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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디오 반민특위, 개념있는 여자들의 센 수다 원문보기 글쓴이: 홀로아리랑
1.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국가보안법 위반!~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1959년 7월 30일 오전 10시 30분. 한 사형수에 대해 사형 명령.
15분 후인 오전 10시 45분.
모시저고리, 모시바지의 사형수가 현장에 도착 가족들은 형무소 정문 앞에서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행관이 집행 조서를 읽어나가는 동안 그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순간은 11시 3분. 죄수 번호 2310번, 조봉암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정치가로서 평생을 살았던 죽산 조봉암.
그는 사형 당하기 3년 전 자신의 정치 이상을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그 시대에 맞고 그 사회에 맞고 그 인정에 맞도록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고침으로써,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게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을 가르켜서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 진보당 결당대회 개회사 중에서
"조봉암이 죽음을 맞은 1959년은 한반도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꼭 1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이 15년은 대한민국에 새롭게 틀을 만들어 가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조봉암은 이 시기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재판에 회부되기 전까지 그는 대한민국 제2야당의 당수였습니다.
바로 혁신과 개혁을 주장하며 창당된 진보당이었습니다.
당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봉암이 내세운 것은 진보였습니다.
가진 사람이 갖지 못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 이것이 그가 꿈꾸던 진보적인 대한민국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사형수로 사형되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
조봉암은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일까요?
2. 1958년 진보당 간부 검거령! 그리고 1심, 2심, 대법원 결심공판 - '조봉암 사형!'
19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체 검거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새벽 서울 시경 수사관들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조봉암은 없었습니다.
이미 닷새 전부터 피신하라는 경고를 받은 조봉암은 바로 전날 친구집으로 몸을 숨긴 뒤였습니다.
"죽산 선생을 잡으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에 보내줄테니까 일본에 가겠는가?~' 이런 얘길 했는데,
'노(NO)!~가다니! 내가 왜 가느냐, 죄 지은 게 없는데 나 잡아가면 뭐 죽이겠냐!~' 하셨죠."
- 전세룡, 진보당 조직 차장
다음날인 13일. 조봉암은 시경에 스스로 출두합니다.
그날 저녁 기사에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17명에 대한 체포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제2야당의 간부 전원이 체포된 해방 이후 최대 정치 사건,
'진보당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진보당의 정책과 강령, 그 중에서도 특히 평화통일론이었습니다.
진보당이 북한과 야합할 목적으로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찰은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 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 진보당 강령 제4항
이들이 검거된 지 꼭 두 달 후인, 58년 3월 13일 첫공판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진보당의 정책과 평화통일론에 대해 열띤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론과 동일하다며
진보당과 조봉암을 압박했습니다.
"공산괴뢰가 먹는 '밥'을 '밥'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먹는 '밥'을 '밥'이라고 하지 아니해야 한단 말인가!
공산괴뢰가 통일하기를 원한다고 떠들면 우리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해야겠단 말인가!"
- 조봉암
"우선 진보당의 강령, 정책을 자유 민주주의가 허용하느냐 안 하느냐,
헌법 위반 되느냐 안 되느냐 이런 걸 재판이 따지는 것이니까,
유병진씨가 재판하고 나와서 법모를 탁 던지면서 한 소리가 있어.
내가 형사재판 재판장인지,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장인지 알 수 없다고..."
- 이병용 변호사, 진보당 사건 1심 배석판사
그런데 공판이 한참 진행중이던 5월. 재판의 내용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합니다.
바로 양명산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양명산은 1955년부터 남북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양명산을 통해 조봉암이 북한으로부터 정치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이
감찰의 주장이었습니다.
그가 받았다는 정치자금은 2천 7백만원이었습니다.
검찰은 조봉암이 이 돈을 받는 댓가로 북한 정권에 협조하기로 하는 등
명백한 간첩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양명산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모두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조봉암의 주장은 달랐습니다.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명산이 간첩이라는 것은 몰랐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습니다.
"양명산이는 특무대 이래 일관되게 자기가 북괴의 지령하에서 조봉암을 만났고조봉암을 북괴의 지시대로 도와줬고,
그랬더니 조봉암은 언제 북괴를 얘기했느냐, 당신이 나 도와주는 것은 사업가로서,
아는 사람으로서 도와준 것뿐이지 무슨 북괴냐..."
- 이병용 변호사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습니다. 북괴공작첩보부대인 HID요원 엄숙진이었습니다.
양명산이 남북으로 오갈 때 감시자 역할을 했던 엄숙진은
양명산이 북에서 정치자금을 받아 남쪽으로 건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로서는 양명산의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가 이북을 왕래한 때에는 그의 소지품을 철저히 조사하였으므로
도저히 나 모르게 아무런 물품도 가져갈 수도 없었고 가져올 수도 없었다."
- 엄숙진 증언
20여 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그 해 7월 1일,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검찰은 조봉암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구형한 상태였습니다.
진보당 간사장이었던 윤길중도 간첩방조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당시로 봐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구형문제는 내가 단독으로 할 수 없어 상부와 의논했다.
검찰총장, 대검의 정보부가 하고 우리는 사건 실명만 했다. 기본 방침은 거기서 나왔다.
(구형량까지도 상부에서?) 그렇습니다. 일반 사건과는 다르니까."
- 조인구, 진보당 사건 담당 검사
그러나 검찰의 구형과는 다르게 재판관은 진보당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진보당의 정책과 평화통일론도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조봉암에게는 5년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간첩했다는 혐의를 했다는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간첩죄에 대해선 무죄,
그러나 국가보안법으로 유죄였습니다.
"우리 1심으로서는 그런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군사기밀을 탐지하고 제보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무거운 행위는 아니다, '단순히 국가보안법 상에서 금지하고 있는 북괴와 협력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았죠."
- 이병용 변호사
하지만 재판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검찰은 재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습니다.
재판 두 달째인 9월 4일, 진보당 2심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조봉암과 진보당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첫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양명산이 1심에서의 진술을 번복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2심 첫날로 기억되는데 양명산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특무대에서 고문을 받고 회유를 받아서 거짓말을 했다,
내가 얘기한 1심에서의 모든 것은 거짓말이고 사실이 아니다.
이북하고의 연관 이런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하고 증언을 했죠.
- 임홍빈, 당시 중앙일보(민국일보 전신) 기자
"양명산은 특무대에서 말하는 대로만 하면 조봉암만 처벌받게 되고 너는 괜찮다,
아마 그렇게 조정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1심에서 둘 다 똑같이 사형이 구형되어 버리니까 의아하잖아요. 죽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특무대한테 꼬임에 빠져서 그런 것이지 사실 아니다!' 그랬는데...
그게 이미 늦어서..."
- 이병용 변호사
양명산의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변호인측이 신청한 증인과 현장 검증 요구도 거부되었습니다.
다음달 열린 2심 공판. 진보당 간부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수 조봉암에게는 더 무거운 형이 떨어졌습니다. 사형이었습니다.
"그럴 수 없는 거죠. 이제 무슨 끝이 나려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2심 때는 다른 사람들도 다 법정구속했어요. 그러니까 일이 잘못되는 거죠.
무슨 방법이 없나 싶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고 또 낙심하기도 하고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거지요. 대법원을 또 기다려봐야 되지 않겠나..."
- 조호정, 조봉암의 딸
해를 넘긴 59년 1월 27일. 대법원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결심 공판을 보러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정 시간을 훨씬 넘긴 12시 20분.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 자리에 선 사람들은 모두 21명. 그 중 17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봉암은 2심과 마찬가지로 사형이었습니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가족들은 오열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린 순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되고 나니까.
'울 거 없다, 재판은 잘된 거다. 무죄 아니면 죽는 거지.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정쟁이라는 거는 그런 거다'...하셨어요."
- 조호정, 조봉암의 딸
"이박사가 나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평화통일운동을 하다 이렇게 떳떳이 죽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 조봉암, '사형집행 전날 진보당 간부들과의 옥중 대화' 중
3. 1954년 사사오입개헌안! 이승만의 중임 제한 철폐!
이어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의 '혁신' 구호!정책과 강령 문제로 시작된 진보당 사건은 간첩죄 판결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나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언론사 앞으로 보도 지침을 보냅니다.
바로 사형수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일절 보도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만큼 민심의 동요를 우려했던 것이죠.
반면 해외에서는 조봉암에 죽임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영국 한 언론에서는 '무고한 조봉암의 목에 오랏줄을 매서 정적을 말살했다' 이렇게까지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국내외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승만이 조봉암을 제거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투표가 끝나고 마침내 개표, 흥분과 긴장 속에 한 표 한 표가 개표되어서 찬성 135표, 반대 60표... "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는 개헌안에 대한 개표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개헌 내용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승만이 다음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하게 하는 개헌안이었습니다.
결과는 부결(否決)이었습니다. 개헌안 통과에 단 한 표가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해괴한 산술이 등장합니다.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는 135.3명. 0.3은 한 명이 될 수 없으니 1/3선을 넘은 것이다.
하루만에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뒤집혔습니다.
사사오입개헌! 이 사건으로 정치권에 반이승만 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합니다.
그 해 12월 이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 신당 창당을 추진합니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 의원들이 출신이 중심을 이룬 가운데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이 합류했습니다.
조봉암에게도 참여 요청이 왔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신당 참여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운동을 위하여 나의 협조를 구하기에
비록 미력하기는 하지만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조봉암에 참여에 대해서 호헌동지회 내에서는 입장이 엇갈렸습니다.
서상일, 장택상은 조봉암 참여를 적극 지지했지만 조병옥, 장면은 그의 참여를 전면 반대했습니다.
"민주당 쪽에서 조봉암에 대해 굉장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애요.
대중성이라든가 조봉암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라든가,
그 세력이 들어왔을 때에 오히려 내부에 있었던 민주당 내의 중요한 세력들을 유명무실화하면서
이 사람이 더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 박태균 교수, 서울대
호헌동지회로 시작된 신당 창당 운동은 55년 9월 18일 민주당을 출범시킴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조봉암은 이 새로운 당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조봉암의 합류를 주장했던 팀도 호헌동지회에서 탈퇴했습니다.
이들은 보다 새롭고 해혁적인 정당의 창당을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보당(進步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해 12월 조봉암은 서상일 등과 함께 가칭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킵니다.
그러나 진보당의 본격적인 출범은 당장 눈 앞에 다가온 제3대 대통령 선거(1956. 5)때문에 잠시 미뤄졌습니다.
선거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3선에 도전하는 자유당 후보 이승만.
진보의 기치를 내건 진보당의 조봉암 등 3파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선거를 20일 앞둔 1956년 4월 25일.
진보당의 후보 조봉암과 민주당 후보 신익희 사이에 전격적인 회담이 열렸습니다.
조봉암과 신익희는 제1,2대 국회에서 함께 의장과 부의장으로 활동했던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테이블 앞에 마주앉은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결렬되었지만 5월초 후보를 단일화를 발표한다는 밀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밀약으로, 죽산 조봉암이 신익희한테
'내가 투표 전에 사퇴할 테니까 그 대신에 진보당을 말살하지 말고 같이 동참해서 뭘 하자' 했고,
신익희도 당시로서는 굉장히 연로한 편이고 하니까
그 후계를 노리고 그런 흥정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표가 되지 않았고..."
- 엄홍빈, 당시 중앙일보(민국일보 전신) 기자
세 후보의 선거 운동은 계속 되었습니다.
조봉암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 노선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5월 1일 조봉암이 내세운 선거 공약 10장에는 이런 그의 노선이 분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내세운 것이 바로 평화통일론이었습니다.
"남북한에 걸쳐 조국의 통일을 저지하고 동족상잔의 유혈극의 재발을 꾀하는
극좌극우의 불순세력을 억제하고...민주방식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성취한다."
- 공약 10장 진보당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제기된 평화통일론이었습니다.
또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국시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
한국 사회에서 표현할 수 있는 진보 사회의 최대값이기도 했습니다.
"이북 사람 다 죽이고 통일하고 이북 사람 다 굶고 있는데 통일을 하고
이남 사람 다 죽이고 통일을 하고 그런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민족이 자유스럽고, 번영하고, 그 다음에 평화스럽게 사는,
이런 것을 가져올 수 있는 통일이 바람직한 거지.
적어도 그것을 죽산 선생은 생각했던 거예요."
- 김용기, 前 고려대 교수, 진보당 학생당원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54년 제네바 회담의 '남북한 통일 원칙 14개 원칙'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원칙의 골자는 UN 감시 아래 남북이 동시 선거를 실시한 다음,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미.소 양국 냉전체제는 사실 더 견고해지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드러난 현상으로는 평화라고 하는 말들이
국제사회에서나 북한의 어떤 당대회에서나 자주 나오고 있던 단어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 또 마치 국제사회가 핵전쟁의 위기를 피하고,
전쟁은 절대 피해야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됨으로 해서
평화통일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는, 이러한 입장이 우리 사회에 수용될 걸로 생각한 거죠."
- 조 민 박사, 통일연구원
공약 10장에서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정책을 내세웁니다.
'수탈 없는 계획경제'로 요약되는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조봉암은 이 정책의 구체적인 계획 방안으로
농민들에게는 농촌 고리대금을 일정 기간 지불 유예해주고
노동자들에게는 단체교섭권과 단결권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6항 대중적 수탈정책을 폐지하고...연차경제계획을 수립"
선거가 치뤄지던 5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빈곤이었습니다.
농촌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도시는 빈민과 실업자들로 넘쳐났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던 56년도 봄, 7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밥을 굶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권은 그런 국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배만 불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석불사건(重石弗事件)'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민간 상사에게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한 다음
농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판매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궁핍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한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조봉암이 진보와 혁신을 외친 것은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내건 평화통일론과 농민,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국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중석불 사건이니 하는 사건들이 많이 터져 나왔는데
거기에 식상한 국민들이 부패를 없애겠다라는 진보당에 대해 지지하게 된 것이고,
두 번째로는 진보당이 내세웠던 정책들이
국민들한테 굉장히 현실적을 다가갈 수 있을 만큼 개혁적이고,
'뭔가 바꿔 보려고 하는 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했던 부분들이 작용을 했겠죠."
- 박태균 교수, 서울대
날이 갈수록 야당 후보들의 인기는 치솟았습니다.
특히 민주당 후보 신익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야당의 승리가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강 유세를 마치고 전주로 내려가던 신익희는
기차 안에서 뇌일혈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습니다.
국민장으로 치뤄진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국민들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신익희의 죽음으로 유일한 야당 후보가 된 조봉암.
그는 곧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을 사퇴시킨 후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을 지지하겠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민주당은 끝까지 조봉암과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1956년 5월 12일 민주당은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져달라 호소합니다.
"추모표라는 고금동서에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것이 없었으면
반여당표, 반이승만표가 죽산한테 쏠렸을 거 아닙니까.
민주당은 그렇게 될 경우에 차기 정권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지 이승만의 집권을 도울지언정 죽산의 집권은 도울 수 없다는
이런 건 확고했다고 봅니다."
- 엄홍빈, 당시 중앙일보 기자
그로부터 닷새 후 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조봉암은 이 선거에서 이승만에 이어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가 얻은 득표수는 216만 여표. 전체 유효 득표수의 20.5%였습니다.
이 선거로 인해 조봉암은 일약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게 됩니다.
'투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는 졌다' 선거가 끝났을 때 한 해외 언론은 조봉암의 패배를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그 날 개표 과정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음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조봉암이 선거에서 얼마나 이승만을 위협하는 인물로 떠올랐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기도 합니다.
4.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 해방후 극우도 극좌도 아닌 '제3의 길' 선택하다!
3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전!
이것이 4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1958년 조봉암이 사형대에 서게 된 배경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데 조봉암이 간첩죄를 적용받은 것은 그의 과거 전력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조봉암은 해방 직전까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1931년 포승줄에 묶인 피고들이 신의주 감옥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봉암도 있었습니다.
조봉암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처음 공산주의를 만난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공산주의자로서 항일 운동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즈음해서 만주지역 내에서 이러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청년운동들 또는 반제 투쟁들이 나오게 되요.
그래서 1925년 넘어서는 해외에서나 혹은 식민지내에서나
반제투쟁의 주류가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전의 독립운동은 20년대 전반기로 끝나는 겁니다.
그럼으로 해서 30년대 전반기까지 식민지에서나 만주지역에서나 간에 민족해방투쟁의 주류는
사회주의 노선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 조 민 박사, 통일연구원
신의주 감옥에서 7년 옥고를 치룬 조봉암.
그는 다시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비 검속에 걸려 예비헌병대에 갇혀 있다가
이곳에서 독립을 맞습니다.
그 때 헌병대에 들어와 해방 소식을 알린 사람이 여운형이었습니다.
여운형은 해방이 되자 마자 바로 건국준비위원회, 일명 건준을 결성하고
8월 16일 휘문고교에서 건준의 성립을 알렸습니다.
조봉암도 해방정국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건준 인천지부를 주도적으로 조직했고
9월 들어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인천시 인민위원회에 참여합니다.
46년 초 박헌영을 중심으로 좌익 계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약칭 민전을 결성했을 때도
조봉암은 민전 인천 지부 의장에 선임되었습니다.
이 때까지 그는 좌익 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6년 6월 조봉암은 전격적으로 전향을 선포합니다.
민전 주체로 열린 한 시민대회에서 조봉암 명의의 성명서가 대량으로 뿌려졌습니다.
성명서의 제목은 '비(非)공산정부를 세우자!' 사실상의 전향서였습니다.
"조선 민족은 공산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으로 된
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으로써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
이 시기 조봉암이 공산주의에서 갑자기 전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조봉암은 전향하기 몇 달전에 박헌영에게 편지를 씁니다.
'존경하는 박헌영 동지에게'라고 시작된 긴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에서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박헌영 1인 중심의 당 운영과 인사문제를 비판한 이 편지는
46년 5월 7일 4대 일간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첫째 무원칙하오. 둘째 종파적이고, 셋째 봉건적이오. 넷째 무기력하오...."
"아버지가 CIC(미방첩부대)에 잡혀갔다 그래요.
해방이 되고 그러니, 더구나 미군한테. 참 기가 차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박헌영에게 주는 편지 초안을 빼앗긴 거죠.
정서도 아닌 편지 초안을...거기서 이제 그걸 공개를 한거예요 신문에."
- 조호정, 조봉암의 딸
"조선공산당 재건파라고 할 수 있는 박헌영 노선에 대한 비판이 주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건파 즉, 박헌영 노선은 45년 후반기나 46년 초반에 갔을 때는
아주 비타협적, 비현실적인 극좌노선을 걷는다고 조봉암 선생은 판단한거죠."
- 조 민 박사
이 비판 편지를 압수했던 미방첩부대 CIC는
조봉암의 전향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향서가 뿌려진 6월 23일이 조봉암이 CIC에 잡혀갔다가 풀려난 바로 다음날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전향에 CIC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48년에 했던 여론조사를 보면,
당시에 사회주의 쪽 인물 중에는 조봉암이 가장 명망이 높습니다.
아마 제가 보기에는 그쪽 계열에서는 여운형 다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측면들이 미군정 쪽에서는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봉암 쪽에서 미군정 주요 인사들을 만나달라 할 때, 미군정 쪽에서 만나주었죠.
당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미군정을 이용하지 않고,
또는 미군정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서 정치활동을 하기는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 박태균 교수
박헌영에 대한 비판 편지가 공개되면서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박헌영과의 관계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조봉암으로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독재를,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 '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중에서
사실상의 전향서가 되어버린 글에서
조봉암은 자본독재와 공산독재를 둘다 부정하는 제3의 길이 자신의 길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전향한 조봉암은
자신과 비슷한 노선을 걷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의 움직임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김구, 김규식 등이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동참하기 위해 38선을 넘었을 때도
조봉암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핵심적으로 봐야 될 건 그건데, 조봉암은 남북 협상에도 참여를 못하는 겁니다.
왜 못하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북한의 2인자가 박헌영으로 있는 상황에서
조봉암이 북으로 올라갈 수가 없어요.
그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계속 정치를 한다라고 생각을 한다면,
안 한다 그러면 안 하면 되는데, 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상황이라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또는 5.10 선거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인 상황이 있었다는 거요."
- 박태균 교수
4.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농지개혁! 그리고 2대,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48년 5월 10일. 남한만 단독정부 선거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정치노선을 모색하던 조봉암은
결국 다른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단독정부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합니다.
인천에서 출마해 큰 표 차이로 당선된 조봉암은 이로써 정치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국회가 꾸려진 지 석 달만인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초대 내각의 농림부장관으로 조봉암을 임명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장관직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는 이후 지주와 자본가 중심의 한민당과 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사실은 타깃(목표)으로 삼았던 것은 이승만쪽이 아니구요, 이건 민주당 계열이거든요.
이 한국민주당 계열이 조봉암의 눈에는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기득권층이다, 이렇게 바라봤던 거거든요."
- 박태균 교수
농림부장관이 된 조봉암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농촌문제였습니다.
그 첫 시험대는 농지개혁이었습니다.
자신의 땅 한 평을 가져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대다수의 농민들.
농지개혁은 그런 소작농들에게 경작지를 분배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조봉암은 농지개혁법을 실현하기 위해 농림부의 직원들과 함께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민당이 지주들에게 유리한 농지개혁법안을 내놓았을 때
조봉암은 농민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제사하며맞섰습니다.
농지개혁법과 더불어 그가 또 하나 열성적으로 일했던 것은 양곡매입법이었습니다.
양곡매입법은 정부가 추수한 양곡 전량을 다 들이는 지금의 추곡수매법입니다.
그는 이 법의 추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장관실, 그가 앉았던 양 벽면에는 각 도별로 양곡매입실적이 표시된 커다란 도표가 걸려 있었습니다.
"내가 근무하면서부터 어쨌든 가장 인상 깊은 게
그 기둥 그래프가 굉장히 굵은 게 그게 늘 올라가면 올라가는 대로
장관님(조봉암)이 아주 그 만족스러운 흡족한 그런 표정을 지으셨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생생한 건 이쪽 벽 전체를 채운 그 기둥 그래프예요."
- 김제영, 조봉암 비서
1948년 10월 9일 양곡매입법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미군정이 실시했던 쌀수직정책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쌀수직정책이란
농민들에게 쌀을 무상으로 거둬 들인 다음 다시 배급하는 정책을 말합니다.
농민들은 일제시대 강제 공출과 비슷하다며 이 정책에 반발했습니다.
"강제 공출에 반대 기세, 세홉 배급이 최대 급무"
"오늘부터 세홉 배급, 잡곡이 2.4홉에 쌀 겨우 0.6홉"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쌀을 전량 사들이는 양곡매입법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가난한 농민들은 중간 상인들에게 쌀을 미리 팔아버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리배의 매점 등으로 매곡 성적이 부진"
"거시적 차원에서 정부차원의 양곡정책이 안정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결국은 매점매석 또는 중간상인의 수탈, 착취가 없는 것은
기층민중의 생활상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법은 실현되는 것이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죠."
- 조 민 박사
결국 양곡매입 실적의 부진과 부당하게 씌워진 공금횡령 때문에
조봉암은 취임 6개월을 넘기지 못한 채 농림부장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49년 2월 22일 농림부장관 사임.
독립운동을 하며 얻은 동상과 고문 휴유증으로 조봉암의 오른쪽 손가락 셋은 마디가 잘려져 나가 있었습니다.
농림부장관 시절 그의 여비서였던 김제영씨는 부족한 손가락으로 볼펜을 쥔 채
꼿꼿히 앉아 업무에 열중하던 조봉암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비록 6개월여 만에 농림부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에도 조봉암은 국회의원으로서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쓰는 데 앞장 섰습니다.
80%가 넘는 농민을 위한 그 당시 정치는 바로 대다수 국민을 위한 정치였습니다.
1950년대가 넘어서면서 조봉암은 이러한 자신의 정치 이념을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무대는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전방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 되던 52년 5월 22일.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출근하던 47명의 국회의원은 타고 있는 버스 채로 헌병대에 끌려 갔습니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날 오후 국회의장이던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은 급히 이승만을 찾아갑니다.
이들에게 이승만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52년 5월은 대통령 선거가 불과 세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측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된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을 위협함으로써 직선제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노렸던 것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라도
이걸 통과시켜서 '대통령은 내가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이거예요.
이승만이 '내가 해야겠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승만의 '내가 해야겠다' 하는 생각은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거예요.
미국하고 뭔가 맞는 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히다가는 무슨 큰 사고가 난다,
그러니 여기에서 알맞게 타협을 해야겠다는..."
- 정태영 박사, 진보당 의원
이승만의 의도대로 직선제 개헌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치뤄지게 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 조봉암도 이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도대체 이승만하고 대통령 선거를 해서 이기리라고 생각하느냐?
이기리라고 생각하면 그 머리로 대통령 못하고,
한 번 대통령 후보 됐던 이름이나 남기자 하면 목숨 걸 일을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느냐?' 그 때 얘기했어요.
'이박사하고 비교가 안 된다'는 거야, 자기는.
'그러나 다만 우리가 남북 문제나 국가적인 것을 볼 때
이승만 정권이 저대로 나가다가는 안 된다는 자기 소신으로 이렇게 나온 거다'고 했어요."
- 강원룡 목사
후보 등록 마감일은 7월 26일, 선거일은 8월 5일로 잡혔습니다.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날은 9일.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을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습니다.
"날짜가 9일 밖에 없는데 그걸 대통령 선거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도 해야 하니까 플래카드 어떻게 하고. 저는 저대로 선전하느라고 마이크 잡고 다니고, 그랬어요.
젊고 패기있고 정직하고...이 분을 뽑자고. 골목을 다니고 그러면 막 박수 소리나고 그래요.
힘을 얻고 다니고...그렇게 며칠 다녔어요."
- 조호정, 조봉암 딸
조봉암은 신문에 광고를 실어 자신의 정견을 알렸습니다.
'이대로 살 수가 없다'며 그가 내세운 정견은 '혁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더 4년을 살아갈 수 없다. 대통령으로 혁신정치가 조봉암선생을 선출하자'
이 때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체제와 극우, 반공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웃은 내 편 아니면 적이 되어버렸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많은 국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처벌을 받았습니다.
조봉암이 말하는 혁신은 이 암울한 시대를 바꿔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극우와 극좌가 만연하고 부정과 독재가 만연한 사회 대신
동포가 서로 화합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거 운동을 통해서 조봉암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켰습니다.
이승만 : 4,969,299표 조봉암 : 762,772표
큰 표 차이로 조봉암은 2위에 머물렀지만 이 선거로 조봉암은 가장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5. 기존의 자유당과 민주당에 맞서는 새로운 혁신 정당 진보당의 행보! 이승만의 탄압!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 50년대 초반은
극우 냉전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혁신'을 기치로 내건 조봉암이 선전했다는 것은
해방 공간에서 분출되고 있었던
'개혁과 혁신'에 대한 열망이 아직 식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이 내건 혁신의 구호는
4년후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3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조봉암은 한국 진보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게 됩니다.
56년 11월. 진보당의 결당대회가 열렸습니다.
당수로 뽑힌 조봉암은 진보당의 정식 출범을 세상에 알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사회개조의 원리인 진보사상을 주장하는 우리들이 일당을 해서 역사적인 회합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동지들이라고 부르는 기쁨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 '진보당 결당대회 개회사' 중
"죽산 선생께서 '내가 정치행동을 하면서 동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내가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하면서
눈시울이 붉혔던 그것이 제 눈에 선해요."
- 허영무, 진보당 서울시당 조직부장
자유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기존 정당에 맞서는
새로운 혁신 정당, 진보당의 출범!
그것은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대중적 지평이 그만큼 넓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진보당에 모든 혁신 세력들이 참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보당은 혁신의 기치를 높이 걸고 양심에 따른 선거 운동을 했습니다.
3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부각된 평화통일론은 진보당의 가장 중요한 기치였습니다.
조봉암이 전향 직후부터 견지해온 '제3의 길'도 진보당 기치 아래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띄게 됩니다.
"뭉치자 혁신세력" "이룩하자 평화통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같이 거부하고 청산하는 동시에
우리들의 이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새 이상을 파악하고 이론적으로 뭉친 정당은
필연적으로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대중의 전위대가 되는 것입니다."
- 조봉암
"피해대중이라고 한 것은 그 당시에 국민 대다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관료 독점 자본주의가 완전히 지배를 하고,
나머지 국민은 전부가 피해대중에 속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 정태영 박사
또 하나의 중심 정책은 '수탈없는 계획경제'였습니다.
이것은 연도별 경제 발전 계획을 세우되
국가의 자본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제를 적절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당이 어떤 파벌이나 지역에 근거하기보다는
당시의 국민 대중이 원하는 정책을 파악해서
그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당을 꾸려가고 정치를 한다라는 부분이
역시 저는 진보당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태균 교수
그러나 진보 세력의 결집은 이승만 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창당 대회 직후부터 진보당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당 등록증은 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교부 받을 수 있었고
지방에서 열린 지구당 결당대회는 깡패들의 난립으로 제대로 치뤄지지도 못했습니다.
"전북도당에 갔을 때는요, 꼭 죽게 됐다고.
또 그 쪽에 테러, 밤에 나타나는데 말이야
'야 이 공산당 새끼들아' 하면서 불 끄고 그래서
그때 내가 혼자 잤으면 죽었는데, 둘이 잤거든요.
내가 같이 잤던 사람이 밤에 테러단이 들어와 때리니까 저항했단 말이에요.
나는 그 틈을 타서 속옷 바람에 여름인데 뛰어서, 담을 넘어서 도망쳐서 살았어요."
- 전세룡, 진보당 조직차장
57년부터는 조봉암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해 시월 혁신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박정호라는 인물이
위장간첩이라는 명목으로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검찰에서는 박종호와 조봉암의 연류설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해를 넘긴 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시경찰국 분실에서는
진보당의 강령을 공산당 이론과 연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체포된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고문도 행해졌습니다.
이것은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진보당 간부 전세룡의 수사를 맡았던 서울시경 수사관 한승격은
지난 99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당시 일을 고백하며 사죄를 구했습니다.
"진보당 사건은 조작됐다" - 1999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
"나를 고문한 사람이, 한승격이라는 사람이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내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구요.
청와대(경무대), 특무대, 그 다음에 경찰, 이렇게 합동으로 해서 청와대(경무대)에서 회의를 했는데,
조봉암이가 5.15 대통령 선거 때 표가 너무 많이 나와서
1960년 다시 선거하게 되면 그때는 이걸 막지 못할 거 아니냐,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 전세룡
진보당 사건이 터진 직후인 58년 1월 14일. 이승만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무대에서 이 사건을 보고받은 이승만은 조봉암을 두고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조사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
- 신두영 '제1공화국 국무회의' 비망록
그리고 일 년 뒤, 대한민국 사법부는 법의 이름으로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조봉암(曺奉岩) 양명산(梁明山)에 사형'
- 진보당 사건 대법원 최종 선고, 1959년 2월 27일
진보당의 강령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간첩 조봉암이 조직한 단체라는 이유로 진보당도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습니다.
진보당의 정당 등록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기도 전에 취소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다른 정당들은 입을 닫았습니다.
"진보당에 대해 탄압이 들어오고, 조봉암에 대해서 탄압이 들어오는데,
이게 혁신세력이라고 해야 사실 많지도 않은데,
이 세력마저 분열되어 있으니까 힘을 모아서 여기 대항하는 힘을 만들 수가 없는 겁니다."
- 박태균 교수
대법원에서 재심 청구를 기각한 바로 다음날. 7월 31일 조봉암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었던 곳은 서대문형무소의 좁은 감방이었습니다.
막 독립운동에 눈을 떴던 21살 시절 1년 동안 수감되어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던 곳.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조봉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형 당한 지 45년. 지금 조봉암은 망우리 공동묘지 한 켠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 옆에 세워진 그의 비석은 그의 인생역정 한 줄도 새기지 못한 채
백비로 남아있습니다.
이 백비는 지금 조봉암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봉암씨 같은 사람이 있음으로써 그 시기에 혁신정당이라는 게 싹이 텄고
또 가장 무소불위, 못하는 일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절대권력,
거기에 도전해서 목숨을 건 거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사람이,
또 그렇게 싸운다고 해도 대중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은 전무후무했다, 그 시절엔..."
- 임홍빈, 당시 중앙일보 기자
"대한민국 역사상 진보당만큼 정책을 선명하게 내세우면서
그 정책으로써 또 개혁을 가지고 얘기를 해나가는 정당이 얼마나 있었는가 하면
저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진보당은 거기에다 대중성까지 갖춘,
스스로 자기들이 대중적인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가지고 평가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박태균 교수
독재와 극우 반공체제가 확립되어가던 시기 그 흐름을 거슬러 올랐던 조봉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그의 꿈과 좌절을 담담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길 바랄 뿐이오."
조봉암은 자본독재도, 공산독재도 아닌 제3의 길을 택했고
그 댓가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국의 진보세력도 그 맥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에 대한 사형선고는 한국의 진보에 대한 사형선고였던 셈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다시 진보를 말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조봉암, 개인에 대한 평가도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봉암은 정말로 북한과 협력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던 간첩이었을까요?
아니면 좀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했던 진보적인 정치인이었을까요?
그 해답은 반세기 전 조봉암이 외쳤던 진보의 울림,
그 울림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계급을 살찌우는 대신 일반 서민들이 잘 사는 나라.
모든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 문성근, KBS 인물현대사 31회를 보고(늘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박정희가 정권 지키기 위해서 죽인 사ㅣ람이 하나둘이 아니지요 그중에 재산 뺏앗기 위해서 한 짓거리도 있고 아직도 순진하고 세뇌된 우리 국민들은 박정희가 위대 하다고만 하니
그래도 아닌 분들이 계시긴 하지요. 아주 소수이시지만.
그런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공무원 조직이 바로 검찰이지요~~썩을대로 썩어 도려내쟈야만 이땅에 민주주의와 인권이 꽃피는 나라가 됩니다^^
그런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랍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일제의 군 교육이 낳은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고 출세지향적인 한 인간이 저지른 우리 민족의 수난사인 비극이 ,현재도 진행되는 역사이기도 하지요. 법조계도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도록 제도를 바꾸어야 되는것이 오늘의 검찰을보면 생각납니다. 검찰은 공부 잘하는 기계 그리고 출세지향적인 기계와같은 인간으로 채워진것은 자본주의와 출세 지향적인 인간을 길러 왔기에 인간적이지 못하다는것이지요! 하긴 인간이란 천차 만별하니까 정답은 없으니.....!!
일제식 군교육의 비극이라, 맞는 말씀이십니다.
한국이주입식교육이팽배하죠.대통령후보들은이런거말도안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