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시집/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요즘 같은 엄중한 시기에 한갓지게 무슨 시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나는 매일 시를 읽는다.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노래를 부르거나 왕창 수다를 떠는 것으로 해소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겐 어지러운 머리를 가다듬거나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는 시 읽기 만한 것이 없다.
그러다 김승희 시인의 이 시가 눈에 들어 왔다. 1952년에 출생한 김승희 시인은 1973년에 등단을 해서 지금까지 11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다.
이제는 원로 시인이라 해도 될 정도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시는 그가 환갑이었던 2012년에 낸 시집인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시기에 나온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그녀 특유의 파격적인 문체 때문에 다소 어렵게 읽혀졌던 시들이 많이 순해진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 시도 쉽게 읽히며 눈에 쏙쏙 들어 온다.
이 시를 읽다 보니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 새겨 듣고 싶은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이 시에는 이렇듯 온통 희망적이다. 그래선지 시 전체에 유독 쉼표가 많이 들어가 있다.
내가 시를 옮길 때면 행여라도 빠뜨릴세라 점 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타이핑을 하기에 더욱 이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라는 싯구를 같은 연에 반복해서 싣고 있는데 다 읽고 나면 그럴 만한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최근 정치적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척점에서 서서 싸우다 보니 편이 갈려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백척간두라는 말은 이럴 때 쓰자고 있는 것인가.
하긴 내우외환이란 사자성어가 요즘처럼 실감나게 다가 오는 때가 있었던가 싶다.
그럼에도 비겁하게도 내가 딱히 할 일은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꿋꿋하게 버티는 것뿐이다.
내가 실패를 여러 번 겪었고 비빌 언덕뿐 아니라 가진 것이 없어서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기에 더욱 살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1920년대에 태어난 울 엄니는 가끔 내게 왜정 때와 6. 25 이후 잠시 겪었다는 인공 때를 들려 주시곤 했다.
전쟁으로 인해 엄동설한에 피난길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암담함에 비하면야 지금 상황은 덜하다 해야 할까.
얼마전에 본 어느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은퇴할 나이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냐는 물음에 그 사람이 말했다.
"젖은 낙엽처럼 살았어요."
나는 2시간짜리 영화에서 이 대사 하나가 완전 꽂혔는데 이 시에도 비슷한 싯구가 나온다.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는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섬이다. 그래도라는 섬에서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다.
내일 만약 국가대표 축구 경기가 열린다면 지금 갈라진 사람들은 정치색을 지우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우리나라를 응원할 것이다.
같은 시집에 실린 희망적인 시 하나 더 올린다. 이 시에는 은유가 여럿 들어 있어서 짧지만 더 강렬하게 다가 온다.
내겐 이 카페가 그래도이기도 하다.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 김승희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첫댓글 그래도 힘내어서 살아가야지 싶어 한발 한발 내딛는 오늘입니다.
잘할수있다고 자기주문외며........
수현아님의 댓글이 바로 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제 읽은 시 중에 딱 내 마음이기도 한 시 하나 붙입니다. 일등 댓글 선물이라 생각하셔도 되겠네요.ㅎ
같은 시인의 작품이지요.
좌파/우파/허파 - 김승희
시곗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
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
미친 사람 빼고
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나서 말해라
세수는 두 손바닥으로 우편향 한 번 좌편향 한 번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 낯바닥을 온전히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시곗바늘도 세수도 구두도 스트레칭도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세상은 돌아간다
필히 구두의 한쪽은 좌파이고 또다른 쪽은 우파이다
그렇게 좌우는 홀로 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지구는 돈다
좌와 우의 사이에는
청초하고도 서늘한, 다사롭고도 풍성한
평형수가 흐르는 정원이 있다
에덴의 동쪽도 에덴의 서쪽도
다 숨은 샘이 흐르는 인간의 땅
허파도 그곳에서 살아 숨쉰다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 2017
@유현덕
오오
예리한 관찰력과 거기에 따르는
시인의 사유가
너무 가슴에 와 닿습니다
허파의 역활
넝마주이들이 사는 섬인가 봅니다.
광화문 한남동에는 넝마주이 얼씬도 할 수 없습니다.
여의도에 기라성 같이 잘나고 아는거 많은 양반들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요
개미들이 살곳은 그래도라는 섬이 군요
바쁜 지기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댓글 주셨네요. 이곳 삶방에서만큼은 정치색이 없는 청정지역이기를 바래봅니다.
얼치기인 저도 넝마주이 뒤를 따라 다니다 보면 괜찮은 것 하나쯤은 걸릴지 모르겠네요. 이런 것도 이삭줍기라고 할 수 있으려나.ㅎ
모쪼록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그래도에서 지기님과 오래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네 좋아요. 글 ~~참심해요.
네, 자연이다님 항상 좋은 시간 되시길요.
환상의섬 이어도가 있는데
그래도는 현실속에 존재하는
따끈따끈한 섬이네요
저는 이어도를 가 보질 못했지만 그래도에서는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뭐든 본인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데 어수선한 시기임에도 저는 가능한 희망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산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시인의 섬이라는
시가 절실해진 요즘입니다
그 섬이
성이 되고 당이 되어
고립과 단절로 점철 된 시국 ᆢ
독서인 답게 고뇌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정현종의 섬을 윤슬님이 언급을 하시니 훨씬 고급지게 들립니다.
아무리 좋은 시일지라도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그저 소음이거나 공해일 수도 있습니다.
한갓지게 시를 읽다가 알게 된 일인데 새소리, 파도소리 등 익숙한 백색소음이 때론 제 안에 깃든 근심을 잠시 지워주기도 하데요.
아득하지만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작금의 세월이기도 합니다. 하여, 저는 저녁밥 냄새부터 떠올리는 퇴근 무렵입니다.ㅎ
환갑이라는 나이라서
완성도가 높은 시라는 점에
고개 끄덕입니다
그렇지요
욕심은 버려지고
체념도 알때이고
숙연함에 감사할줄 아는 나이
그런가 하면 아직 세상의 끓는 청춘같은 열정이 살아있는 게 환갑 이더라구요
시가 참 좋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읽고 나가고 싶은 글 이네요
제 마음에도 그래도 섬 하나 심어 두겠습니다
좋은시 감사해요
어쩌면 이 시는 6학년이 지난 사람들이어야만 더 절절하게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싯구가 차고 넘치지만 문구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지요.
감사할 줄 아는 나이임을 아신다는 이젤님이 바로 환갑 지난 청춘입니다.
저도 이 시를 자주 읽는 편인데 이런 시 하나쯤 담긴 섬을 가슴에 담고 산다면 웬만한 풍파는 끄떡 없이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평온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뗏목까지 올라선다면 더 나눌게 없네요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야 한다
뗏목은 물살이 셀 때일수록 좌우를 번갈아 가며 저어야 뒤집어지지 않고 갈 수 있겠지요.
장희한 님의 건강과 웃으면서 사는 일상을 기원합니다.
꽃이 피어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있다.
ㅡㅡㅡㅡㅡ
나는 신의 물방울이 없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고있다.
신의 물방울이 있고 없고는 각자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이 시인의 싯구를 꼭 따라 갈 필요는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편하게 살았던 날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 이런 시국에도 별로 흔들림을 못 느끼고 삽니다.
코알라님의 마음 속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나는 1980년 "그래도"가 아니라 "교동도"에서
20살 제복의 청춘으로써 매일매일 서쪽바다의
일몰을 보며 터질것 같았던 청춘의 분노...
그래도 詩集(시집)과 "수학의 정석"을 수시로
읽고, 문제 풀며 청춘의 분노를 미래에 대한
열정으로 쌓아두었던 추억...
그때 중얼중얼 읇조리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
그해 겨울의 바닷 바람도 정말 차가웠는데~
올 새해에도 복 많이 받고 늘 건강하시게나...
화이팅 ~!!
아하~ 적토마 선배님은 교동도에서 청춘이 깃들기도 했나 봅니다.
지척에 북녘땅이 보이고 예전에는 대남 확성기로 인해 교동도 주민들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강과 바다가 합쳐지는 물길에서 일몰에 반짝이는 윤슬이라도 볼 적이면 교동도의 쓸쓸함도 잠시 잊었을 듯합니다.
그 시절 수학의정석으로 삼각함수의 논리를 익히고 시집으로 감성을 길렀으니 선배님의 청춘이 어찌 풍요롭지 않으리요.
철모 속의 문향은 이런 것을 말할 테지요.
목마 대신 적토마가 있음을 위안 삼으면서 이 추운 날을 잘 견뎠으면 합니다.ㅎ
@유현덕
그러게...
분노하는 가슴을 절제하느라 목마와 적토마를
꼭지점으로하여 희망이라는 삼각함수를 유도
시키던 겨울밤 초소의 저편에서는 강물따라
집채만한 얼음깨지는 소리가 우르렁~ 우르렁~
그럴때면 시집이라도 읽어야 진정이 되었다네..
어쩌다 눈칫껏 마시는 술에 취하는 청춘들의
객기에 나는 피곤한 정신상태였으니...ㅎ~
희망의 섬 그래도 저도 읽었지만 그냥 읽기만 했지요 ㅎㅎ
현덕님 눈에 띄면 모든 시와 소설은 현덕님의 보석같은
독후감으로 저희들에게 돌아오는군요 아하! 이런 뜻이구나 하는
배움 오늘도 많이 안고 갑니다 젖은 낙엽처럼 견뎠다는
말에 가슴에서 물기가 번집니다 감사합니다
ㅎ 운선님의 촘촘한 독서 그물망에 그래도인들 빠져나갈 수가 있었겠는지요.
같은 시를 다른 눈으로 공감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시도 내 방식으로 읽고 해석하기에 내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강철도 물렁물렁하게 순해지기도 한답니다.
문학과 예술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았으나 빈약한 제 삶에 살고 싶은 의욕을 불어 넣은 것은 확실하네요.
이 겨울밤이 운선님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면 조금 길어도 좋겠습니다.ㅎ
평온한 밤 되세요.
그냥 나는 당신이 보고잡다
ㅎ 골드훅님이 진짜 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제가 알지요.
언젠가는 만날 날이 있을 테니 먼저 건강만 하시면 되겠습니다.ㅎ
그래도 ㅡ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글 속의 내용을 받아들일만 하지만
그럴 수 없거나, 그렇지 않음에 앞 뒤 어구 문장을
이어주는 말이라지요.
작가 자신만의 개성적인 목소리
그 목소리에 현덕님의 이음으로 덧붙인 무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제가 놓치고 있던 부문까지 짚어주시니
곁눈질 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ㅎ
새해에도 저의 무딘 감각을 채워줄 현덕님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ㅡ눈ㅡ의
도약을 축복합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문학의 꽃을 피우고
계시는 현덕님 , 문운이 함께하시길
새해인사 합니다.
늘 정성스럽게 읽고 정돈된 댓글 주시는 헤알님이시네요.
이 시에는 따로 해석할 것 없이 읽히는 문장 그대로 해석해도 큰 무리 없을 겁니다. 시 속에 담긴 뜻이 평범하나 거대해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오래 다듬은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쉼표와 조사, 반복 문구 배치를 어느 연에 하느냐에 문장 호흡이 달리 읽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내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니 시인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겠지요.
내일은 날이 더 추워진다고 하네요. 흐르는 강물을 거스를 수 없듯이 순리 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뒤숭숭한 시절이지만 기운 잃지 마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