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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8일 금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티모 4,10-17ㄴ
복 음 : 루카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직접 파견하셨던 제자들이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루카 10,2)고 청하여
그 주인이 보낸 일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루카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저술함으로써 큰 일꾼의 몫을 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루카는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서, 자신이 한 일과 그 목적을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이들이 전하여 준 것을 엮어서,
신앙에 입문한 테오필로스가 배운 것들을 확인할 수 있게 하여 줍니다(1,1-4 참조).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성령께서 오시고
사도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 과정을 다시 테오필로스에게 알려 줍니다.
책을 쓰는 것은 사람을 직접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달라서,
이 책들은 테오필로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이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접하였습니다.
이천 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예수님 시대 직후에 기록된 이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루카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이것이 복음사가들의 특별한 공로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감사하여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시대에, 그리고 교회가 생겨나던 시대에
그러한 증언을 남겨 줌으로써 루카는 지금도 살아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1세기의 증인을 만난 것처럼 소중하게 복음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1년 영국에서 ‘아서’라는 여섯 살 난 아이가
친부와 계모에게 아동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의 몸에는 수백 개의 멍이 있었고,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입니다.
아이의 집에는 가정용 CCTV가 있었고, 여기에 아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잠을 이루지 못한 아이는 서럽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외치는 동안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다른 이의 위로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분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위로도 필요했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은 분명히 필요했습니다.
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때는 하느님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비판하고 있을 때, 그래도 위로할 수 있는 ‘나’가 되어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다며 절망에 빠지고 그 결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위로하기 위해 우리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렇게 높이를 맞출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을 뽑아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단순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시선을 맞춰서 진정한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루카 복음사가 역시 이렇게
세상에 위로를 주기 위해 온 힘을 전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함께하였고,
또 전교 활동을 하며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 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 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꾼’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 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 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 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늘에는 영광’이, ‘땅에는 평화’가 성취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구어 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준 그 평화를
형제들 안에 심고 가꾸고 일구며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저희의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타인을 억눌러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이루는 평화가 되게 하소서!
분쟁과 갈등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진리가 이루어진 참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배척을 받을지라도 제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한눈팔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학창 시절에 자취생활을 하였고,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 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곰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엉겨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금방 맑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점만 보입니다. 이때‘콩깍지 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활동도 적극적으로 합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한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각각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신분에 따른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입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목적으로 대양을 건넜지만
결국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콜럼버스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데
베스푸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스푸치에게는 전기 작가가 없었던 반면
콜럼버스에게는 한 사람의 전기 작가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는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슐레가 프랑스인들에게 프로이센의 침입자들을 몰아낼 의지를 고취 시키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재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잔다르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2027년에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본당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 책자의 발행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저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사제인 저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감동입니다.
저는 늘 큰아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보다는 비난하고 단죄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성실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아들도 사랑하였지만, 돌아온 아들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뉘우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고, 눈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용서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믿음의 나무로, 사랑의 나무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 이야기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지친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고, 함께 머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을 전해주시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성가 엠마우스를 참 좋아합니다.
이 성가를 작곡하신 원선오 신부님도 존경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사목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이 어느 정도 발전을 하자 케냐로 가셨습니다.
케냐에서는 더욱 어려운 수단으로 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계실 때,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던 학생들은 신부님의 따뜻한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문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우산을 들고 아이에게 가셨습니다.
우산을 함께 쓰고 데려다주신 신부님을 아이는 기억하였고
신부님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제게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복음입니다.
저 또한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사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임을 알려 주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루카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 토마 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 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하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리라고 하신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신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사랑과 자비의 루카 복음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도 젊은 수도자 시절 해외 선교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사목 실습을 시작할 때,
장상들에게 제발 좀 선교지에서 실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장상들 눈에는 제가 선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답은 언제나 묵묵부답, 너무 답답해서 부르짖으면
겨우 오는 답장은 먼저 한국에서나 잘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를 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그런 열망이 남아있기에,
선교지로 훌훌 떠나는 후배 형제들을 보면 얼마나 부럽고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한번은 오지 중의 오지, 도착하려면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언제나 수하물이 제대로 인수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나라로
선교를 떠났던 한 형제가 휴가차 귀국했었습니다.
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일 년 반 전의 그 당당하다 못해 풍성했던 풍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짝 마르고 노쇠한 중늙은이가 한 명 꾸부정하게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일 년 반 만에 체중이 30킬로나 빠졌답니다.
그러면서 장난삼아 돈 한푼 안 들이고 자연 다이어트에 성공했으니 꽤 돈 번거라며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과도비만으로 고생하시는 분들 선교지로 초대하겠답니다.
너무 갑작스레 왜소해지고 노쇠해져 적응이 잘 안되는 형제를 바라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그래 해외선교사들이야말로 이 시대 순교자들이로구나!’
그와 함께 여기저기 같이 다니면서 전해 들은 더위와의 싸움은 정말이지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항상 더우니 잠자는 것이 그렇게 힘들더랍니다.
그나마 쪽잠이라도 자기 위해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둘러야 된답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잔뜩 뜨거워진 매트리스에 미리 물을 한 사발 부어놓는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열기가 사라져 머리를 눕힐만하다네요.
자다가 몇 번이고 일어나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해야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답니다.
철저하게도 문명 세계와 단절된 곳,
흙바닥에 양철 지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곳,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다시 떠나는 형제의 환한 얼굴이 참으로 고맙고 대견스러웠습니다.
초대 교회 선교사였던 바오로 사도와 루카 복음 사가의 삶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티모테오 2서에 그들이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굳게 믿었던 동료들로부터의
배신과 따돌림으로 인한 상처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 와중에 주님,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고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 티모 4,10~17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예수 그리스도 육화 사건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각적 효과를 활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여러 상황들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함을 통해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51년경에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
57년까지 필리피 교회 공동체에 머물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했고,
바오로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때에도 수행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투옥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큰 의지요 힘이 되어 드렸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 번째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 추정됩니다.
그는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상과 복음 전파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루카 복음은 사랑과 자비의 복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따뜻한 시선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죄 많은 여인 이야기, 돌아온 탕자의 비유, 우도 직천당 사건 등입니다.
고통받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루카 복음사가의 복음서는 2천 년 세월이 지나온 오늘
우리에게도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녔던 고통 받는 한 인간을 향한 한없는 측은지심과 따뜻한 동료애가
오늘 이 시대 다시 한번 메아리쳐지길 바랍니다.
추수할 것도 많고, 일꾼도 많은데
박상대 마르코 신부
정확한 사실이라 보긴 어렵지만,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성 루카는
시리아 지방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사도 바울로의 서간들에 의하면 루카는 직업상 의사였고,
바울로의 동반자로서 두 번의 선교여행을 함께 하였다.(골로 4,10-14; 2디모 4,11; 필레 1,24)
루카는 복음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예수 어록과 마르코 복음을 원전으로 삼았으나,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고유한 사상과 섬세함을 미루어 볼 때,
루카는 복음사가들 가운데 그리스 어문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안티오키아에 유명한 학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카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기도의 중요성과 성령 하느님의 능력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루카 복음을 일컬어 ‘자비의 복음’, ‘보편적 구원의 복음’,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 ‘절대적 재생의 복음’, ‘기도와 성령의 복음’,
또는 ‘기쁨의 복음’이라 부른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초기 교회의 실상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의 저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저술을 위해 루카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하였을 것이지만,
사도 바울의 제2차, 제3차 전도 여행을 함께 하고
로마 수감생활 시절 그 근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은 루카 자신의 직접적인 목격과 체험일 것이다.
루카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의 남부 파트라스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 1장에서 24장 전체에 걸쳐
많은 부분 고유의 특수사료를 삽입하여 복음서를 풍부히 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복음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12제자 외에도
따로 일흔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가실 곳으로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과 함께 엄격한 여장 규칙을 훈시하는 내용이다.
루카는 마르코와 마태오에서와 같이 12제자의 파견에 관한 보도는 이미 하였다.
(마태 10,5-11,1; 마르 6,6-13; 루카 9,1-6)
루카는 이것으로 갈릴래아 활동기를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긴 여정에 오른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수일행에 대한 거부와 냉대로 말미암아(루카 9,52-56)
전혀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또 한 번의 제자 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으로 추정된다.
이에 루카는 ‘일흔두 제자의 파 견사화’(10,1-16)를 창작하여
자신만의 특수사료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2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먼데 시간은 촉박하다는 뜻이다.
즉 예수께서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은 많은데,
종말론적 하느님의 심판이 목전에 왔다는 것이다.
‘추수’라는 상징어가 사태의 심각성을 더해 준다.
루카 복음사가 축일이 들려주는 오늘 미사의 복음은
우리 교회의 ‘복음과 선교의 사명’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종말론적 하느님의 심판이 목전에 왔다는 사태의 심각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비중으로 크다.
추수해야 할 곡식이 온 세상에 널려 있는데,
일꾼인 우리들은 내 밭에 있는 곡식 추수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