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수 신도비(曹文秀神道碑) 이진망(李眞望) 찬(撰)
조문수(文秀曺, 1590∼1647년)의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설정(雪汀)이며, 봉호는 하령군(夏寧君)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아버지는 사도시주부 조경인(曺景仁)이고 어머니는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의 딸이다. 지조가 있었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광해군 때 관직 생활을 처음 시작했는데,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폐모론이 일자 관직을 버렸다. 인조반정 뒤에 현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를 호종해 강화도로 간 뒤 상소를 올려 강화를 반대하고 임금이 직접 전쟁을 치를 것을 청했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독려하였다. 항상 관직을 그만두고 자연 속에서 지내고자 하여 영덕에서 말년을 보내려고 계획했으나 아들 조한영이 심양으로 끌려가 옥에 갇히게 되자 영흥부사에 제수되었다. 끝내 한가롭게 지내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한 뒤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문장에 있어서는 임숙영과 이식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문명을 날렸고, 섬세함과 활달함을 모두 갖추어 당시 유행하던 투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글씨로도 이름을 날렸다. 조맹부체를 좋아하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왕희지체를 가미하였다. 태묘의 제주(題主)를 수정할 때 글씨를 써서 상을 받기도 하고 많은 금석문을 썼다.
조문수 신도비(曺文秀神道碑)
공조참판 하령군 (工曹參判夏寧君) 설정 조공(雪汀曺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 하령군 행가의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세자좌부빈객 하령군(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夏寧君行嘉義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世子左副賓客夏寧君) 조공(曺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서문을 함께 기록함.
정헌대부 의정부우참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正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이진망(李眞望) 지음.
현손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 지제교(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 조명교(曺命敎) 글씨.
외증손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이진순(李眞淳) 전서(篆書).
돈녕도정(敦寧都正) 조공(曺公)은 간간이 나(이진망(李眞望))에게 말하곤 하였다. “우리 증조부 설정공(雪汀公)께서 세상을 떠난 지 80여년이 지났는데 묘도(墓道)에 아직 비문이 없습니다. 우리 부친께서 일찍이 부탁했으나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이제는 저도 늙은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다 하루아침에 아침이슬처럼 스러지면 증조부의 명망과 덕망을 후대에 밝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집안과 실로 4대의 친분이 있으니 선생님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사죄하며 감히 할 수 없다고 애써 마지않았으나, 어찌 또 끝끝내 사양할 수 있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의 집 병풍 속에서 공의 필력이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공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소암(踈庵 : 임숙영(任叔英)의 호)과 택당(澤堂 : 이식(李植)의 호)과 같은 명사들이 공의 문장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보았는데, 매우 훌륭하다고 천거하면서, 심지어는 가로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천고를 부여잡았다고 한 말도 있었으므로, 또다시 공은 문장이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행장을 살펴보고서야 공의 지조와 절개가 고매하며 이미 조정에 나온 뒤로 기릴 만한 행의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어떻게 문장과 글씨로 칭할 수 있겠는가? 아! 정말로 존경스럽다.
공은 광해군 때에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솔부(率府 : 익위사(翊衛司))의 관속에 제수되었다.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한숨을 쉬면서, “사람의 도리가 무너졌는데도 녹을 먹는 벼슬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고는 그날로 가족을 데리고 여강(驪江 : 남한강)으로 돌아가 당대의 은둔한 선비들과 더불어 바위 위를 내달리고 강호에서 마음대로 글도 짓고 술도 마셨다. 간사한 무리들이 그것을 꺼려하여 마침내 ‘물위의 여섯 은둔자(水上六逸)’라고 지목하게 되어 하마터면 화가 미칠 뻔하였다.
인조반정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고 천거를 받아 나와 연산현감(連山縣監)이 되었다. 정묘년(인조 5, 1627년)에는 임금을 호종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는데, 그때 공은 병조의 낭청으로 있었다. 공은 묘당의 논의가 주화(主和 : 강화를 주장함)로 흐르는 것을 보고 분연히 상소를 올렸다. “지금 나라의 상황이 방어할 수 있는 도리는 있으나 강화할 수 있는 의리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유 없이 강화를 청하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경계하는 바이니 지금은 비록 화해하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필시 무한한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는 방어를 대비하는 방책이 무엇보다 긴급한데도 묘당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강화만을 믿고 있으니 신(臣)은 적이 통탄스럽습니다. 저 적군이 국경을 침범하던 날 전하께서는 친히 싸우려는 논의를 하지 않고 나라를 버리고자 하는 논의를 따라 재빠르게 응하여 삼군은 해체되고 만백성은 달아나기에 급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전하의 마음이 이미 적을 방어하는 데 있지 않았으므로 수신(帥臣 : 병마절도사)은 명을 받고 사흘만에야 겨우 벽제(碧蹄)로 나갔고, 관찰사와 곤수(閫帥 : 지방의 군병을 통솔하는 장수)는 더러는 성을 버리고 살길을 찾고 더러는 멀리서 보고 달아나버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무리에게 즉시 합당한 율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기율이 서지 못해 나라 안에서 위령(威令)이 다시는 행해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또 강화한다는 명목하에 실제로는 전쟁을 치른다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극구 친히 전쟁에 나서기를 청하였다. “저 적군은 고립된 군사로서 깊이 들어왔으니 지치고 피로하여 돌아가겠지만, 전국에서 징집해 모은 우리 군병의 사기는 매우 성하니 전하께서 친히 대중을 인솔하여 북으로 임진(臨津)을 건너면 삼군의 군사는 싸우지 않아도 사기가 저절로 배가 될 것입니다.” 상소가 임금에게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자, 개연히 시를 써서 뜻을 나타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 난리 때는 밭길 사이로 달려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어사(御史)로서 서문(西門)에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평소 통탄하고 개탄하였는데, 이미 자취를 거두고 멀리 은둔할 뜻을 갖고 있었으므로 힘껏 외직을 구해 영해(寧海)로 나갈 수 있었다. 해를 넘기고 면직된 뒤 마침내 영덕(盈德)으로 가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살기 위해 물가에 집을 지었다. 거처를 계획하던 차에 공의 아들 문충공(文忠公 : 조한영(曺漢英))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징병을 반대한 일로 잡혀 북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보고 작별하기 위해 황급히 입성했다. 조정에서는 공을 영흥부사(永興府使)에 제수하여 심양(瀋陽)의 감옥에 탁전(橐饘 : 죽)을 공급하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공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고 일년 만에 자리를 버리고 돌아와 버렸다. 급기야 문충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 지은 시에는 ‘지금부터 함께 고깃배 한척을 사서(買從今共買一漁舟)’라는 구절이 있었다. 문충공이 너무나 많이 쇠약해진 것을 보고는 또 목 놓아 울기도 하였다. 말년에 영외(嶺外)에 외롭게 깃들일 계획을 하였으나 차질이 생겨 못하게 되자 우울해 하면서 참지 못하고 외부(外府)에서 방황하며 떠돌다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아아, 이야말로 운수소관이었던 것이다. 일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그 뜻만은 환히 밝아 속세의 격랑에 휩쓸리는 것 중에 빼어났으므로 백대 후에라도 지사(志士)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아아! 슬프다.
공의 이름은 문수(文秀)이고 자(字)는 자실(子實)이며, 설정(雪汀)은 호이다. 조씨(曺氏)는 창녕(昌寧)의 명망 있는 가문인데, 고려 초의 평장(平章) 조흠(曺欽)이 시조이다. 그 후로 8대 뒤에 조선에 들어와 대대로 관직을 지냈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집현전부제학으로 관직을 물러나 고향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세상 사람들은 ‘성삼문 등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갔다’고들 하였다. 2대 뒤에 우찬성을 지내고 시호가 충정(忠貞)인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이 있었다. 판돈녕으로 시호가 충경(忠景)인 창양군(昌陽君) 조광원(曺光遠)은 공훈과 덕망으로 크게 현달했으며, 첨지중추 조대건(曺大乾)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는 조경인(曺景仁)으로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하산군(夏山君)에 봉해졌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심씨(沈氏)는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의 딸인데, 더할 수 없이 착한 성품을 지니고 문학과 역사에 정통하여 몸소 예부터 내려오는 태교를 준수할 수 있었다. 만력 경인년(선조 23, 1590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유달랐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말을 배웠는데, 들은 구절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곤 하였다. 4, 5살에 이미 글자를 엮어 글을 지을 줄 알았으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은 신동이라고 인정했다. 하산군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했는데, 전에 “이 아들이 마침내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20살에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자 명성이 크게 날려 한때의 명승이 되니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궁(儒宮 : 향교)에 일이 있을 때면 공을 맨 앞에 추대하였다.
갑자년(인조 2, 1624년)에 연산(連山)으로부터 정시(庭試)에 두 번째로 급제하여 여러 번 청요직에 골고루 의망(擬望)되었다. 또 부모님이 연로하여 전례대로 홍주(洪州)로 이직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모친상을 당했다. 복제를 마치고 난 뒤에는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修撰)과 교리가 되었다. 그 사이에 문학으로 옮겨가기도 하였고, 또 호서(湖西)의 고시관(考試官)이 되기도 하였다. 예전의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군직(軍職)을 가지고 사직(史職)을 겸직하여『광해일기(光海日記)』를 편수하는 데 참여한 뒤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 가을에 파직되어 여강(驪江)으로 돌아갔다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봉례(奉禮)와 필선(弼善)에 제배되었다. 정축년(인조 15, 1637년)에 환도한 뒤 교리와 태복시정(太僕寺正)에 제배되었고 호종한 공로로 통정(通政)의 자급이 더해졌다. 예조참의를 거쳐 동부승지에 제배되었는데, 순차적으로 좌부승지까지 올랐다. 곧바로 열성조(列聖朝) 신위의 글자를 고친 일로 가선대부(嘉善)로 자급이 오르고 하령군(夏寧君)으로 습봉(襲封)되었으며, 형조와 호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영흥(永興)에서 돌아온 뒤부터 계미년(인조 21, 1643년)까지 서용되고 원래의 봉작을 회복하였으며, 부총관과 동의금을 겸직하였다. 세자좌부빈객으로서 장차 심양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문충공이 아직 심양의 옥에 있어서 가지 못했다가, 이해 겨울에 절사(節使)로서 심양에 갔다 왔다. 을유년(인조 23, 1645년)에는 공조참판으로서 좌승지가 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병으로 면직되었다. 가을에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고, 병술년(인조 24, 1646년)에 회맹(會盟)에 참가하여 가의(嘉義)로 자급이 올랐다. 정해년(인조 25, 1647년)에 개성유수 직을 사직하고 원래의 봉작과 겸직인 도총부와 의금부의 직임으로 돌아왔다. 겨울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해 12월 25일 병으로 감영에서 사망하였다. 부음이 오자 부의를 보내고 치제하는 것을 예법대로 하였다. 이듬해 3월 광주 구포리(廣州鷗浦里)의 선영 옆의 묘향(卯坐 :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나중에 문충공이 영국공신(寧國功臣)에 녹훈됨에 따라 이조판서와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을 증직 받았으며, 겸직은 관례대로 주어졌다.
공의 타고난 성품은 온후하고 인자하였으며, 행동거지를 법도대로 하였으므로 언뜻 보고서도 군자라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의 봉양과 제사 지내는 일을 한결같이 정성과 공경한 마음으로 하였는데, 항상 애통해 하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하였다. 친척들과 화목함이 지극하였고, 평소에 사람을 접할 때에는 화기애애하였다. 그러나 자제를 훈계하고 관직에 나가서는 규범과 법도에 충실하여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어길 수 없었다.
지조와 행실은 맑고 검약하여 한 터럭도 재산을 영위하려는 뜻이 없어 도성에 집을 두지도 않고 옷을 화려하게 입지도 않았다. 이미 무성한 명망을 짊어지고 관직에 나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좋아하여 극도로 선발하는 자리를 가지고 대우하였다. 그러나 공은 다만 변함없이 몸가짐을 조심하며 진취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한번도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부앙한 적이 없었으며, 더더욱 날카롭게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말년에 조정의 논의가 더욱 많아지는 방향으로 나가고 또 중요한 자리로 끌려들어 갈수록 공은 더욱 피하고 멀리하였다. 이로 인해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하고 끝까지 쓰이지 못했으므로 식자들의 한탄이 실로 이 점에 있었다. 그러나 공의 고요함과 우아하고 고결함 또한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강원도관찰사로 제수되었을 때의 제고(制誥 : 임명장)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있다. “옥처럼 순수하고 얼음처럼 깨끗하며(如玉其溫若氷斯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변함없고 지초와 봉황처럼 다투어 쳐다본다.(松柏不渝芝鳳爭瞻)” 대체로 당대에 추대하고 인정한 말이었다.
인조 때에 오랫동안 경연관으로 있었는데, 매번 경전의 뜻을 풀이할 때마다 올바로 인도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임금이 대부분 여러 이론을 물리치고 거기에 따랐고, 전후로 경연을 담당한 사람들도 모두 자극을 받았다. 고향집에서 바삐 달려 쫓아와 호종했기 때문에 임금은 더욱 그 성심과 절조를 가상히 여기고 자못 특별히 돌봐주었다. 포위된 성에서 전투를 독려할 때 다리를 저는 병을 얻었는데, 나중에 승정원에 들어오자 임금이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걱정하여 빨리 걷는 것을 면해 주었다. 이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공이 사망하자 임금은 조정에 나와 탄식하며 애석해 하였다.
또 성품이 산수를 좋아했는데, 고성(高城)에 있을 때는 그곳의 후미진 곳의 경치 좋은 곳을 좋아하여 때로는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탈 것을 준비하라고도 하여 배회하다가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조리며 저절로 흥을 냈다. 그러나 관청의 업무를 폐하지는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저절로 어지럽지 않게 되었다. 공이 돌아갈 때가 되자 백성들은 돌을 새겨 덕을 칭송하였다. 만년에 애써 동쪽 지방을 구한 것도 역시 그곳이 좋아서 그런 것이지 오로지 먼 변방으로 가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장에 있어서는 천부적으로 고상하였다. 일찍이 3백편을 지은 뒤에라야 당(唐)나라에 도달한다고 생각했으나, 제작의 규모는 주관(周官 : 주대의 관제를 기록한 책)의 섬세함과 거의 같은 부류였다. 시를 지을 때는 이것을 놔두고는 다른 데에 힘을 쓰지 않았으므로 이미 도타운데다 심원하여 위맹(韋孟)의 품격과 왕장(王張)의 여운을 저절로 얻게 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투적인 수법을 단번에 씻어버렸다. 소암과 택당과 같은 명사들이 서술한 것은 실상 공이 30세 때이고, 지금 언급하고 있는 시기는 만년이니 조예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겠다. 택당이 대제학으로 있은 지 오래 되었을 때의 일로서, 시를 지어 공에게 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대의 문사(文事)는 바야흐로 그대를 추대할 것이나 스스로 붓과 벼루를 불태우고 도망갈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써 기대하고 인정한 바를 더욱 엿볼 수 있다. 시 8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글씨의 절묘함 또한 천부적으로 타고난 품성으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가장 좋아한 것은 송설체(松雪體 : 조맹부의 서체)인데, 우군(右軍 : 왕휘지)으로 윤색했고, 대자해서(大字楷書)와 소자해서(小字楷書), 초서(草書)도 각각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당대의 명필이 되었다. 김남창(金南牕)과 신동회(申東淮) 같은 사람은 최고 자리를 서로 사양하였다. 대체로 공사의 길흉을 금석(金石)에 쓴 것 중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다. 태묘(太廟 : 종묘)의 신위에 글자를 고칠 때의 일로서, 글씨를 써야 할 사람이 마침 팔이 떨리는 병이 났다. 게다가 날이 저물어가고 있을 무렵 줄을 나눈 종이까지 잃어버렸다.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임금이 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평소 그대의 글씨를 알고 있는데, 어찌 글자를 베낄 수 없겠는가?” 공은 꿇어앉아 붓을 적셔 안배하여 글씨를 쓰니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임금이 안색이 변하며 기이하다고 칭찬하고는 곧바로 자급을 올려주었다. 문충공이 전에 공으로부터 해서로 쓴 당시(唐詩) 1질을 받았는데, 병자년에 2책을 잃어버렸다. 심양의 옥에 갇혀있을 때 어떤 요동의 군사가 말을 건넸다. “동쪽으로 쳐들어갔을 때 명적(名蹟) 하나를 얻었는데, 명나라의 문동(文董) 이하도 모두 미치지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공은 알지 못합니까?” 문충공이 보니 과연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람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돌아올 때 가지고 가라고 했으나 받지 않고 돌려주었다. 그것은 매우 기이한 일로 알려져 있다.
공의 배필 정부인의 성은 이씨(李氏)로서 우찬성 정간공(貞簡公) 이직언(李直彦)의 딸이다.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혜로웠으며, 도리를 다해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받들었다. 공보다 14년 뒤인 경자년(현종 1, 1660년)에 사망하였다. 향년 73세였다. 묘지는 공의 묘와 같은 언덕에 있고 좌향은 미향(未向 : 북동)이다.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조한영(曺漢英)은 문장이 뛰어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관직은 참판에 올랐으며 하흥군(夏興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나중에 오랑캐의 조정에서 대절을 지킨 것을 포장하여 거듭 자급이 보태졌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둘째아들 조한상(曺漢相)은 증 승지이고, 사위는 거인(擧人) 신성삼(愼聖三)과 증 참판 이후영(李後英)이다. 측실 소생의 두 딸은 병사 목림기(睦林奇)와 파흥령(坡興令) 이두첨(李斗瞻)의 첩이 되었다.
문충공 조한영은 3남 6녀를 두었다. 통덕랑 조건주(曺建周)는 요절했고, 조전주(曺殿周)는 부사이며, 조헌주(曺憲周)는 현령인데 사실상 종가로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딸들은 원정(院正) 임좌(任座), 참판 김수증(金壽增), 정랑 박내장(朴乃章), 동지(同知) 신세장(申世壯), 별검 홍석보(洪碩普), 첨지 홍만종(洪萬宗)에게 출가하였다. 조한상은 아들이 없어 조전주가 후사를 이었다. 신성삼의 후사를 이은 아들은 신수만(愼壽萬)이고 사위는 양세남(梁世男)이다. 이후영의 아들 이익성(李翼成)은 효행으로 증직되었고, 이덕성(李德成)은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가 되었다. 이후영의 사위는 임봉지(林鳳至)와 민사로(閔師魯), 진사 한세보(韓世輔)이다.
조건주의 사위는 부제학 임영(林泳)과 조명도(趙鳴道)이다. 조헌주의 아들은 조하중(曺夏重), 조하성(曺夏盛), 현감 조하망(曺夏望), 진사에 장원하고 현감이 된 조하종(曺夏鐘), 현감 조하정(曺夏挺)이다. 조하중의 아들은 조명형(曺命衡)이고 조명형의 후사를 이은 아들은 정자(正字) 조윤제(曺允濟)이다. 조하성의 아들은 조명의(曺命儀), 조명채(曺命采), 조명규(曺命揆)이고, 조하망의 아들은 조명오(曺命五), 조명백(曺命百)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조하종의 아들은 조명휘(曺命徽)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조전주의 3남은 참봉 조하언(曺夏彦), 도정(都正) 조하기(曺夏奇), 서윤(庶尹) 조하장(曺夏章)이다. 조하언의 아들은 부사 조명종(曺命宗)이고, 조명종의 아들은 조윤제의 후사를 이었다. 현감 조명재(曺命宰)의 두 아들은 어리며, 조명인(曺命寅)의 아들은 조윤적(曺允迪)이다. 조하기의 아들은 대사간 조명교(曺命敎)이고 조명교의 아들은 진사 조윤성(曺允成)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조명부(曺命敷)는 정자(正字)이고, 조명경(曺命敬)의 아들은 조윤원(曺允元)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조하장의 아들은 조명협(曺命恊)과 조명신(曺命愼)이다.
이익성의 아들은 이문도(李聞道)이고, 이덕성의 아들은 시직(侍直) 이진원(李眞源), 참판 이진순(李眞淳), 감사 이진수(李眞洙)이다. 임봉지의 후사를 이은 아들은 진사 임광언(林光彦)이고, 민사로의 아들은 민도기(閔道基), 병사 민창기(閔昌基)이며, 한세보의 아들은 한담영(韓顃穎)이다. 내외 증손 현손이 많이 있으나 다 기록하지 못했다. 명(銘)하기를,
조씨가 조선에 들어와
집현전에 비로소 이름 올리고
진퇴를 편안히 하니
자취는 미약하나 마음 밝아
오직 평안하고 환했네.
연이어 높은 자리 올라
몹시도 성하고 등등하여
단청을 환히 빛냈네.
2대에 걸쳐 덕을 쌓으니
공이 바로 태어났는데
뛰어난 재주 고상한 인품
옥결과 난초의 향기로
문원에 날아오르니
선망을 일찍이 받았네.
하늘은 항상 다하게 하여
어부는 물가에서 낚시하고
성인은 지은 것 있으며
규찬은 조정을 밝히네.
외로운 섬에서 고삐 잡고
강화 막고 싸움을 권하니
준엄한 말과 늠름한 의리
송나라의 방형과 같았네.
포위된 성에 다시 호종하고
칼 차고 군병을 독려하니
관대 벌써 바뀌었네.
관직에는 뜻이 없어
먼 동남쪽 바닷가
도구(菟裘)에 터전을 마련해
밭이랑과 함께 돌아가
영해에 떠돌고자 했는데
일이 불행하게 되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니
품은 회포 초초하여
꿈에도 산속을 헤맸네.
여론이 제자리를 찾고
하늘 길 막 형통했으니
나는 수레를 돌려
동쪽 바다에 떠돌리라
끝내 크게 펴지 못하고
수명이 또 가로막으니
오직 이 마음 있어
환히 빛나 어둡지 않네.
볼 만한 것은
저 비단 상자에 있는데
생황 소리 같은 문장
난곡처럼 높이 날고
나머지 일은 글씨인데
귀신같은 조화 놀랍네.
아들이 훌륭히 뒤이어
더욱 그 명예 높이고
잇따라 많은 손자들이
갓끈 매고 죽 늘어서니
이치는 어긋나지 않는 법
두텁게 쌓아 멀리 미치네.
옥돌에 명문 새겨
먼 후대에 보이려 하노라.
숭정기원후 두 번째 갑인년(영조 10, 1734년) 5월 일 세움.
工曹參判夏寧君雪派曹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捴管世子左賓客夏寕君行嘉義大夫工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揔府副搃管 世子左副賓客夏寧君曹公神道碑銘幷序
正憲大夫議政府右叅賛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李眞望 撰」
玄孫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 敎命教謹書」
外曾孫嘉善大夫禮曹㕘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
摠府副搃管李真淳謹篆
敦寧都正曹公間謂真望曰吾曾王考雪汀公沒已八十餘年墓道尙顯刻吾先人甞有所属而未果遂至于今今不肖老矣深恐一朝先朝露使曾王考名德無徵於後子扵吾家實有四世之舊微子疇可為此真望謝不敢而勗之不已亦惡敢終辭竊念眞望㓜則從人家屛障間見公筆勢軒翥意公為善書人也旣睹疎庵澤堂諸公序公文引重甚盛至有橫翥一時髙攀千古之語又意公為文章士也及今按状而乃知公志莭髙邁其行已立朝可紀者非一二則烏可以翰墨名焉吁其可敬也盖公以布衣當光海朝選授率府傄屬及廢母論作喟然曰彛倫歝矣尙可以祿仕為乎即日盡室歸驪江與一時遯世之士跌宕江湖放意文酒羣壬忌之遂有水上六逸之目㡬及扵禍 仁廟反正首登薦剡起家為連山縣監丁卯扈入江都以騎省郞見廟議主和奮然陳章言今日國勢有可禦之道無可和之義况無故請和兵家所戒今雖解歸後必有無窮之患此時備禦之策尤宜汲汲而廟堂束手唯和是恃臣竊痛之當彼賊犯境之日 殿下不惟不議親征乃於去邠之論又從而銳應之使三軍觧體萬姓奔波 殿下之心旣不在於禦敵故帥臣受命三日纔出碧蹄方伯閫帥或棄城啚存望風奔潰此軰苟不亟施其律臣恐紀律無自以立而威令不復行扵國中矣且引古人和為名戰為實之論亟請親征曰彼賊孤軍深入旣老倦歸而我國七路徵聚兵氣甚盛殿下若親率大衆北渡臨津則三軍之士不戰而氣自倍矣䟽入不報則慨然題詩以見志丙子之緼自田間走入南漢以御史督戰西門和旣成居常痛慨已有歛跡遐遯之意力求外得寧海踰年免遂就盈德地臨流築室爲終焉計居頃之聞公子文忠公以守義距徵兵被抅北去為面訣菖黃入城而朝議除公永興府使使供瀋獄槖饘公猶不樂旬歲棄歸及見文忠公生還喜而賦詩有従今共買一漁舟之句頋衰邁已甚又哭季子嶺外孤棲之計寢以差池甞鬱鬱不自得隐忍低囬扵散地外府未㡬而沒矣嗚呼玆數者雖其事或成或不成乃其志皎皎然自拔扵流俗波靡之中者有足起志士扵百世嗚呼怖矣公諱文秀字子實雪汀其號也曹氏望昌寧麗初平章諱欽寔為鼻祖其後八世卋其職入我 朝有諱尙治 光陵受禪以集賢副提學退終扵鄊世謂與成謹甫諸人異塗同歸二世而有右贊成昌寧君謚忠貞諱繼商判敦寧昌陽君諡忠景諱光遠勳德大顯生諱大乾僉知中樞即公王考也考諱景仁司䆃寺主簿贈吏曹叅判夏山君妣 贈貞夫人沈氏右議政守慶之女有至性通文史及有身能遵古之胎教以萬曆庚寅生公自㓜聰穎異凡甫學語從母夫人膝上受句語輙成誦不錯四五歲已能作字屬文見者許以神童夏山公奇愛之甞曰此子終必大吾門年二十始應擧取進士華聞大噪一時名勝靡不傾嚮每儒宮有事動推公為首甲子自連山擢庭試苐二名累擬淸調又以親老例移洪川未赴庚午丁内艱服已入玉堂連為修撰校理間移文學又考試湖西因前事坐罷而以西銜兼史職與修光海日記出為髙城郡守丙子秋罷歸驪江入南漢拜奉禮弼善丁丑還都拜校理及太㒒正以扈從勞加通政由禮曹叅議拜同副承㫖序至左副旋以改題列聖神位陞嘉善襲封夏寧君歷亞刑戶両曹自永興歸後至癸未敍復原封兼副捴管同義禁 世子左副賓客将入瀋以文忠公尙係瀋獄不遂往是冬以莭使始入瀋而還乙酉以工曹㕘判為左承旨未㡬病免秋留守松都丙戌入叅㑹盟陞嘉義丁亥辤居㽞還原封又兼摠府金吾冬出江原道觀察使是年十二月二十五日疾卒扵營舍訃聞賵贈弔祭如儀明秊三月葬于廣州鷗浦里先兆次坐卯之原後用文忠公寧國從勳 贈吏曹判書兩館大提學諸兼如例公資性温仁動止有儀一見人知其君子人也事親享先一扵誠敬常痛終鮮婣睦宗戚靡不至平㞐待人接物和氣藹如及至訓子弟莅官務䂓度甚嚴截然有不可犯者操履淸約無一毫營為之意無宅於都不華於服旣早負盛名釋褐而衆喜得人将以極選待之頋公介然自守無意進取未甞與世俯仰尤不喜峭刻之論迨其季年庭議益多之方且引入要路則公益自避遠所以位不大顯用不克究也識者之恨實在扵此而公之恬靖雅潔亦見扵此故關東受鉞時制誥之文有曰如玉其温若氷斯潔松栢不渝芝鳳爭瞻盖當世推許之論然也仁廟時在講幄稍久每引經傳義啓沃弘多上多屈諸說而從之前後執靮皆起自鄉廬奔走追扈故上益嘉其誠莭眷視頗異圍城督戰時得蹇澁之疾後入銀䑓上愍其蹣跚特免趋蹌異數也及卒 臨朝歎惜又至性喜山水其」
在髙城樂其地僻多勝或理屐登臨或命駕徜徉嘯咏以自娛而官無廢事民自不擾旣歸刻石頌德」
晚乃力求東臬者亦出雅好非専為屛外計也其扵文章天賦甚髙甞以為三百篇之後至唐而䂓模」
制作殆類周官之纖悉為詩者捨此無他用力旣䔍沕然自得韋孟之品王張之響一洗東人習套踈」
澤諸公之序述實在公三十歲左右時則晚秊造詣可以推知而澤堂秉文旣久甞寄公以詩且曰當」
世文事方推轂扵君而自焚筆硯逃矣其所期許者尤可見矣所著詩八卷行扵世墨妙亦得於天禀」
自成一家取喜松雪而潤色之以右軍大小楷草各臻閫奧一時名書如金南牎申東淮無不交讓一」
頭凡公私吉凶金石之題多出公手當 太廟改題也當 書者適患腕掉日且暮又失行界之紙在」
廷大窘不知所出 上頋公曰素知爾茟能不用字間而寫之乎公跪以濡翰安排不少差 上動色」
稱竒直命加階文忠公甞受公楷書唐詩一秩丙子佚其二冊及係瀋獄有遼士為俘者自言東搶時」
淂一名蹟皇明文蕫以下皆所不及公可認否文忠公見之果其佚者其人大異之請歸以直則不受而」
還之其事甚奇云公配貞夫人宗姓李氏右賛成貞簡公直彦之女聡敏慈恵事舅姑奉君子咸盡」
其道後公十四年庚子卒享年七十三墓在公墓同原向未之兆擧二南二女南長漢英有文章由魁」
科官至叅判襲封夏興君後褒虜庭大節貤秩賜諡卽文忠公也次漢相 贈承㫖二女婿擧人慎聖三 贈叅判李後英側出二女為兵使睦林竒坡興令斗瞻妾文忠三男六女通德郞建周殀殿周府使憲周縣令實尸宗祀女院正任座叅判金壽增正郞朴乃章同知申世壮別檢洪碩普僉知洪萬宗其婿也 贈承㫖無子以府使為後慎聖三繼子壽萬女婿梁世男李後英子翼成以孝 贈官德成文科監司女婿林鳳至閔師魯進士韓世輔通德二女婿副提學林泳趙鳴道縣令男夏重夏盛縣監夏望進士壮元縣監夏鐘亦縣監夏挺夏重子命衡繼子允濟正字夏盛子命儀命采命揆夏朢子命五命百餘㓜夏鐘子命徽餘幼府使三南夏彦叅奉夏竒即都正也夏章庶尹夏彦子府使命宗子允濟出後者也縣監命宰二子㓜命寅子允迪夏竒子大司諫命教子允成進士餘幼命敷正字命敬子允元餘㓜夏章子命恊命慎李翼成子聞道李德成子侍直眞源參判真淳監司真洙林鳳至繼子進士光彦閔師魯子道基兵使昌基韓世輔子頻頴内外曽玄多不能盡記銘曰
曹入熈朝集賢始名 進退雍容」
跡微心明 維寧曁陽繼登孤卿」
殊庸盛烈炳烺丹靑 再世毓」
德公乃挺生 雋才髙標玉潔蘭」
芳 頡頏文苑峻望夙彰 天常」
旣殄漁釣雲汀 聖人有作叫瓚」
明庭 執靮孤島沮媾勸征 辭」
嚴義凛若宋邦衡 再扈圍城尺」
劒蕫兵 冠屨旣易紱冕匪情」
嶺海東 南莬裘是營 疇與同」
歸指浮海寕 事有不幸計未克」
成 悁悁余懷夢繞山扄 世論」
自歸天路方亨 我則回車且泛」
東瀛 遂不大展又閼備齡 惟」
有此心烱然不冥 所可見者在」
彼縑箱 笙簧之韻鸞鵠之翔」
餘事臨池鬼變霆驚 有子趾美」
益駿厥聲 從以衆孫莘莘佩纓」
理固不爽積厚流長 銘于貞」
石眎諸茫茫」
崇禎後再甲寅五月 日立」
[출처] 조문수 신도비(曹文秀神道碑) 이진망(李眞望) 찬(撰)|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