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삼태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자유소통광장 스크랩 기타  *아랍인의 "동방의 이상향 신라"
희작 추천 0 조회 256 12.02.04 23:27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2.02.05 01:36

    첫댓글 이슬람 역사에서 위대한 지리학자로 꼽히는 알 이드리시가 세계 각국을 여행할 때마다 책을 저술했다. 이드리시는 세계지도(1장)와 세부지도(70개)에서 ‘씰라’를 4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로 표시했다. 신라에 대한 설명에서는 ‘중국 동쪽에 있는 신라(당나라의 힘을 빌어 남삼한을 통합하고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청해진-완도에 세운 후기신라시대)라는 나라는 매우 풍요하고 살기 좋은 나라다. 황금이 풍부해 심지어 개도 금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곳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지나 동해안지역의 백제담로는 신라방으로 이름이 바뀐 시기다.신라를 4개 섬으로 기록한 내용은 중국 동쪽의 섬들로 구성된 월주백제라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타당

  • 12.02.05 01:20

    신라가 아라비아까지 알려지게 되는 이유는 아시아 해상무역을 독점했던 백제의 유민 장보고의 청해진때문이다.해오장보고 선단은 직접 무역뿐 아니라 외국 상품을 그대로 제3국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부를 축적했다. 이 때문에 당시 신라 거리에는 서역 물품이 넘쳐났다. 신라 흥덕왕이 수입 사치품을 쓰지 말도록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평민도 외래 물품을 즐길 정도로 신라는 무역으로 부유해졌던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장보고 선단의 상대를 가리지 않는 거래였다.

  • 12.02.05 01:23

    장보고 선단은 아라비아나 동남아시아 상인과도 거래를 했다.장보고는 국제적인 해상 교역가답게 다양한 품목을 취급했다. 페르시아·아라비아의 향료·카펫·유리 제품까지 거래했다. 해외 교류 품목의 판로 개척을 위해 봇짐 장사법을 도입하고 5일, 7일 장과 같은 재래시장을 활용하기도 했다.장보고는 새로운 영역을 기획해 선점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열린 마음, 외부 확장형 성향, 다양성이 무역의 성공을 이끌었다. 그가 한국 최초의 ‘글로벌 종합상사 최고경영자’로 평가 받는 이유다. 우리 민족이 경제부국과 인류중심국가가 되려면 고구려나 백제처럼 대륙과 바다를 통한 교류협력노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12.02.05 01:24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허락했던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흥덕왕의 사촌 동생인 상대등 김균정과 흥덕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이 싸움에서 김균정이 죽고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김우징은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시중으로 있었던 인물로, 그때의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권력 다툼을 피해 몸을 맡길 만큼 장보고의 청해진은 독립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 12.02.05 01:26

    838년 청해진의 군사가 왕경에 이르렀다. 장보고는 근거지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5천 명의 군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정년이었다. 왕경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중앙군은 청해진 군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청해진군은 도망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군사 쿠데타였다.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이끄는 군대가 신라의 왕을 바꾼 것이다.

  • 12.02.05 01:26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쯤 지나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또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부탁하며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가, 왕위에 오른 김우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다고도 전하다.

  • 12.02.05 01:26

    어쨌든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이후 그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군사행동을 일으킨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는 바 없다. 실제 반란을 일으켰든 그렇지 않든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접근한 염장은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였다. [삼국사기]는 장보고가 846년에 죽었다고 전하지만, 엔닌의 기록에 따르면 841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 12.02.05 01:30

    장보고의 허망한 죽음 뒤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염장이 진압했고, 청해진은 염장의 통제 아래 놓였다. 장보고의 심복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고 계속되는 완도 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851년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청해진이 가지는 의의는 폐쇄주의를 무너 뜨리고 개방주의에 의한 세계화를 이룬 초석 (신라귀족들의 정치 미숙으로 청해진이 폐쇄됨으로써 조선시대까지 폐쇄주의 정책은 유지됨)이 되었다는 것이다.어쨋든 장보고의 도움을 받고 왕에 오른 김우징과 신라 왕족들이 양아치들스럽게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용당하고 비참하게 죽었으나,해상왕국 백제유민답게 우리 민족사에서 해상왕으로 기록되었다.

  • 12.02.05 07:59

    역사를 미화하는것만이 애국자 인양 떠벌리는것은 자네가 고구려의 정신을 말하면서 분파주의자로 활약하고 있는 행위와 같은것입니다.

  • 12.02.05 08:03

    이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경주지역 말 하는것 같은데 그리고 우수한 문화민족 그때 당시에 화장실이 있었다 숯으로 난방 했다 온돌이 아니네 그럼 온돌과 숯의 난방은 아마도 그때 당시의 지역구도 알게 해 주는 자료 이네요 온돌은 고정적이이고 숯은 이동식인데 개줄도 금으로 되어다 아마도 경제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그럼 뛰어난 경제력의 원천 기술은 철 가공술? 해상무역?

  • 12.02.05 12:08

    경주는 대륙에서 지명이동된 지명으로 보통 행정구역이 주군현으로 크기가 정해진다 하면 경주는 일개 도시가 아닌 지금의 도보다 더큰 중국으로 치면 산동성 하남성 등 성의 개념으로 경상도 경주는 이름만 경주에 불과한 것을 이조와 왜놈과 식민사관 옹호론자들이 계속 경상도 경주라고 쇄뇌를 강요하는 것이지요 1000년 수도 경주에 왕궁이 어디 있고 왕릉이 어디 있나? 절대 조작이고 절대왜곡임을 알아야 참역사가 살아납니다!!!

  • 12.02.05 13:49

    경주란 지명은 후대에 붙여졌고... 당시는 서라벌입니다... 경상도 경주가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신라 제55대 왕 경애왕의 후손인 박씨들과... 56대 왕 경순왕의 후손인 김씨들이... 동시대에 경주에서 함께 살게 된 연유도 밝혀야 합니다... 그들의 경주가 경상도 경주가 아니고 중원 어딘가에 존재한 경주라면... 왕족들인 그들이 고항을 버리고 반도 동쪽 끝자락으로... 이주한 이유와 경로가 있겠지요.

  • 12.02.06 06:40

    이씨 조선의 경우도 같습니다...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려면... 이성계의 후손들을 관리하던 관청인 종친부가 중국에 있지않고 한국에 있었던 이유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