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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제1독서 : 갈라 3,7-14
복 음 : 루카 11,15-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15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태평하여 보이십니다.
사람들이 그분께서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루카11,15)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여도 크게 동요하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면
사탄의 나라는 이미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는 셈이니
곧 멸망할 것이고 그러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식이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귀를 쫓아내는 행위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너희의 아들들“(11,19)도 마귀를 쫓아내고 있고,
사람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오히려 의심합니다.
게다가 한 번 마귀를 쫓아낸다고 해서 꼭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귀 하나가 나간 빈자리에 더 악한 영이 더 많이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셔도
그것이 베엘제불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 그들의 마음 안에는 의심만 생깁니다.
”힘센 자“(11,21)이신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들어가시어
다시 마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시지만,
오히려 그들의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음을, 오고 있음을
적어도 그분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의심과 불신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나리라.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복음 환호속)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에는 많은 이가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습니다.
이 워치는 단순히 시간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알림, 운동량, 스트레스, 혈압, 혈중 산소, 심지어 수면 상태까지 알려줍니다.
저 역시 스마트 워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혈압약을 먹게 되면서, 이제 건강에 신경 쓸 나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차지 않습니다. 제 몸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내는 알림 때문입니다.
분명히 푹 잤는데, 수면 시간이 짧아서인지 수면 점수가 항상 낮습니다.
지난밤에 제대로 못 잤다면서 오늘 피곤할 것이라면서
‘관심 필요’라는 알림을 제게 보냅니다.
문제는 이 알림을 받으면 정말로 하루 종일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또 갑자기 심박수가 올라갔다면서 큰 문제 있는 것처럼 진동이 울리기도 합니다.
제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영향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스마트 워치를 멀리하면 됩니다.
지금은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피곤함도 없어지고 더 건강해진 것 같습니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굳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행복을 외부에 위탁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키울 수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다른 것에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나쁜 일일까요?
만약 마귀를 쫓아내지 않고 사람들을 악으로 기울게 한다면
정말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 두목조차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 인간들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외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비방을 하게 되면 어떠합니까?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을 나쁜 의도로 받아들이면,
다시는 그런 좋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 주셨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방과 악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외부의 영향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영향을 계속 받게 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은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서 놀라워하는 이들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
곧 예수님에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뒤집어씌우는 이들이요,
셋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그야말로, 요한 복음사가의 말대로 그들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던 것입니다.'(요한 3,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두 가지 논거로 반박하십니다.
첫째는 만일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다면,
결국 베엘제불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기에 모순이요,
둘째로는 자신들의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것 역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이기에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비방은 완전히 부정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들의 비방과 모함에 대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일로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탄을 쫒아 낸 ‘자리’를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탄이 쫓겨난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말입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심을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더 세고 맹렬한 힘을 갖추고 떼로 몰려올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임자(주인)가 있어야 하는 집과 같습니다.
만약 집이 비어 있고 임자가 없으면, 마땅치 않은 자들이 침범해 들어와 살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집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 집을 빚으로 채우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죄나 어둠을 비우고 깨끗해지고도 그냥 그대로 있게 되면
그 자리는 즉시 또 다시 어둠이 찾아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어둠과 악이 동료들을 데리고 떼거리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함으로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어둠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혹 빛으로도 채워져 있지도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어둠으로도 빛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채,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거룩한 주인을 모셔야 할 일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한 분의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감실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 ‘고자질쟁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 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루카4,6. 2코린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16,23),
악인을 조종(에페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1,9-11)할뿐 아니라 유혹(2코린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4,5-7)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내시지만,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악한 영은 더 큰 악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의 대립을 놓고
심판관을 자처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가슴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지 내 뜻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12장 28절에는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 하십시오”(에페6,1)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묵시12,11).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길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를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수업료 낸 셈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려면 수업료를 내야 합니다.
인생의 길에도 거저 주어지는 건 별로 없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면서 하나둘씩 배워가는 겁니다.
꼼꼼하게 챙기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가끔 수업료를 낼 때가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샀는데, 잘 모르고 정기 배송을 선택했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신청 안 했는데 의아해하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1달이 지나니 또 왔습니다.
별로 필요도 없는 거라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제가 정기 배송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정기 배송을 취소했고, 이왕 온 것은 소모품이라 그냥 두고 쓰기로 했습니다.
수업료를 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예도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는 사람은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늦을 때가 있습니다.
도벽에 빠지는 사람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교도소에 다녀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 자본, 기술, 디지털 문화는 어느덧 우리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영적인 갈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피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 가을 단풍, 흘러가는 시냇물,
지저귀는 새의 노래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근심의 먼지가,
시기의 먼지가, 욕망의 먼지가 수북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배는 12척이고, 적의 배는 수백 척입니다.
당연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습니다.
장군의 뛰어난 전략을 믿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려는 부하들의 용기를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셨고,
제자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잘 지은 집도 3년만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엉망이 되곤 합니다.
집 앞의 텃밭도 한해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와 함께 있어야 안전하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은 힘들고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넘어트리지만,
즐겁고 기쁜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
조욱현 토마 신부
군중들은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물리치신다고 하신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면”(20절).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한다. 팔은 아드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 몸-팔-손-손가락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일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행위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이루신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분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면,
인간 본성이 그분 안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하신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끌고 다니며 자기 우리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자, 사탄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전리품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매여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자들을 구원하시어
진리 안에서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23절) 하신다.
사탄은 예수께서 모으신 것을 흩어 버리려 하는 자인데,
예수님을 도와 자기를 무너트릴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의 집은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면 또다시 더러운 영이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26절) 어떻게 할까?
우리 시대 악령의 실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시대 대 마귀 베엘제불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마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괴한 형상에 날카롭고 큰 뿔이 달린 얼굴에,
괴성을 지르고 길길이 뛰는 무서운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형태의 마귀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마귀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기괴하고 흉측한 이미지와는 반대입니다.
화려한 포장지와 달콤한 맛과 향기로 자신을 감추고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취약함을 파고듭니다.
어쩌면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우리 시대 경계해야 할 대 마귀입니다.
오직 돈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돈이 하느님 위에 위치하며, 돈을 숭배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승승장구와 떵떵거림, 이를 방조하고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불의한 방법을 총동원해 천문학적 재물을 쌓은 이들이
휘두르는 횡포와 갑질의 칼날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통과 상처를 외면하는
우리 교회의 안일함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이 시대 악령으로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죽음의 문화’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 안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배금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가정 폭력, 대화의 단절, 편리주의,
물질만능주의가 슬금슬금 들어오더니 완전히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의 실체인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그 간교한 악의 세력, 죽음의 문화를 우리 가운데서 쫓아내기 위해 합심해야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시대 악령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배금주의입니다.
재물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입니다. 돈을 하느님 윗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합심해서 큰 목소리로 외쳐야겠습니다.
“돈이 다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리가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실상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져갑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만은 영원하십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워도 견딥시다.
모든 것 주님 손에 맡기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시다.”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바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인들은 선을 위하여 하나가 되고
악인들은 악한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고 하시며
악마들도 악한 일에서는 갈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게 무엇일까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러니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인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그렇다면 우리가 죽기까지 청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청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러니 먼저 우리 안의 악을 몰아내는 성령님을 청합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욕망을 몰아내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는 다 곁들여 받게 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여 청하지 못하는 것도.
시에나의 성 가타리나(1347~1380)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삶은 영적 평화와 연합을 추구하는 누군가를 통해
그녀의 가족을 포함해 누구라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강력한 예입니다.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부유한 대가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25명의 자녀 중 25번째였지만,
그녀의 형제자매 중 상당수는 유아기까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자코모는 부유한 양모 염색가였고,
그녀의 어머니 라파는 의지가 강하고 실용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가족과 마찬가지로 가타리나의 부모는
그녀가 결혼하여 존경할 만한 결합을 통해
가족의 지위와 부를 더욱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사회적, 재정적 지위에 있어
잠재적인 자산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가타리나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불과 여섯 살 때 사도 베드로, 바오로, 요한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환상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가타리나가 나이가 들자, 그녀의 가족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회 계층의 젊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기대였으며,
가타리나의 부모는 잠재적인 구혼자를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가타리나는 결혼이나 가족이 꿈꾸던 세속적인 삶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을 대체할 행복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가타리나의 소망은 명성이나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평화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그녀는 수녀원 밖에 있으면서도 기도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평신도 공동체인 ‘만텔라테’(Mantellate)에 합류했습니다.
그녀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은 그녀의 가족을 걱정시켰고,
가족은 그녀가 극단적인 영적 수행을 버리고
좀 더 전통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를 계속 희망했습니다.
그녀의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가 그녀를 고독한 삶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면서 그녀의 삶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이에 순종했고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교회와 사회 모두에서 빠르게 강력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타리나가 참여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권이 복귀된 일이었습니다.
거의 70년 동안 교황들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살았는데,
그로 인해 이탈리아와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큰 정치적, 종교적 불안정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하여
그에게 교황권을 로마로 돌려보내고 교회에 평화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가타리나의 지혜와 영적 권위에 감명받은 그레고리오 11세는
그녀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1377년에 교황권은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교황권에 대한 참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특히 교황권과의 갈등이 특히 심했던
피렌체의 다양한 전쟁 세력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피렌체로 가서 평화 협상을 했습니다.
가타리나는 결코 권력이나 명성을 추구한 적이 없었지만,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대했지만,
가타리나는 오직 영적인 평화와 연합만을 추구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헌신을 통해 그녀는 교회 변화를 위한 강력한 힘이 되었으며,
로마에 교황권을 회복하고, 전쟁 중인 파벌들에 평화를 가져오고,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개혁과 거룩함을 촉구했습니다.
영적인 평화만을 원했던 가타리나는 로마에 교황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평화를 가져오며, 교회가 거룩함을 향하도록 영감을 주는 등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학원도 보내고 돈을 많이 들이며 노력합니다.
하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덤으로 받게 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성녀 가타리나처럼 마음의 평화,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됩니다.
그녀는 ‘대화’라는 책을 써서 교회 학자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글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소원합시다. 죽기까지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생각만 해도 주실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