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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일 (전교 주일)
제1독서 : 이사 2,1-5
제2독서 : 로마 10,9-18
복 음 :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사야가 그려 보인 마지막 날의 모습,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은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거기에서 주님의 길을 배우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전쟁 기술은 배울 필요도 없고, 칼과 창은 쳐서 농기구로 만드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티나의 상황을 보면서, 이사야 시대의 그곳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아하즈 임금 때는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남 왕국 유다로 쳐들어왔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다음 히즈키야 임금 때는 아시리아가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성읍이 정복되었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모든 지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 전쟁을 겪었기에 오히려 전쟁 없는 세상을 그렸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 유다인들과 팔레스티나인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로마인들은 유다인들을 몰아냈고, 중세에는 십자군 전쟁도 있었으며,
지금은 지금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유다인들보다 덜 호전적이어서 그들을 덜 죽인 것도 아닙니다.
유다인들과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 근본적으로는 같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인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의 날은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를 위한 날이지만,
오늘의 독서를 들으면서 하느님은 믿는 모든 이가 참으로 ‘복음화’되어
주님의 길을 배우고 서로 맞서 칼을 쳐들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심리학자 마트 셀리그만은 삶에는 세 가지 여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즐거운 삶, 적극적인 삶, 의미 있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최고 상위에 있는 삶은 당연히 의미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삶에도 기여 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열심히 살면 될까요?
열심히 살면 즐거운 삶, 적극적인 삶까지는 접근 가능하지만,
열심히만 산다고 반드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에 대한 적극적인 각성, 나의 노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자주 자문해야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냥 단순히 열심히 하면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금세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항상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했어. 최선을 다했어.”
열심히 하더라도 삶의 방향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이 사라진 ‘열심’은 금세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께 맞춰진 ‘열심’은 의미를 발견해서 그 안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기쁨과 적극성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생활했던 제자들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의 열심과 적극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다락방에서 벌벌 떨어 숨어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의미를 찾아 나갑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의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제 의미를 찾아 나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순히 열심과 적극성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바로 우리 자신의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주면서 우리를 초대합니다.
“야곱의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이사 2,5)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라고 하면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나갔다."(로마 10,17-18)고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 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 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 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8,20)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그리하여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이요, 그것을 '지키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라고 하십니다.
곧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을 살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교종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는,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어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11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고,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연주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하듯이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면 어렵기만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말을 잘 못합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둡니까?.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
“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구역 반 모임에서 성경 통독을 합니다. 감사 노트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쓰시는 분도 계십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반응이 다양합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살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분이 함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영적 양식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 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3,15).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 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2,4).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폐가 있는 것일까요? 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오늘 11명의 예비자가 세례성사를 받습니다.
축하드리며 아울러 다시 예비자 인도에 마음을 모아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신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슬람교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의 계명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리스도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슬람교도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한 지붕 세 가족처럼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같은 하느님을 모시는 형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형제들은 같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3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민족이고, 언어도 비슷하고, 종교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죽이고, 죽어야 하는 어리석은 전쟁을 3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도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민족입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죽이고, 죽어야 하는 전쟁을 2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불꽃처럼 번져서 헤즈볼라, 후티, 이란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대고 선서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멈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멈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원을 멈추고,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라는 종교를 믿으면서 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인터넷이 있고, 각종 소통 수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예전보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입니다.
맛집은 멀리 있어도, 작은 곳이어도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맛집의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알려주는 사람도 적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며
향기를 전해주는 분도 적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의 기쁨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의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두운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길을 찾듯이,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로부터 삶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교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낚시와 전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할까요?
첫째는, 밑밥을 꾸준히 주어야 합니다.
밑밥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고기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도 비슷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나눔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닫혀있던 상대방의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예전에 체험 사례를 발표하셨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새댁에게 자주 찾아가서 살림살이의 요령을 알려주고,
바쁘면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도움을 주니까, 결국 새댁은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같은 장소에 ‘찌’를 던져야 합니다.
밑밥이 쌓인 곳에 정확하게 찌를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손맛’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도 비슷합니다. 선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해야 합니다.
조금, 선교하다가, 어려우면 포기해서는 선교를 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용산 성당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요셉 형제님은 냉담하는 분들의 주소를 찾았습니다.
매 주일 주보를 보내고, 이사를 가신 분들은 이사 간 주소로 주보를 보냈습니다.
결국 그분의 노력으로 냉담 중인 많은 분들이 다시 신앙을 찾았습니다.
셋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물을 던졌지만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던 적이 있습니다.
찌를 바라보면서 끈기 있게 기다리면 찌가 높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선교를 하면,
결코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도 성당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알던 자매님은 결혼 생활 17년 동안 시부모님과 남편을 극진하게 섬겼다고 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남편이 결혼 17주년 선물로 가져온 것은 ‘예비자 교리 신청서’였다고 합니다.
남편은 극진한 마음으로 시부모님과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선물로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남편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는 축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즐거운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참된 나눔이,
오늘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이
이웃에게 주님을 전하는 커다란 선교가 될 것입니다.
가을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보는 계절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민족의 복음화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 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교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전교 주일입니다.
면소재지에서도 한참 들어오는 이 한적한 어촌에 살면서 어떻게 이웃 전교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봅니다. 초고령화된 지역에다, 사람들 만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 데...
그러던 중 그것도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니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택배 배달을 위해 오시는 분들, 솔향기 길 걷다가 피정 센터를 지나가는 분들,
공사하러 오시는 분들, 버스 운전 기사님들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를 찾아오는 분들, 스쳐 지나가듯이 만나는 분들이 다 소중한 전교의 대상입니다.
한번은 저희 피정센터로 중고물품을 가득 싣고 오신 운전 기사님을 만났습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간식이며, 커피며, 생수를 챙겨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아쉬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즉시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하시려고 점심도 제대로 드시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라면이라도 끓여 들일까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라면 두봉지에 계란 두 개, 파 송송 썰어 넣어 푸짐하게 한 그릇 차려드렸습니다.
마침 찬밥까지 남아있길래 챙겨드렸더니, 배가 고프셨던지 싹 비우셨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살짝 감동받으셨던 기사님은 이것저것 천주교에 대해서 묻기도 하시더니
마침내, 당신도 나이가 들면서 종교를 하나 갖고 싶은데, 천주교가 좋겠다고 그러셨습니다.
너무나 반가웠던 저는 즉시 사시는 것 주소를 물어보고 가까운 본당 사무실 연락처를 알려드렸습니다.
조만간 사무실 찾아가겠노라고 하시며, 혹시 다음에 또 근처 배달 오면 라면 또 끓여줄 수 있냐고?
좋다고 언제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깨달음입니다.
전교 주일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장 중요한 전교는 삶을 통한 전교인 듯합니다.
삶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악한 표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면서,
천주교 믿으세요, 성당 나오세요,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3년간의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한계, 무기력을 진하게 체험하며,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시기는 어찌 보면 전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과제이자 가장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또한 어떤 성인의 표현대로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보속입니다.
기회가 좋으나 나쁘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전교를 생활화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각자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눈빛만 봐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존재 그 자체로, 우리 매일의 삶을 통한 복음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편안해하고 행복해합니까?
나를 보면 어떻게 해서든 함께 있고 싶어 붙잡고 늘어집니까?
전교 주일을 맞아 우리들의 삶에서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 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흔적과 자취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성당 가자, 세례받아라,
하지 않아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따라 하느님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마태오 복음서」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이 이제부터는 하늘을 위해서나 땅의 모든 민족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향한 결정적 길이라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배워 실천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에수님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마태오 복음서」 공동체의 決意도 담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宣敎에 대해 생각하는 날입니다.
유럽 中世 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이념으로 받아들인 사회였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交易을 위한 商船들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아시아의 것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 문명의 우월함과
白人이라는 민족적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보았습니다.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格言은 그들에게 萬古의 진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迷信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有色人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施惠的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 우월감과 그 권위주의의 殘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植民主義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原住民들에게 혜택을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지주의에서 한 수 배운 소행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퇴색하면서,
유럽의 신앙인들은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의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학기술 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精神文化에 있어서 아시아는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같이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영적 가치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 떼 같다.’(마르 6,34)고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을 하느님이 버린다고 가르치던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옹졸하고 배타적인 유대교의 集團利己主義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 봉사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는 사랑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보살핌을 실천하는 데에 인간의 참다운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입니다.
어느 종교 혹은 敎派에 속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사는 환경과 관계있습니다.
길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으로 사람들을 유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섬김의 실천, 곧 보살핌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화는 敎勢擴張이나 信者倍加 운동과 같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야 합니다.
企業이 기업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社勢擴張 하고, 제품판매 倍加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섬김을 배워서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사회를 위해 사랑과 섬김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보살핌을 실천하는 동기가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국방부가 알아서 결정하고 만들어야 할 해군기지 조성을
신앙의 이름으로 가로막고 나서는 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국방이나 국제 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특정 기업의 노사 분규에 개입하고, 騷擾를 부채질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행동 原理와 樣式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1코린 13,4)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强者가 승리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배려와 보살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동물에서 進化하여 인류가 출현하는 데에 배려와 보살핌이 결정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최근 어느 진화론 학자의 연구 발표도 있습니다.
보살핌이 인류 발전에 인류를 출현시킨 힘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는 배려와 보살핌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가
하느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결정적 기준이라고도 가르쳤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는
궁지에 빠진 이웃을 정성껏 보살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이웃을 위한 배려와 보살핌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來世를 위한 보험가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잘살아 보겠다는 處世術도 아닙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섬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배워서, 이웃을 보살피는 실천을 하면서
그것이 인간 생명을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