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판아래의 공간이란 공간은 곧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가 하면 서로서로 끼어 앉기도 했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은 마치 출퇴근 시간의 버스나 지하철에서처럼 내내 서 있어야 했다.
그러자 회피할 수 없는 수많은 갈등이 줄줄이 발생했다. 간부 선원 한명이 선장에게 보고했다.
“어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좁은 통로에 떨어뜨렸는데 누군가가 밟아버렸습니다. 군인들은 그 애를 수장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루 선장은 단호했다. 그는 군인들에게 설명을 했다.
“일단 출발하면 잠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싣고 나가서 수장시켜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를 바닷가에 묻을 수 있도록 아이 아버지에게 한 시간의 여유를 주도록 합시다.”
다른 보고가 뒤를 이었다.
“선장님, 부상자가 일곱 명 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한 남자가 열려있던 출입구에서 12미터 아래로 떨어져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걱정이 된 한 소녀가 뒤따라 뛰어내렸지만 다행히도 소녀는 단지 치마만 찢겼을 뿐입니다.”
“그들을 후면 갑판에 수용하게, 이따 내가 살펴보도록 하지.”
극도로 혼잡한 상황에서도 선원들과 피란민들 모두가 라루 선장의 지시를 잘 따랐다.
선창을 채우고 나자 갑판 사이를 채우고, 주갑판과 보트 계류장까지도 모자라 삭구(索具: 배에서 쓰는 밧줄 종류)에 매달리기까지 하였다.
찬바람 몰아치는 갑판 위에는 사람들이 하도 빼곡히 차있어서 승무원들이 돌아다닐 수조차 없었다.
금방이라도 “이제 그만!”이란 외침이 들릴 것 같았지만, 그날 밤이 다 가도록 들려오지 않았다. 새벽녘에 피란민들의 승선을 감독하던 2등 항해사인 알버트 골렘베스키가 외쳤다.
“미쳤어, 마치 손바닥만 한 차 한 대에 12명의 거인이 들어가는 서커스의 어릿광대놀이만 같아.”
그 이튿날 아침 해가 중천에 걸쳐 있을 무렵인 12월 23일 아침 11:10 모든 창고는 가득 찼고, 갑판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어떠한 방법으로, 어디에다가 수용했던 간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모두 다 실을 수 있을 만큼 7,607톤의 강철 배는 신기하게 쭉 늘어났다.
라루 선장이 총 몇 명이나 배를 탔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래쪽 선창에 10,200명을 수용하곤 세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것도 어린애들은 세지도 않았걸랑요!”라고 말하면서 1등 항해사 사바스티오는 싱긋 웃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최종적으로 14,000명의 사람을 쑤셔넣듯 태웠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14,000명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넓은 공간이 있을 수 없었는데도, 모두가 탈 공간은 있었다.
비슷한 상황이라면 더 큰 배라도 1,200명 정도밖에 못 태웠겠지만, 메러디스 빅토리 호 선장과 선원 모두에게는 단 한 번에 14,000명을 수송할 수 있는 영예가 주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사무장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은 다음과 같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첫째 “피란민들이 마치 화물처럼 실렸다.” 둘째 “배의 모든 화물창고와 갑판 사이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피란민들이 차지하고 있다.”
셋째 “하지만, 이 배는 이들에게 제공할 먹을거리는 물론 물이나 화장실도 없다.”
넷째 “게다가 의사나 통역할 사람들도 없는데, 어떻게 이들이 견딜 수 있을까.”
다섯째 “기온은 영하인데 화물창에는 난방도 안 되고 전기시설도 없는데, 이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지?”
여섯째 “더군다나 갑판에 있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
한편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북한 주민들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 한 대의 지프가 선착장을 빠르게 달려왔다.
한 명의 미 육군 중위가 뛰어내려서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말했다.
“범죄 수사대에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탔을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저는 함께 승선해서 부산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아 17명의 한국군 헌병들과 같이 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몇 명이 아니라 정말 많은 숫자의 공산주의자들이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탔을 것이 뻔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가 설사 유엔군의 작전을 방해한다고 해도 더 많은 선량한 민간인을 구출하려면 누가 공산주의들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대로 모두를 태우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북한 민간인들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치 유엔군은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생명구출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피란민들의 승선이 완료되어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138미터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폭발물과 피란민이란 두 가지 화물을 실은 채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기뢰 속을 뚫고 나가고자 출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도와서 항구를 벗어나게 해 줄 예인선인 세코타 호와 YTS425 호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흥남 외항으로 예인했다.
부두에 있는 피란민을 모두 실으라고 지시한 레너드 라루 선장의 방침에 따라 눈에 보이는 피란민들은 모두 태웠지만,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출항하고 나서야 흥남부두에 도착한 피란민들도 있었다.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다른 선박으로라도 그들이 흥남항을 떠날 수 있게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배가 출항할 때에 라루 선장은 이들 북한 피란민들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미국인들이 이러한 엄청난 재난에 부닥친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나?”
“과연 우리 미국인들도 이들 용감한 한국인들처럼 예기치 못한 재난에 죽음을 각오하면서 감연히 맞설 수 있을까?”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23일 토요일 오후 14:54에 북위 39-15도, 동경 128-09도 지점에서 갑판에 몰려 있던 사람들에게 얼음같이 찬 물보라를 끼얹으며 거친 동해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화물 대신 사람들을 태우고 한반도의 남동쪽에 있은 부산항을 향하여 동해바다의 공해로 나아갔는데, 그곳까지는 거리로 820Km와 28시간의 항해가 필요했다.
이제 빅토리 호는 폭 19미터에 길이가 138미터밖에 안 되는 배로 한겨울에 동해바다를 지나야 했고, 앞길에는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놓여 있었다.
첫댓글 네 실화 입니다.
선장 훌륭해요
820킬로 28시간
제가 젤 궁굼했던 사안입니다.
28시간을 어캐 굶으며
화장실은 어캐 했을까?
탈때야 죽기살기로 탓지만
나오는 배설물과 배고픔은 어캐 견디며
14000명을 어캐 관리했을까?
그 유명한 흥남탈출은 이리 되어서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네요.
그래도 라루 선장님께 고마운 것이
다 태워주셨으니요.
정말 좋은 일 하셨습니다.
대대로 살은 고향산천을 두고
버리고 떠나는 이북피난민들
마음 심정은 어떨까요
근데 남한에 와서 못사는 이북사람들
없었요 남한사람들은 굶어 죽어도
이북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아요
그만큼 생활력 정신력 강인함니다
어찌되든 라루선장의 위대한 인권사랑
인도주의는 노벨 인권상 평화상을
지금이라도 받아야 함니다
다음 연재편이 기대되고
흥미진진 함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