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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 목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에페 1,1-10
복 음 : 루카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마침 오늘 복음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겪을 박해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어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의 편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오늘의 영성체송인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다.
짐승들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깨끗한 빵이 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순교하러 로마로 가는 길에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며,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는 죽음을 새로운 탄생으로 생각하여, 순교를 출산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그는 순교가 성찬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습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자신이 맹수의 먹이가 될 때 그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밀알로서 맹수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깨끗한 빵”은 제물로 바쳐지는 빵을 가리킵니다.
그는 순교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빵이 되어 하느님께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망은 성체성사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체성사로써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과 일치되었기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도 동참하고
그 자신도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와 하나 되어, 우리도 깨끗한 밀알이 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말에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평일에는 반드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입니다. 사실 운동을 하기 전에는 시간이 없다고,
너무 피곤하다 등의 이유를 붙이곤 했습니다.
이런 이유를 붙였을 때는 운동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매일 하다 보니 시간이 없다는 것도, 피곤하다는 것도,
또 힘들다는 것도 별 의미 없는 핑계였음을 깨닫습니다.
운동을 통해 건강해지기에 피곤함도 사라지고,
체력이 붙어서인지 운동할 때 힘들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마음의 여력이 없어서 등의 이유가 똑같습니다.
이런 이유를 보면 신앙 생활하지 못함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당에서만 또 무릎꿇고 오랜 시간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삶 안에서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께 함께하는 마음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매 순간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못하는 이유는 늘 돋보이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쁜 일상 안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춘다면,
못한다고 했던 이유가 얼마나 의미 없는 핑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바쁜 것도, 피곤함도 사라지고 마음의 진정한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신앙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장 큰 죄를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경과 율법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지만,
정작 위선과 교만으로 실천하지 않기에 자신도 하느님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우리 안에 담긴 위선과 교만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선과 교만이 가득할수록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한 지금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십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 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 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저의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을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고,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수용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교훈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비와 사랑을 놓쳤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 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예수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불행하리라는 경고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행복의 길이 시작됩니다.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생(人生)은 무엇일까요?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강의 중에 ‘하숙생’을 불렀습니다.
하숙생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의 가사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헤어짐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의견이 다르다고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의탁할 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있어요.’
인생은 계란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란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가 있듯이 인생은 둥글게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큰일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참고,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양보하면
오해는 이해로 바뀌고, 원망은 용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계란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유인도, 노예도,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계란은 노른자가 있습니다.
인생에 노른자는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닙니다.
인생의 노른자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남도 따르지 못하게 막아 버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유다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정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 삶의 뿌리를 살펴봅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혹시 지금까지 이 세상 살아오시면서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인 있는가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야! 빨리 그 가면을 벗어라!” 라든지
“인생을 그따위로 살지 마라!”라는 식의 충격적인 말.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가슴이 부들부들 떨릴 것입니다.
복수심에 이를 갈 것입니다. 어떻게라도 반격하고 되갚아 주기 위해 골몰할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쌍날칼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눈에 제일 먼저 포착된 볼썽사나운 광경이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짓 목자들, 오직 자기 배, 자기 주머니 채우는데,
혈안이 된 지도자들의 타락과 횡포였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함께 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고스란히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으로 슬픔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종교의 권위를 등에 업은 지도자들의 횡포 앞에,
착취와 희생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가 있었으니,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무 잘못 없는 백성들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죄입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예수님께서는
큰 껄끄러움과 부담을 무릅쓰고 거짓 지도자들의 회심을 촉구하는
강력한 펀치를 날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에게도 강력한 펀치가 날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신속한 회심을 촉구하는 주님 편의 신호라고 보면 거의 정답입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강력한 한방이 날아올 때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 삶의 뿌리를 한번 돌아볼 일입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해 볼 일입니다.
결국 그 강력한 한방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어서 빨리 당신께로 돌아서라는 자비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쁜 습관이 장애물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 선언을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보자.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세 가지 불행 선언의 이유는
① 십일조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42절)
②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43절)
③ 사람들이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무덤과 같다.(44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지는 세 가지 불행 선언의 이유는
① 남에게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46절)
②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47-51절)
③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는다.(52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율법교사들에 대한 나머지 두 가지 불행 선언을 전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섯 가지 불행 선언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율사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여 무수한 세칙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였고,
바리사이들은 죽음으로 이를 마지막 하나까지 기키려는 충성심을 보였다.
바리사이들은 율사들이 만들어 낸 율법의 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우월성을 고취하여 특수층으로 자처한 사람들로서
예수님 당대 최고의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이 아니었던가?
후대의 랍비들은 바리사이파를 이스라엘 율법과 전통의 진정한 옹호자로 찬양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의 랍비들은 바리사이파의 정신적 후예들로 간주할 수 있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율법의 세목을 지키는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사정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관심 밖의 일이었다.(46절)
그들은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통탄의 마음으로 꾸미는 척 하지만
조상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벨의 피(창세 4,8-10)부터 모든 예언자들이 흘린 피와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피살된 즈가리야의 피(2역대 24,20-22)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47-51절)
율사들은 머지않아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죽인 책임까지 져야 할 것이다.
율사들의 최종적인 잘못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통로를 차단하는 데 있다.(52절)
여기서 새로운 지식이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을 말한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께 믿음을 가질 수 없도록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진정한 예언자요, 하느님 지혜의 선생으로 등장하신다.
그분 스스로가 율법의 성취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이며 지식이다.
그분은 율법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 율사들과는 달리 율법을 단순하고 쉽게 만드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라고 하셨다.
율법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신
율법을 두고 밤낮없이 연구하고 정진하였던가?
왜 그들은 율법을 공부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참다운 정신과 정의와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들은 율법의 참된 지혜가 그들 바로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그것은 이미 그들 몸에 베어들은 위선과 착취와 탐욕의 습관 때문이다.
이런 나쁜 습관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