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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 갈라 5,18-25
복 음 : 루카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결코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결코, 쉽지도 않다는 것이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어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기 육[이나] 그 욕정과 욕망”(갈라 5,24)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길로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직 해방되지 않았고 아직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불륜이나 방탕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면, 적개심이나 시기가 일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기심을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율법에 매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방종한 상태에 있을 뿐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없거나, 어떤 상황 때문에 기뻐할 수 없거나,
다른 무엇 때문에 평화를 잃는다면 아직도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 육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성령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5,22)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자리하시면 이러한 열매들이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답송에서 말하듯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을 압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이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지만, 한때 이것에 민감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학창 시절, 이성에 관한 관심이 생기면서
남들 하는 것을 나도 따라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유행’입니다.
요즘에도 사람들은 유형을 따릅니다.
그런데 요즘의 유행은 예전과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경제 잡지 ‘브랜드 아인스’는 소비 상품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거창하게 떠벌리는 것은 유행이 지났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가치 있다고 간주 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는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랜드의 로고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 않거나 아예 없는 것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이었다면,
이제 눈에 띌 듯 말 듯한 소박하고 간결한 것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전에는 자기 PR이 중요하다면서 자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제는 나서지 않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성실한 사람이 인기라고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겸손을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은 엄청나게 시대를 앞서간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의 유행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 겸손이라는 ‘유행’은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윗자리에 앉아 인사받기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형식주의와 섬김보다 명예를 우선시하는 그들의 태도를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를 향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짐을 지울 줄만 알고
정작 자기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면서 꾸짖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의 자리 자체에 대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 것을 겉으로 보이기에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열심’이 아닌, 보이기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의 삶을 살지 못했기에 그들은 결국 주님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런 말을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 중 어떤 사람이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범위는 이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보이기 위한 열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주님 마음에 드는 보이지 않는 열심을 따라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여섯 가지 ‘불행 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 준수를 부정하거나 율법 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 된 율법 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 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열성은 좋지만,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어야 합니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사람들이 그들에게 윗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의식과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김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일 간 부정하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마치 표시하지 않은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마치 선인 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된 선일 것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율법 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 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마태 23,3).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속에서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도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뜻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꾸중을 감당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3,19).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6) 라는 예수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중하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달게 받아들이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사필귀정(事必歸正)’도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어둠이 빛을 가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모든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을 차갑게 만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을 뜨겁게 만들어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주변을 보면 활활 타오르는 불을 꺼버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불행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재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궁핍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건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몸이 아프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외로우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돕지 않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잘난 척하고, 교만한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불을 꺼버리려는 사람입니다.
주변을 보면 꺼져가는 불도 다시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이유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재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건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할지라도, 굶주릴지라도,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불을 뜨겁게 살리는 사람입니다.
‘花無十日紅이고 權不十年’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곧 사라지고 마는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돈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등한시하기도 하고, 권력 때문에 우정을 팔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蘭香千里 德香萬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난의 향기는 멀리 가야 천리이지만 사람의 덕은 만리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희생, 사랑, 나눔, 봉사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 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조욱현 토마 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주님은 또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도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작 필요한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래전부터 유다인들이 목숨 걸고 준수해오던 정결예식,
사실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거쳐오면서 감염병 예방을 위해 손을 잘 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정결 예식은
얼마나 극단적 형식주의로 치달았던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결 예식은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특히 자칭 거룩한 존재로 여겼던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을 다녀오면 죄인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집단 세심증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모습 앞에
율법의 주인이자 자유로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합니다.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던 정결례를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파기하십니다.
보란 듯이 손도 안 씻고 그냥 음식을 드십니다.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될 나병 환자의 손을 서슴없이 잡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정결은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 안에서도 작은 정결 예식의 순간이 있습니다.
입당 후 곧바로 이어지는 참회 예식의 순간,
‘제 탓이요.’를 세 번씩이나 외치는 그 순간이 어찌 보면 작은 정결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기 전,
사제는 복사가 가져다주는 물그릇에 손을 담그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작은 정결 예식을 행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돌아보니 정말이지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손 씻는 예식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가 제 삶 안에서
의식화되고 성취되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손 씻을 때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겠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이 미사 안에 재현되는 파스카 신비를
제 삶 안에서 구체화시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미사 때마다 어제의 나를 죄와 종살이의 땅 이집트에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홍해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이자 구원의 땅 새로운 이스라엘로 넘어와야겠습니다.
기도나 묵상, 로사기오 기도나 각종 전례 행위 등
영적 의무를 실천하는 기회 때마다 매일 회개하고 순간순간 새로워져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끝없이 거듭나야겠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위선과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11,46)
인생의 복福도 그리고 화禍도 다 하늘이 내리며, 福 담을 그릇에는 복이 담기고,
禍 담을 그릇에는 화가 담기기 마련이라고 봅니다.
명심보감의 「성유심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운 표현이 있습니다.
『복福 담을 그릇과 화禍 담길 그릇이 뚜렷이 대비됩니다.
맑고 검소한 그릇에 복이 담기고, 스스로를 낮추어 한발 물러서면 덕을 쌓습니다.
부글거리거나 출렁거리지 않는 고요하고 안정된 눈에 가야 할 길이 보이고
화목하고 따뜻한 곳에 생명이 자랍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화를 당합니다.
경솔하고 거만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옹졸하고 어질지 못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복과 화, 죽음과 생명, 불행과 행복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그릇에 각기 다른 결실을 담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화를 선택하느냐,
죽음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생명을 선택하느냐 하는 그 사이에서
인간 실존과 생애가 전개된다고 봅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저 역시도 때론 함께 사는 형제들을 꾸중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꾸중을 듣는 형제의 마음은 많이 불편했겠죠.
저도 역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불편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호되게 바리사이들의 여러 처신에 대해서
꾸중하시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차례나 공개적으로 “불행하여라!”(11,42.43.44)라고,
꾸중을 듣는 바라사이들은 여간 불편하고 힘들었겠죠.
하지만 꾸중하는 사람이 있고, 그 꾸중에 안타까운 마음이 내포되어 있음을 안다면
이는 마치 몸에 좋은 약은 쓴 것처럼 좋은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꾸중을 듣고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면
불행이 아닌 참으로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꾸중하지는 않습니다. 잠언에 보면,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3,12)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꾸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불편했지만, 그들이 마음을 바꿔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진심어린 꾸중이며 권고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아니꼽게 여겼고 트집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당에서는 윗자리에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줄 모르기 때문이다.”(11,42.43.44)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첫째, 바리사이들은 십일조의 규정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정작, 율법의 핵심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본질인 율법의 정신이 빠진 규정에만 얽매였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도록 일깨우신 것입니다.
둘째로, 바리사이들은 언제나 몸에 밴 특권의식으로 남보다 더 높은 자리와
어디서나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은 과시욕이 강함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당신이 몸소 실천하셨던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도록 권고하시고
그렇게 사셨으며,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삶을 살도록 질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바리사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위선,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처신을 꾸중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에게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11,46)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론 바리사이들의 처신도 마땅히 꾸중 받을 태도와 행위이지만,
율법 교사들의 행위가 더 질타와 질책을 받을 행위라고 봅니다.
바리사이들의 그런 행위가 상대적으로 타인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들의 행위는 타인에게 많은 어려움과 피해를
그리고 삶의 질을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의 사랑어린 꾸중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변화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꾸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사실 불편하지만, 행복한 일입니다.
꾸짖거든 말하는 이의 진심과 사랑을 되새기면서,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12,15)
이런 점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의 불행은 삶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처신이었지만,
더 큰 불행은 예수님의 충고를 그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음에 있습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사랑만이 율법의 정신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정결예식의 참뜻을 내세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자선과 봉사로 마음부터 정결케 할 것을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불행 선언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을 통하여 언급하였듯이 마태오 복음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함께 묶어 그들에 대한 7번의 불행을 선언한다.(마태 23,13-32)
불행을 선언 받는 자세한 이유를 보자.
①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다.(13절)
② 갖은 노력으로 한 사람을 개종시켜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15절)
③ 성전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나 황금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16,22절)
④ 십일조 율법은 철저하게 지키면서 정작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소홀히 한다.(23-24절)
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25-26절)
⑥ 겉으로는 옳은 듯 하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27-28절)
⑦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며놓고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29-32절)
루카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 셋과 율사들에 대한 불행 선언 셋을 보도하고 있다.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불행선언의 이유는
① 십일조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42절)
②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ㅑ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43절)
③ 사람들이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무덤과 같다.(44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지는 불행선언의 이유는
① 남에게는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46절)
②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47-51절)
③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는다(52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 불행선언과
율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 선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 당대에 모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통상 율사들은 바리사이들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이를
양심적이고 전적으로 따르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이라면 마지막 가장 사소하고 작은 것까지도 지키도록 요구하였고,
자신들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과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한 참다운 정의와 사랑, 즉 하느님 스스로가 율법을 떠나버리신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율법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 빈 껍데기와 같은 율법에 신의를 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율법과 사랑을 대립시키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빈 껍데기 율법에 다시금 사랑과 정의를,
즉 하느님 스스로를 채워주시려 하신 것이다.
사랑만이 율법의 참 정신이며, 사랑의 실천만이 율법을 완성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