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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에페 2,1-10
복 음 : 루카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루카 복음서 12장의 본문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부자는 곳간을 크게 짓고 재산을 쌓아 두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고,
쌓아 둔 재물은 그를 죽음에서 구하여 주지 못합니다.
죽음을 걱정하거나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죽음을 미루고
자기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12,25 참조).
복음을 약간 뒤집어서 읽는다면,
오늘, 들에 서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수명을 늘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12,31 참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고 아버지께서 돌보십니다.
오늘 밤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모르시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나라를 찾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재물은 어떻게 할까요?
같은 장에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푸는 것이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2,33 참조).
곳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자선으로 베푸는 것이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고,
그렇게 쌓아 둔 재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12,34).
자선을 베풀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죽어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 강원도에서의 강의를 마치고 영동 고속도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앞 차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좌우로 흔들리더니 차선을 벗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졸음운전인 것 같아서 경적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경적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뒤에서 경적을 울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차선을 옮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 차선을 달리던 트럭과 추돌했습니다.
정말로 큰 소리와 함께 문제의 승용차는 몇 차례 굴러서 보호난간에 부딪힌 뒤에 멈췄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혹시 몰라서 차간 거리를 두었고,
또 옆 차선으로 옮겼기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갓길에 차를 대고 119에 사고 신고를 한 뒤에, 사고 차량으로 다가가니
다행히 운전자가 별 이상 없이 창문을 통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섬뜩합니다.
만약 차간 거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또 차선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 역시 사고 당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불과 몇 초의 차이로 말이지요.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최악의 시간도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항상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정도면 괜찮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유산 분배에서 불합리한 부분을, 형의 정의롭지 못함을 고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하시면서,
세상의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해주십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전부이고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삶을 마친 뒤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임을 이야기하십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삶을 찰나(刹那)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매우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을까요?
이 세상 삶 안에서만 필요한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러합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중재해 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의 옳음을 밝혀주며,
자신을 지지해 주고 상대의 부당함이 들추어지기를 도모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거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기고 의탁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도와달라고 간청 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 아우는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판과 중재를 요청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탐욕이 아닌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걸려 있고,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렇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에게 걸려 있듯,
사람의 생명 또한 자신에게 걸려 있지 않고 주인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할 일입니다.
진정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주인으로 중히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 주님께 소유 당한 사람만이 탐욕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탐욕을 채우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 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 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 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소유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더블류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 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 재물을 가진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고,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잘 실행하는가에 영원 생명에 가까이 갑니다.
그중 물질에 대한 성경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다”(잠언15,16).
“돈을 좋아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5,9).
“참으로 재물은 믿을 수 없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 수 없다”(하바2,5).
“큰 재산은 소심한 사람에게 걸맞지 않다. 구두쇠에게 재물이 무슨 이익을 주겠느냐”(집회14,3).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예지를 포기하지 마라(잠언23,4).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비12,8).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생명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기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때로는 욕심을 부려야 하겠지만,
정당한 욕구의 수준을 넘어 욕심을 부리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
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1,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투자된 비용도 많았고, 직원도 많아서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식당에 가서 축성하였고, 직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바쁘고, 지친 형제님에게 수호천사가 있었습니다.
수호천사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형제님의 종교를 따라서 천주교를 택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습니다.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 형제님의 눈빛은 피곤해 보였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자매님을 만나면서 형제님의 눈빛은 밝아졌고, 생기가 있었습니다.
자매님의 권유로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고 합니다.
술을 끊으니, 정신도 맑아지고 사업의 전략도 새롭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는 재물이 목적이었는데, 자매님을 만나면서 신앙심도 깊어졌고,
봉사하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년에 자매님이 세례를 받으면 두 분이 혼인성사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가게 축성이 아니라, 혼인의 축복을 할 것 같습니다.
면담도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자매님은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목사님과 결혼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목사님을 따라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어려서 성당에 다녔기 때문인지 목사님의 아내로 사는 것이 늘 어딘가 불편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불편함을 아시고 자녀들을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성당에 다닌다고 하기에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쁜 손자가 성호경을 하면서 기도하는 영상도 보았다고 합니다.
아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생각도 났다고 합니다.
남편이 투병 끝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이제는 자유로워지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매님은 한국에 다녀오면 성당 옆으로 이사 와서 앞으로는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개신교와 천주교라는 건물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누구의 아내’라는 직분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매님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수호천사를 만난 형제님을 생각합니다.
재물을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고달프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자매님과 함께 성당에 다니면서 사업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재물보다 더 소중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자매님을 생각합니다.
누구의 아내라는 직책을 떠나서 하느님과 대면하면서 신앙의 기쁨을 찾을 겁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선행은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행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행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선행은 연옥에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선행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도, 자선, 희생, 봉사, 나눔, 친절, 온유, 겸손도 선행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여유가 없어도,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우리는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선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조욱현 토마 신부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절) 그는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 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둔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 영광스러운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누가 그런 사람일까?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
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돈 외에도 소중한 가치들이 참 많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피정 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을 일주일 내내 동반해 드리고 왔습니다.
수도회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걸어가는 형제들이라 남 같지 않았습니다.
때로 존경스럽기도 하고, 때로 측은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약한 수도자로서, 이 어려운 시대 어떻게 가난을 살 수 있겠는지?
이토록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가난의 가치를
어떻게 세상에 설명할 것인지 고민도 참 많이 했습니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의 인생 전체가 일관되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가 싶습니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그리고 공생활 기간 내내 가난하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는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가난의 끝판 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표현을 하시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랑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 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 그리고 가진 바가 없어 나눌 게 없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저 너머 세상, 하느님 나라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는
몇천 배, 몇만 배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부자들을 멀리 해서도 안 됩니다.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재물이 여러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영적으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됩니다.
감동을 줘서 많이 내어놓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입니다.
부자는 크게 두 가지 부자로 나눠집니다.
안하무인의 부자들과 착한 부자들로 나눠집니다.
절대로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경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평생 땀흘리고 정직하게 모아서 일어선 부자들, 박수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한 구원의 길을 선포하도록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12,20)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매 순간 감사하며 주어진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실 때 바라시는 것이 있었다면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 삶의 수많은 어렵고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살겠지만,
그래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행복을 어떻게 찾고 사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찾고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몬의 가게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는 미하일,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땅으로 쫓겨난 천사인데
그가 풀어야 할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그 수수께끼는 바로,
‘사람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이며,
이 세 가지 문제를 풀고 나면 미하일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직접 한번 이 문제를 풀어 보시고, 발견한 해답대로 산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직접 한 번 풀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의 생애 동안 이런 질문을 받은 기회가 없었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혀 모른 채
큰 창고를 다시 짓고 곡식과 재산을 쌓아 둘 궁리를 하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자기 위로이며 최면인지도 모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12,9)
하지만 그의 바람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해 뜨는 광경을 보지 못한 채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깨닫지만,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는 ‘지금, 여기’ 뿐입니다.
한 시간 후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랑하기도 충분하지 않은 세상에서 미워하며 살렵니까?
행복하기도 힘든데 불행하며 살아가렵니까?
행복한 삶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이고,
이런 삶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지름길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아주 큰 부자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생전에 선행을 한 것이 있어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장서서 천국을 안내하고 부자가 살게 될 집을 찾아갑니다.
역시 천국은 천국이었지요.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부자는 연신 벙글거렸습니다.
‘역시, 천국은 다르군. 아, 여기서 살게 되었다니 정말 좋구나.’
그런데 천사는 그 으리으리한 저택들을 계속 지나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자는 더 좋은 집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갔습니다.
둘은 다음 마을로 들어섰는데 이 마을에는
50평, 100평이 넘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도 살만하겠군.’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사는 그 마을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저만큼 달동네가 나왔습니다.
‘설마 저곳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가는 부자에게
천사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세워진 어느 쓰러져 가는 판잣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가 당신이 살 집입니다.’
화가 치민 부자가 따졌습니다.
‘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지상에서 살 때 호화주택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니 천국에 와서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자 천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지상에 살면서 보내 준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니까요.’』
혹여 어리석은 부자처럼 불량 자재를 하늘로 배송하지 마세요.
그리고 여유 자본이 있으시다면, 제발 은행의 DLF(파생결합펀드), DLS(파생결합증권)와 같은 상품에
절대 투자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사실 은행이나 보험 회사의 상품도 안전하지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가장 위험 부담도 낮고 이자율도 높은 보험 상품은
미래가 아닌 지금 자신의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지 말고”(12,21참조),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입니다.(마태6,20)
그것은 선행을 베풀고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입니다.
그래서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12,2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지 않나요.
물론 자기 죽을지 모르는 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모아 둔 돈이야 배우자나 자식들이 차지하긴 하겠지요.
결국 그렇게 죽자살자고 돈을 축적하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나요.
한 번뿐인 인생살이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들에게 남기는 게 전부라면
그렇게 살다 죽으시지요,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한번 진솔하게 물어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게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인지 말입니다.
부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