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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제1독서 : 갈라 4,22-24.26-27.31─5,1
복 음 : 루카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보면 이 사람들이 믿을까요?
표징이라는 낱말을 보면서 몇몇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12,37).
사람들은 표징을 청하지만, 표징을 보고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표징이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시지만 그는 청하지 않습니다(7,10-12 참조).
그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표징이 주어지면 그 표징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여야 하기에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험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을 때는 자신의 불신을 감추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시]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표징을 청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라는 하나의 표징이 던져졌고,
이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지만
어쩌면 그 세대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았던 이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험을 치른 세대입니다.
이날 저 날 미룰 수도 없이,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표징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 표징은 나의 믿음을 확인시켜 줍니까, 아니면 나의 불신을 드러나게 합니까?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집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립니다.
“네, 들어오세요.”라고 말하자,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사무실 컴퓨터가 이상해요.
직원이 없어서 신부님께 물어보러 왔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컴퓨터를 켜니 익숙한 윈도우 화면이 아닌
파란색 화면에 알 수 없는 영어가 가득 채워 있다는 것입니다.
얼른 가서 보니 CMOS 설정이 켜져 있습니다.
이 설정은 주로 컴퓨터의 시스템 시간, 날짜, 하드웨어 구성 정보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며,
시스템 부팅 시 하드웨어를 인식하고 초기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마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 뒤에 키보드를 꺼내면서
실수로 CMOS 설정으로 들어가는 F2 키를 누르신 것 같습니다.
간단히 ESC 키를 누르고 yes 버튼을 누르면 해결되는 것이지만,
이 자매님께서는 처음 보는 화면이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저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1983년부터 컴퓨터를 만져본 저로서는 이 CMOS 설정이 너무나 익숙했고,
그래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익숙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으면 두려움부터 몰려옵니다. 온갖 부정적 생각이 함께하게 됩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알아서 익숙한 사람은 자기 삶 안에서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모르고 그래서 익숙하지 않으면 불안과 걱정 등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잘 알도록 만드는 기도가 중요하고,
더불어 주님을 알기 위해 성경 읽기를 비롯한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삶 안에서 특별한 상황은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냥 포기하고 좌절하는 무기력한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힘차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알아야 하고, 익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구원의 길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표징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표징만을 추구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 자비를 알아들었기에 이방인이었던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말에 모두 회개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구원은 계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표징을 보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고 있나요?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님께 익숙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 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말하실 뿐입니다.
곧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다는 것과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
곧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표징으로 말씀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 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우물을 알려주면 물을 퍼마시는 것은 그의 몫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어떤 일을 하든지 기쁘게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줄리아르 성녀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 세대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 시켜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때, 저는 두 가지의 동화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미운 오리 새끼’이고, 다른 하나는 ‘병아리와 함께 자라는 독수리’입니다.
두 이야기의 동기는 비슷합니다.
원래 백조인데 오리들 틈에서 자라는 미운 오리 새끼와
원래 독수리인데 병아리들 틈에서 자라는 독수리의 이야기입니다.
어찌하다 보니 백조의 알이 오리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백조는 생긴 모습이 오리와 다르니 오리 사이에서는 미운 오리 새끼로 불리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는 백조들을 보았습니다.
물가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백조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가 같은 백조들과 함께 호수에서 지내게 됩니다.
오리들이 볼 때는 미운 오리 새끼였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지냈던 독수리도 비슷합니다.
어찌하다 보니 독수리의 알이 병아리의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를 보면 숨어야 했습니다. 독수리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자기의 모습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두려움에 떨고, 숨어야 했던 독수리는 다른 독수리들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가 읽었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별과 구름을 만드셨습니다. 땅과 물과 숲을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물과 땅을 다니는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호수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백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이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독수리입니다.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유혹과 죄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였을 겁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과 재물로 치장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보였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 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 악할까!
조욱현 토마 신부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해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경 등
우리는 하고자 하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다.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주님 경외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나가 살던 시대,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동서로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까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 북경이나 런던 정도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던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 본들 뭐 하겠어? 귀 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
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나갔던 대도시 니느베는 기원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 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
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 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사이비: 거짓말이 만드는 인간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악하다고 하십니다.
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이 악할까요?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든가 하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새벽에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상에서 이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술 취해서 헛것을 본 거야!’라고 생각하며 내려왔습니다.
이때 느꼈던 게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그 이유를 표징이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표징까지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행복’이라는 모토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결혼을 생각했다가 이제 ‘하.사.시.’를 읽고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더 큰 행복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표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행복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마음에
저절로 지적인 호기심이 누구보다 컸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이는 그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던 중 ‘하.사.시.’를 만나게 되었고 참 행복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참 행복의 지혜가 표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로 완벽히 결심하게 만든 책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었습니다.
주님은 표징보다는 참 행복의 길로 이끄는 방법으로 지혜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마음 안에는 믿지 않는 합리화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징으로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지혜가 오히려 마음을 바꿉니다.
사실 표징은 내가 지혜로 마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 때 나중에 보여주십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예수님 시대에 하느님을 믿던 이들도 다 신앙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다가오기는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지혜가 예수님께로 이끄는데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니네베 사람과 남방 여왕의 예를 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그
분에게 표징을 요구한다는 말 자체가 그분을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을 ‘사이비’라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신앙인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 뜻을 따를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이비를 만드는 이들이나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지혜를 원치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거짓말’에 있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할 때는 제페토 할아버지의 지혜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신천지는 어떻습니까?
포교를 하는데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열매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TV 뉴스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정보의 유입이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합니다.
거기에는 마치 표징과 같은 놀라움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필요한 부분만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짜맞춰서 가르치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속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지혜를 찾기를 원치 않는 사이비에 적합화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사이비들에게 적용됩니다.
광주 대교구 최창무 주교님이 나주 율리아의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임을 교령으로 반포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를 제가 처음 접했을 땐 저도 매우 신기했었습니다.
성체가 입안에서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를 통해 보았을 땐 정말 믿음이 더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진 것은
자신이 쥐고 있던 제병을 던진 것이라는 증언과 자료를 보고
또 입에서 성체가 피로 변하는 것은
입안에 나 있는 상처를 터뜨려 피가 나오게 했다는 것을 들었고,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것도 그녀가 묵고 간 곳에서
향수병이 발견됨으로써 거짓이었다는 것 등을 듣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특히나 그녀가 미장원을 할 때부터 많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또 그녀의 오줌을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 등을 보았을 때는
그런 것들에 광신적으로 빠져 있는 신자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이비에는 항상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수원 교구에서도 최덕기 주교님께서
미리내 상주 데레사의 모든 것들도 거짓임을 교령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도 수녀님들에 의해
그 계시 받아 그린 그림들을 보고 글을 읽어보며 신기해했었습니다.
역시나 그런 것들로 믿음이 커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며 그때 보았던 많은 것들이 신학적으로 오류가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들이 마귀에게 속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리내 중앙에 있는 삼위일체상도 계시를 통해 보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간단히만 말하면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양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은 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고 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무엇에 제약받으신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또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영(靈)이시고 (요한 4,24)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이가 없다고 하고 (요한 1,18: 6,46)
교회의 가르침도 아버지는 볼 수 없는 분이라고 가르치는데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려는 것이고
하느님을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이비가 점점 강하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지혜가 아닌 표징만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표징만 요구하는 세대가 된 이유는 거짓말을 허용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도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가집니다.
사이비 새진리회는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 맞서는 이들은 지혜로 하나하나 설명하려 듭니다.
둘은 적대관계가 되어 서로 싸웁니다.
제가 오랜만에 본당에 왔을 때 정말 놀랐던 것은
성경, 그리고 기도서나 성가책을 제외하고는 성물방에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이유는 당시 성물방 책장에는 엄청난 책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지혜를 찾지 않게 된 이 세상은
이제 사이비가 만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말합니다.
“독서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십시오.”
조건부의 믿음은 강요된 믿음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군중이 계속 모여들자, 예수께서 이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시고,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 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29절)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한다는 근거는 좀더 앞서간 구절에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벙어리 구마기적을 두고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늘ㅇ서 오는 기적을 보여달라.’(11,16)고 요구한 사실을
지나간 시점에서 다시금 논제로 삼으신 것이다.
즉 기적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갑자기 끼어든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 찬사(11,27-28) 때문에 무시되는가 했더니,
예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다시 擧論하셨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믿음의 조건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모든 조건부의 표징이나 기적은 거절하신다.
오히려 조건부의 표징 요구를 믿음으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不信의 태도로 간주하시면서 이들에 대한 단죄와 심판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하자면, “기적을 보고 믿겠다”는 주장은
“기적 없이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태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에 조건이 따를 수 없다.
그것은 믿음이 자유의지에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을 위한 조건으로 기적이 주어지고, 그 기적을 보고 난 뒤에 믿음을 가진다면
이 믿음은 자유의지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밝혀진 사실에 대한 수긍과 인정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을뿐더러 강요된 믿음으로서
주관성을 상실한 객관적 차원의 사실 확인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따로 보여 주시려는 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과거의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실(1열왕 10,1-13; 2역대 9,1-12)이고,
다른 하나는 죄악에 빠진 니느웨의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왕을 비롯한 전 시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단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거두신 일(요나 2,1-11; 3,1-10)이다.
여기서 세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들로서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 야훼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조를 이룬다.
예수께서는 지혜를 찾으며,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심판 날에 이스라엘의 불신하는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복음의 요지는 예수님 자신이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며,
예수님의 지혜와 가르침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물론 요나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 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 뭍으로 다시 나온 기적(요나 2,1-11)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기적이 될 것이지만,
군중은 아무도 이를 예상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가서나 심판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과 ‘여기’이다.
따라서 솔로몬과 요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군중 앞에 계시는
예수께 대한 선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를 선택하지 않는 행동 자체가 곧 불신이요, 심판이다.
그리고 조건부의 믿음은 결국 강요된 믿음일 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