 법률 의식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공민(公民)이 헌법상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 침해받을 수 없는 인신의 자유를 외면했습니다. 집단적으로 인권과 생명을 경시함으로써 변 부교장 선생님의 별세라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부교장 선생님에 대한 추모와 사죄의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후즈타오(胡志濤)·류즈핑(劉致平)·메이수민(梅樹民)·왕위빙(汪玉冰) 선생님 등 학교 간부 선생님을 잘 지켜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고인은 물론 유가족께 심심한 사의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 일로 저는 평생 괴로웠고 후회했습니다.
사과문을 읽는 쑹빈빈
문화대혁명은 큰 재난이었습니다. 제게도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었습니다. 1966년 8월 18일, 저는 톈안먼(天安門) 성루 위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팔에 빨간색 완장을 채웠습니다. 마오 주석은 제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저는 “쑹빈빈(宋彬彬)”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오 주석이 “빈(彬)자가 ‘문질(文質) 빈’의 빈이 맞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마오 주석은 “용맹해야(要武)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광명일보 기자가 학교에 왔습니다. 저보고 글을 한 편 써달라고 했습니다. 톈안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몇 마디 했는데, 별로 쓸 내용도 없었습니다. 당시 기자가 왔을 때 다른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1966년 8월 20일 광명일보에 글이 실렸습니다. “나는 마오 주석에게 빨간 완장을 채웠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필명은 ‘쑹야오우(宋要武)’로 돼 있고 옆 괄호 안에 ‘쑹빈빈’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8월 21일 인민일보가 이 글을 전재했고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이후 며칠 만에 폭력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무수한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이 죽고 모두가 도탄에 빠졌을 뿐 아니라 국가의 정신·문화·경제에 막심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쑹야오우’라고 이름을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40여년 동안 서로 다른 2개의 쑹빈빈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아는 ‘쑹빈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문혁 폭력의 상징이 된 ‘쑹야오우’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해를 구하고 싶습니다만, 저는 문혁 초기 조직을 만들지 않았고 선생님과 친구들을 일부러 때리는 것을 포함한 그 어떤 폭력 활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2003년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류진·예지리(葉繼麗) 등 친구들과 함께 문혁 초기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조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메이수민 선생님, 류수잉(劉秀瑩) 선생님, 리쑹원(李松文) 선생님, 그리고 제 담임 선생님이셨던 자오커이(趙克義) 선생님과 그 밖에 문혁 때 학교에 계셨던 선생님을 뵈었고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문혁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저희는 이전에도 다른 자리에서 선생님께 사죄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셨고 이를 통해 저희는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반우파 투쟁과 문혁 때 박해를 받았던 주쉐시 선생님께서는 제게 “쑹빈빈은 쑹야오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쑹빈빈이 잘못 한 일은 없다.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리쑹원 선생님께서는 8·5 사건 당일 밤 변 부교장 선생님께서 병원 치료를 받으실 수 있게 앞장 서셨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리 선생님께서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증언을 해주셨습니다. 류수잉·메이수민 두 분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호되게 꾸짖으시면서 한편으로는 진심 어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저희가 작성한 조사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살펴보면서 보여주신 사랑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 선생님들께서 이 모임에 나와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 세상에 계신 선생님들께서 아무쪼록 저희가 드리는 사죄와 감사의 마음을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1960년 베이징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소녀 시절에서 학창 시절까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6년의 시간을 베이징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에서 보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좋았던 기억이 생각에 남습니다. 6년 동안 선생님께서는 조목조목 사람의 기본 자질과 도덕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문혁 후 모교는 제 결백을 인정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사실에 근거해 일을 처리해서 남은 일생 마음의 짐을 느끼지 않고 보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제 일생에는 우여곡절도 있고 이러저러한 잘못도 있지만 선생님과 모교를 위로하는 책임을 지게 됐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헛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처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을 일생 철저히 지켜왔습니다.
오늘 제가 선생님과 선생님 가족 분들께 그동안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 느끼는 고통이 대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국가가 어떤 미래로 나갈 것인지가 스스로의 과거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과거의 비극과 잘못을 잊는다면 비극과 잘못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진실 없이는 반성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반성 없이는 진실에 다가서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문혁 때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은 스스로를 직시하고 문혁을 되돌아보고 용서를 구해 화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이는 모두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