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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3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제1독서 : 지혜 7,7-11
제2독서 : 히브 4,12-13
복 음 : 마르 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주 오래전에 본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의 일이 생각납니다.
초등부 고학년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들어오라고 하시는 분이시라고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받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아이들에게 하늘나라를 그려보라고 하였더니
꽤 많은 아이가 열린 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마치 제가 교리교육에 성공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마르10,23)라고 하십니다.
자주 눈에 띄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예수님의 선포에 들어 있는 한 측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열려 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모든 이가 그 초대에 응답하지는 못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도, 응답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 나라보다 더 앞세워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왕홀과 왕좌나 재산보다 낫게 여겼듯이,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려면 다른 모든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포기하여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우리의 집착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서 멈추게 하고, 슬퍼하며 떠나가게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친구가 많습니까? 국어사전에서 친구를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의라고 하면 친구는 정말로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위 ‘찐친’이라고 말하는 진짜 친구가 많을까요?
진짜 친구를 미국 인디언은 ‘친구란 나의 짐을 자신의 등에 진 자’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진 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짐을 진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그 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랑하고 져주려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코가 석 자’라고 자기가 진 짐이 가장 무겁고 버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 그런 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름의 무겁고 힘든 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짐만 힘들다고 외치면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다’면서 외면합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람 곁에는
역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저렇게 힘들어도 내 짐을 져주려고 하다니, 나도 도와야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찐친이 없는 이유는 ‘나’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 이기심이 찐친을 가까이 만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은 찐친의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찐친으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가 달려옵니다.
그리고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지요. 달려왔다는 것은 자신감을 뜻하고,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 외에 ‘선하신’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높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구약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는 어려서부터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왜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칭찬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이에 그 부자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돌아갑니다.
주님과 찐친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의 찐친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랑의 삶 안에서 주님과 찐친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주님과 찐친이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나의 욕심을 채워야 할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먼저 ‘참된 지혜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정 지혜를 원하고 있는가, 지혜를 찾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졌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지혜 7,7)
여기에서, 현인이 ‘기도하자’, 혹은 ‘간청을 올리자’ ‘예지’가 오고,
‘지혜의 영’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을 바라고 찾을 때 '주어졌고' '왔습니다.'
그러니 지혜는 '주어진 것'이며, '오신' 것입니다.
곧 ‘선사 된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서>의 이 말씀은 <열왕기 상권>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와 매우 흡사합니다.
주님께서 기브온에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지혜는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할 때, 곧 사랑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을 실행할 때마다’,
‘사랑을 지신을 비우고 헌신을 실천할 때마다’,
‘그분에게서 부어져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익혀지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선물’로 주어진 ‘지혜’는
시편 작가에 따르면, '꿀보다도 단'(시 119,103) 맛이지만,
동시에 히브리서 작가에 따르면,
‘살아있고 힘이 있는’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 안에서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작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이는 ‘말씀’이 참됨을 가려내는 ‘지혜의 힘이요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 눈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3)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청년과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인 어떤 사람’과,
이미 재물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도,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는 말씀과
제자들에게 하신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버리고,
그들의 마음속 생각과 속셈을 들통 내 버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따를 것인가?’라는 결단의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는
부자 청년의 질문과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르 10,26)라는 제자들의 질문 사이에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마음의 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부자 청년의 질문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제자들의 질문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고,
제자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집과 형제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아직 영생과 구원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인 어떤 사람’에게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라고 하시며,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부자 청년은 비록 율법을 지켰다 하나,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을 냉대하고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지킴이 아니라,
자기 버림과 자기 나눔을 통해서 ‘타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곧 가진 것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곧 ‘가난한 이들과 깊은 연대를 맺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곧 ‘사랑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힘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비워드려
그 지혜가 우리 살 속으로 파고들도록, 말씀의 영의 권능에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는 저는 제 뜻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입니다.
저를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달랜트를 잘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달랜트 중에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선하신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며 십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재물이 장애물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제대로 사용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따랐는데
이 청년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모두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물질에 끌려다니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면
근심할 수밖에 없고 또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6,24)고 선언하셨습니다.
한국에는 ‘졸부’가 많다고 합니다. 졸지에 부자 된 사람들입니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가 보상을 받은 사람, 복권에 당첨되어 그야말로 횡재한 사람들이 있는데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70% 이상이 실패한 삶을 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일확천금이 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화를 몰고 왔습니다.
가정파탄이 일어나고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없던 돈이 생겼으면 더 행복해야 하는데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것은 재물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과 나누지 않고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몸도 마음도 망가진 경우가 허다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물질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물질에 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 돈이 있다고 말하지만,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물질적으로 갖지 못한 것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고향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는데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두 호수는 요르단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계속 요르단강 쪽으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따라서 물이 항상 맑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계속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누어 줄 때 새로운 축복이 밀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해 물이 핏빛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비롭게도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주는 만큼 부유해집니다.
그러나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똥은 뿌려지면 거름이 되지만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쌓아 놓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먼저 많이 받고 그다음 주겠다고 생각하면 평생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아홉을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고, 열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8).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자로 사는 사람에게 명령하시오.
교만해지지 말며 믿을 수 없는 부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이르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셔서
즐기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1티모6,7-10.17)라고 말합니다.
돈으로 천국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은총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10,21)하신 말씀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당 '아나빔'통이 끊임없이 알맞게 채워지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잡아두는 것, 우리의 집착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명예, 취미나 활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족한 한 가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현명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부를 소유하는 자가 되지 말고 관리하는 사람이 되시고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시는 현명한 부자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현명한 부자가 받게 되는 상급입니다.
재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때, ‘숨은그림찾기’라는 것을 해 보았습니다.
신문에는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는 또 다른 물건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찾았던 그림들은 ‘주걱, 신발, 곰방대, 복주머니’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으면 보물을 찾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라는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 나눔, 봉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석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경쟁과 승리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 가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자녀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여보! 사랑해 우리 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오늘도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넣어 주는 아내는 각박한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높이 오르는 작은 공을 보면서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봅니다.
전태일이라는 젊은이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쏘아 올린 공이 있었습니다.
근로 기준법은 책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기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골프의 변방에 있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US 여자 오픈 우승이라는 공을 쏘아 올렸습니다.
당시 IMF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은 위로받았습니다.
많은 학생이 박세리 선수를 보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박인비, 유소연, 최나연과 같은 선수가 등장했고,
대한민국의 여자 골프는 LPGA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수녀원과 사제관 신축이라는 공을 쏘아 올렸습니다.
수녀원과 사제관이 성당 밖에 있습니다.
기존의 수녀원과 사제관을 매각하면 성당 내에 수녀원과 사제관을 신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건축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자고 합니다.
‘친교실 확장, 실내 체육관 신축, 추모관 건립’과 함께 수녀원과 사제관을 신축하자고 하였습니다.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직 3년이 남았으니, 지혜를 모으면 숨은 그림을 찾듯이,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숨은그림찾기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저는 2000년 전에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등장했던 젊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라는 공을 높이 쏘아 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농부는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보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예, 권력, 성공, 건강이라는 보물을 찾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양심을 팔기도 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친구를 배신하기도 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사람’입니다.
지금 절망하고 있는 사람,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밤을 새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진 것을 팔아 이런 보물을 찾는 사람,
이런 보물과 함께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공을 높이 쏘아 올리면 좋겠습니다.
나눔과 희생 그리고 겸손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참으로 부자가 되려면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영광 안에서 추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솔로몬은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지혜 7,8.11).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지혜 7,7).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 데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하셨다(21절).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재산 때문에 나오는 위험이다.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이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며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보인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그 보상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더욱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한다.
그 보상은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해 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참조: 히브 4,12).
하느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집착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그 말씀을 통하여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맡기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오늘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인생의 지혜로구나, 하는 확신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 먹어서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하지, 정작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영혼, 정신, 마음, 영원한 생명을 개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첫 번째 독서로 봉독 되는 지혜서는 얼마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는지 모릅니다.
지혜서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지혜 7, 8-10)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 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 9,5-6)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울증의 시작: 가질 수 있다는 착각
전삼용 요셉 신부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걸. 10파운드라고 할걸….”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우울해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이 많으면 우울해진다고 하십니다.
황창연 신부의 ‘화가 나십니까?’ 강의 중 이런 예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20년 전에 알던 분의 시동생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성탄절 전날 불법 유턴을 하다가 전경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안 했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물론 전경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희 경찰 서장이 누구야?”라고 소리쳤고, 경찰 서장의 이름을 들으니 자기 친구였고,
그걸 믿고 전경의 뺨을 강하게 쳤습니다.
그래서 전경은 그 사람을 공무집행 방해로 철창에 집어넣었고,
그 사람은 철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분을 참지 못하다가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 했을까요?
바로 명예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명예를 가졌을까요? 인간은 무언가 가질 능력이 있는 존재일까요?
조선시대 때 쓰이던 동전을 길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누군가는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명절 때 받은 돈을 어머니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맡기라고 해서 맡겼지만, 되돌려 받은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매번 그랬지만, 지금 어머니께 맡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 앞에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 아이는 슬플 일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어서 빼앗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은 자녀들과 재산,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주신 것,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도 군대에 갈 때 한 자매가 밤새 편지를 써서 출근도 안 하고 기차역까지 나왔습니다.
훈련소에 가서 시간 날 때마다 그 자매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되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갔는데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자대에 복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나가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겨울에 뜨거운 목욕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밖에 있었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집착을 끊기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군대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품이나 군대와 같은 곳에 머물려면 머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로 돈을 맡깁니다.
군대에서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나한(Tom Monaghan)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에게 돈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엄청난 부를 일궜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가진 것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고 돈을 사회와 종교에 환원합니다.
그제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 속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쁨은 십일조의 열매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던 것과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문서들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한 回想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기억하던 것과 그들이 믿던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실천하던 바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믿음이고 새로운 실천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들을 읽는 것은,
그 안에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고,
실천하던 바를 알아듣고, 우리도 올바로 믿고 실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문화적 與件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는다.”(마르 2,22)는 말씀과 같이,
시대가 다르면 신앙인의 삶의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신앙과 관련 된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문화가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옛날 사람들이 하던 실천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먼저 소개합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한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청년은 유대인으로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장래가 촉망되던 유대교바리사이파 율사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후,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으며 쓰레기로 여겼습니다.”(3,8)
오늘 복음은 그 청년이 부자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財物이 신앙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오늘 복음에 도입하기 위한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들 안에 재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여러 번 나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재물의 유혹과... 욕심이 밀고 들어오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4,19)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6,24)고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는 境地로 우리를 쉽게 몰고 갑니다.
모든 종교는 어느 수준의 無所有를 권장합니다.
재물이 발산하는 현란한 빛은 인간을 쉽게 무분별하게 만듭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사람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으로 혹은 값비싼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되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 보잘것없는 인간임을 자백하는 것이라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이에게 가진 것 모두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자는 ‘바늘 귀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이 구원받을 수 없고,
어느 수준 이학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복음을 권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이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4,11-13)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재물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
혹은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이 힘을 주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택한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때때로 하느님 앞에 눈감고 앉아서 반성해 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도록 삶의 軌道를 수정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청년은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고칩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선하십니다.
우리 안에도 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서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고,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말하는
길거리 선교사들이 알리는 하느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말도 선하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잃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보여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이를 찾아보는 선한 실천들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시오.”(마태 5,16)
라는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다는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