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배 띄워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로 가자”
<참고> 같은 시대, 고구려인-백제인-신라인-일본인(왜인)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가 돌아가 쓴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안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 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아닌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하여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한마디로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이나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에 있는데, 그 하나는 서방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대서양 상의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동방의 신라다. 그러나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인데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로서 경작지와 과수원이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틀란티스는 전설 속의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면, 신라는 속세의 살아숨쉬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동경과 선망은 신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지견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 쇠사슬도 금붙이인 나라”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섬과 산이 많은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한 지리서가 지적한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 오던 종래의 그리스-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다. 그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렇게 신라의 위치나 지형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연환경에 관해서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그들에게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소기의 안주처일 수밖에 없었다
. 그들은 한결같이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만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있는 신라의 황금상이다.
비단·담비가죽·계피등 풍부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심정에서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과 쾌적한 환경을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까즈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 알라만이 시혜자이다.” 그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새 치유되겠는가 하는 극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에 훈육된 사람답게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린다.
그런가 하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한 무모한 일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무구무병한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이나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 품고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바닷길 통해 물산 교류
그밖에 신라인들의 종족적 기원이나 신라의 대외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기술에서도 눈길을 끄는 여러 대목이 있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인들이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신라와 중국(당나라)간의 관계는 모화사상이나 사대주의에 바탕한 조공관계가 기본이었다는 통념에 반해, 양국간에는 상호성에 입각한 선물교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술은 양국관계의 다른 한 측면을 음미해 보게 한다. 서로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천벌로 가믐이 들게 한다는 것은 천리를 빌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방의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신라에서 나는 물산이 아랍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검(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 물품(그밖에 몇 가지는 확인 안됨)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비단이나 검, 오지그릇이 국제무역품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일이다.
‘은둔의 나라’는 왜곡된 시각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까지 던져졌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쳐지면 참 역사가 난도질 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신라 서라벌에는 약 17만호의 가구가 있었다. 이는 대략 90만-1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훗날 조선의 한양보다 4-5배나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혹자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서라벌을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꼽는다.
인구가 많다고 세계적 도시로 꼽는 것이 아니다. 신라, 특히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이 모두가 기왓집이었다. 온통 금으로 뒤덮은 집도 수십채나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라는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잘 정비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 옆에 마차가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퀴 자국에 맞춘 도로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옆으로는 배수구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우선 서민층 거주 지의 경우, 집집마다 우물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서민층에서도 각 집마다 우물을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면, 당시의 서라벌이 얼마나 위생이 청결한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숯으로 난방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숯 가마가 발견되기도 했다. 숯으로 난방을 할 경우,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을 것이다. 상류층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본채 건물 외에도 별채와 화장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였던 서라벌은 마치 바둑판과도 같은 형태로 도시 주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으로 나뉘어지는 이러한 거주 구역은 한 방당 약 8천평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다. 그래서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을 찾는 일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인구조사 또한 치밀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구당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년 전의 도시가 오히려 지금의 대도시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그 여유로운 상태에 만족했고, … '삶의 질'이나 높일 것이지 왜 피 흘려가며 전쟁을 해야하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인들은 정복이나 전쟁에 대한 야욕이 적은 편이었다. … 자기들의 피해를 감내하면서 까지 정복 국가가 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좋은 땅과 좋은 기후, 부유함 … 자연스레 신라는 고도의 문명과 문화 수준이 장점이 된다. 반대의 상황이었던 고구려는 신라와 달리 많은 정복전을 거치며 영토가 넓어지고, 군사력이 장점이 된다. 그렇게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특징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 우리 역사의 찬란한 문화는 신라의 문명을 기반으로 하여 나온 것이다.
(신라는 로마와도 교역하였다.)
21세기를 관통하는 치장술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의 서역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하였다.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 진골은 타고 다니는 수레에, 육두품에서 백성까지는 가마와 침상에 향료인 동남아시아산 자단과 서아시아산 침향 … 아랍산 유향도 있다.
진골녀의 빗과 관을, 육두품녀의 빗을 슬슬로 꾸미는 것 … 슬슬은 투명하고 푸른색의 진귀한 보석이다. … 보석에 대한 신라인들의 소유욕과 애착심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준다. … 서역산 고급모직 옷감인 ‘계’는 여인들의 바지나 버선, 신, 목수건, 옷고름에 장식 …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에서 나는 공작새 꼬리 … 비취새 털을 목수건 같은 장신구에 … 신라인들의 사치성이 엿보인다.
신라의 남자들은 나이와 신분에 상관없이 향낭(향기 주머니)을 차고 다녔다. 종교행사나 제사 때 향료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기도나 맹세를 할 때, 그리고 부부가 함께 침실에 들 때도 향료를 사용했다. … 향료는 향기가 진한 식물을 그늘에서 말린 후 가루로 만들거나, 향나무 조각, 사향노루 같은 동물의 향료 주머니 등으로 만들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 향료를 옷고름이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첫댓글 이슬람 역사에서 위대한 지리학자로 꼽히는 알 이드리시가 세계 각국을 여행할 때마다 책을 저술했다. 이드리시는 세계지도(1장)와 세부지도(70개)에서 ‘씰라’를 4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로 표시했다. 신라에 대한 설명에서는 ‘중국 동쪽에 있는 신라(당나라의 힘을 빌어 남삼한을 통합하고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청해진-완도에 세운 후기신라시대)라는 나라는 매우 풍요하고 살기 좋은 나라다. 황금이 풍부해 심지어 개도 금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곳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지나 동해안지역의 백제담로는 신라방으로 이름이 바뀐 시기다.신라를 4개 섬으로 기록한 내용은 중국 동쪽의 섬들로 구성된 월주백제라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타당
신라가 아라비아까지 알려지게 되는 이유는 아시아 해상무역을 독점했던 백제의 유민 장보고의 청해진때문이다.해오장보고 선단은 직접 무역뿐 아니라 외국 상품을 그대로 제3국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부를 축적했다. 이 때문에 당시 신라 거리에는 서역 물품이 넘쳐났다. 신라 흥덕왕이 수입 사치품을 쓰지 말도록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평민도 외래 물품을 즐길 정도로 신라는 무역으로 부유해졌던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장보고 선단의 상대를 가리지 않는 거래였다.
장보고 선단은 아라비아나 동남아시아 상인과도 거래를 했다.장보고는 국제적인 해상 교역가답게 다양한 품목을 취급했다. 페르시아·아라비아의 향료·카펫·유리 제품까지 거래했다. 해외 교류 품목의 판로 개척을 위해 봇짐 장사법을 도입하고 5일, 7일 장과 같은 재래시장을 활용하기도 했다.장보고는 새로운 영역을 기획해 선점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열린 마음, 외부 확장형 성향, 다양성이 무역의 성공을 이끌었다. 그가 한국 최초의 ‘글로벌 종합상사 최고경영자’로 평가 받는 이유다. 우리 민족이 경제부국과 인류중심국가가 되려면 고구려나 백제처럼 대륙과 바다를 통한 교류협력노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허락했던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흥덕왕의 사촌 동생인 상대등 김균정과 흥덕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이 싸움에서 김균정이 죽고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김우징은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시중으로 있었던 인물로, 그때의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권력 다툼을 피해 몸을 맡길 만큼 장보고의 청해진은 독립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838년 청해진의 군사가 왕경에 이르렀다. 장보고는 근거지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5천 명의 군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정년이었다. 왕경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중앙군은 청해진 군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청해진군은 도망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군사 쿠데타였다.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이끄는 군대가 신라의 왕을 바꾼 것이다.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쯤 지나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또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부탁하며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가, 왕위에 오른 김우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다고도 전하다.
어쨌든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이후 그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군사행동을 일으킨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는 바 없다. 실제 반란을 일으켰든 그렇지 않든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접근한 염장은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였다. [삼국사기]는 장보고가 846년에 죽었다고 전하지만, 엔닌의 기록에 따르면 841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허망한 죽음 뒤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염장이 진압했고, 청해진은 염장의 통제 아래 놓였다. 장보고의 심복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고 계속되는 완도 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851년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청해진이 가지는 의의는 폐쇄주의를 무너 뜨리고 개방주의에 의한 세계화를 이룬 초석 (신라귀족들의 정치 미숙으로 청해진이 폐쇄됨으로써 조선시대까지 폐쇄주의 정책은 유지됨)이 되었다는 것이다.어쨋든 장보고의 도움을 받고 왕에 오른 김우징과 신라 왕족들이 양아치들스럽게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용당하고 비참하게 죽었으나,해상왕국 백제유민답게 우리 민족사에서 해상왕으로 기록되었다.
역사를 미화하는것만이 애국자 인양 떠벌리는것은 자네가 고구려의 정신을 말하면서 분파주의자로 활약하고 있는 행위와 같은것입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경주지역 말 하는것 같은데 그리고 우수한 문화민족 그때 당시에 화장실이 있었다 숯으로 난방 했다 온돌이 아니네 그럼 온돌과 숯의 난방은 아마도 그때 당시의 지역구도 알게 해 주는 자료 이네요 온돌은 고정적이이고 숯은 이동식인데 개줄도 금으로 되어다 아마도 경제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그럼 뛰어난 경제력의 원천 기술은 철 가공술? 해상무역?
경주는 대륙에서 지명이동된 지명으로 보통 행정구역이 주군현으로 크기가 정해진다 하면 경주는 일개 도시가 아닌 지금의 도보다 더큰 중국으로 치면 산동성 하남성 등 성의 개념으로 경상도 경주는 이름만 경주에 불과한 것을 이조와 왜놈과 식민사관 옹호론자들이 계속 경상도 경주라고 쇄뇌를 강요하는 것이지요 1000년 수도 경주에 왕궁이 어디 있고 왕릉이 어디 있나? 절대 조작이고 절대왜곡임을 알아야 참역사가 살아납니다!!!
경주란 지명은 후대에 붙여졌고... 당시는 서라벌입니다... 경상도 경주가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신라 제55대 왕 경애왕의 후손인 박씨들과... 56대 왕 경순왕의 후손인 김씨들이... 동시대에 경주에서 함께 살게 된 연유도 밝혀야 합니다... 그들의 경주가 경상도 경주가 아니고 중원 어딘가에 존재한 경주라면... 왕족들인 그들이 고항을 버리고 반도 동쪽 끝자락으로... 이주한 이유와 경로가 있겠지요.
이씨 조선의 경우도 같습니다...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려면... 이성계의 후손들을 관리하던 관청인 종친부가 중국에 있지않고 한국에 있었던 이유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