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 금산 보리암 1, 스님 두 분 이야기
오랜만에 나의 글 하나 올립니다. 날씨가 풀린다는 우수가 2월 19일인데 월말이 되니 금년 추위가 지나가는 것 같군요.
이번 설(2월 1일)을 맞아 남해로 내려가 다음 날 금산 보리암을 찾았습니다. 지난 25년간 수시로 남해를 찾았지만 보리암에는 별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3번째인가 합니다. 어머니와 관련된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아서입니다. 15(화)일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22(화) 덕수궁에서 열린 박수근 전시회를 구경했습니다.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 같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금산을 중심으로 전시회 구경을 엮어 그동안 뒤얽힌 마음을 카타르시스하려 합니다.
25년 전(1998년) 따뜻한 곳을 찾아 통영과 남해에 터를 잡은 뒤 오히려 고향 고성보다 남해에 더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통영은 고성 산소를 찾을 때 주로 가지만 초등학교 이전부터 삼촌이 근무하시던 곳이고 또 고성에서 60리 길이라 구경할 할 만한 곳은 거의 보았습니다. 남해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었던 곳입니다만 25년 전 처음 찾았습니다. 이제는 볼만한 곳은 거의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금산 보리암은 선 듯 가게 되지 않더군요. 남해라는 섬은 400㎢정도, 간단히 계산해서 20km x 20km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산은 꽤 높습니다. 700m가 넘는 산이 망운산(786m)과 금산(705m) 등 2개가 될 겁니다. 백운대는 836m이니 섬에 있는 산으로서는 꽤 높은 셈이지요.
우리나라 섬에 있는 산 중에서 제주도 한라산과 울릉도 성인봉만이 남해 산들 보다 높습니다. 오르기도 힘들지요. 금산은 남해의 남쪽 끝 부분에 있습니다. 오래 전 해수욕장과 송림으로 유명한 미조에 갔다가 뒷길로 금산에 올라 보리암을 찾았는데 너무 힘들더군요. 두 번째는 신우재 전 글방 회장님 차를 타고 금산 초입 주차장에 가서 셔틀버스로 보리암 입구까지 간 다음 다시 약 20분 걸었지요. 별로 먼 거리도 아닌데 포장이 되지 않은 탓인지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년퇴임 뒤였으니 기력이 많이 약해진 탓이었겠지요. 이번엔 동행한 친척 분이 가자고 해서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나섰습니다.
금산 보리암이라..... 나에게 잃어진 추억의 조각같이 아련한 미련이 남은 이름입니다. 어머니가 한 때 다니시던 절이었지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어머니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불교에 심취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이나 청담스님 같은 이름 높은 분들도 자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철스님은 속세 여제자 중 첫째라고 했다더군요. 한번은 이야기 도중, 어머니가 ‘스님, 저는 이제 정말 속세의 인연을 끊었습니다.’라고 했더니 주장자로 어깨를 내리치면서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고 야단쳤다더군요. 주장자는 스님들의 지팡이입니다. 자식을 끼고 살면서 무슨 헛소리냐는 말이었겠지요. 얼마나 힘차게 내려쳤으면 한동안 어깨가 욱신거렸다고 합니다.
고성과 가까운 문수암에 계시던 청담스님은 나도 자주 친견했습니다. 인연이란 게 참 묘해서 출가 전 낳은 딸의 딸이, 그러니까 청담스님의 외손녀와 잡사람과 여고동창이어서 지금까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2020년 10월 말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집사람이 강남 삼성병원 빈소에 문상 갔는데 마침 옆방이 이건희 회장의 빈소였다고 하더군요. 고인의 사위가 삼성에서 고위직을 지냈지요. 여기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았지요. 이것이 지금까지 계속된 우리가족의 판데믹 수난의 시작입니다. 1980년 영국에서 돌아와 문수암에 갔더니 청담스님 사리탑이 있더군요. 지금은 절 앞까지 차도가 닦여 있지만 1950년대에는 절 앞에 가파른 오르막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오르막 옆에 조그만 회강암 언덕이 있는데 사리탑이 여기 있습니다. 그 밑에 있는 석굴에서 스님 한분이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1)
사진 1, 청담스님 사리탑과 그 밑에 있는 석굴에 갔을 때는 1980년대 초 사진에 별로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쳤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보현사에 있는 걸 사리탑이라 하는데, 정천스님이 다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사리탑은 복사가 안되어 사진을 찍은 겁니다.
이제 청담스님 다음 세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청담스님에게는 많은 불제자가 있지만 그 중 두 분이 유명했습니다. 한 분은 절의 관리를 잘하여서 속세와 관계가 좋은 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수도에 힘쓰는 분이었습니다. 관리를 잘하는 분은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아 일찍부터 조계종의 큰 사찰 주지로 전전한 뒤 조계사 중앙본부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1980년 군부의 법난(法亂)으로 고초를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그 스님의 법명을 알지 못하겠군요.
두 번째 분은 정천(正天)스님이신데 오늘 이야기의 중심인물입니다. 국민학교 3-4학년 때 고성에 뇌염이 창궐하여 우리 옆집에 사는 친구가 죽자 나는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문수암에 피접을 갔지요. 이때 정천스님은 절 아래 토굴에서(위에서 말한 석굴이 아니고) 혼자서 정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상좌가 식사만 날라 주어 뵐 기회는 없었지요. 스님은 고성 5일장이 서는 날 간혹 읍내로 내려와서 차부(버스 터미널) 부근에 있는 신도 한분 집에 머물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이 집으로 가곤했습니다. 고성국민학교에 나와 같이 반에 다니던 애가 하나 있어 잘 어울렸지요. 그러면 스님은 5-6명 애들을 모아 재미난 이야기를 해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은 애들에게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훌륭하냐?’고 묻더군요. 모두들 ‘부처님이요’ 하거나 ‘대통령이요’ 등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 가지 답이 있었지만 말하기가 쑥스러웠습니다. 스님은 가만히 있는 나에게, ‘너는?’ 하기에...... ‘내가 제일 훌륭합니다.’라고 했습지요. 약간 놀라는 눈치를 보이던 스님은 ‘왜?’하고 재차 물었습니다. ‘공부하면 나도 부처님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불교를 많이 알아서 이렇게 대답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모든 인간이나 생명에는 불심이 있다. 공부하여 깨우치면 부처가 된다,’느니, 석가모니 이야기 중 ‘천상천하 유아독존’ 등의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나를 무릎에 앉히더니 ‘불연(佛緣)이 깊은 애구나. 열 살도 안 된 게 이런 말을 하다니...’ 하면서 그 뒤 나를 자주 찾으셨습니다. 아마도 자기 제자로 달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마터면 진짜로 중이 될 뻔 하였지요. 이후 나 스스로 전생에 동자스님이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족들 간에 전생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서슴없이 ‘동자승’이라 말합니다. 내가 중학교 때 막내 외삼촌이 정천스님 밑에서 상좌로 1년 동안 승복을 입고 생활을 했으니 나 대신에 중노릇을 한 셈이 되었지요.
정진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면, 즉 득도하여 부처가 되기 직전에 마구니(魔仇尼)들이 어김없이 나타나 성불을 방해한다고 합니다. 정천스님이 토굴에서 발작을 일으켰다는 데 바로 이 경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칼로 스스로 몸을 찌르고 자해를 해서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석가모니도 마구니들과 마지막 전쟁을 치러 이들을 물리치고 성불합니다. 정천스님은 그러지 못한 것 같네요. 그리곤 병원에 입원하여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뒤 금산 보리암에 갔다가 성불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다시 고성 문수암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보리암은 정진의 도장이고 문수암은 수려한 도장이라고 합니다. 문수암에서 내려다보는 앞바다는 다도해의 절경입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늘어서 호수와 같이 조용합니다. 흔히들 다도일경(多島一景), 다도해에서 제일 멋진 곳이라고 하지요. 이런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면 정진에 방해가 되겠지요. 예술가나 시인이 노닐기는 좋은 장소일 겁니다. 저녁에 산을 내려와 동네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 하고 적당히 취한 기분에 다시 산을 오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앞이 탁 트인 망망대해입니다. 수평선이 있지만 운무로 인해 수평선까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다라’....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인상적이진 않습니다. 오히려 광한리와 영도 사이 수평선이 펼쳐지고 그 중앙에 오륙도가 떠 있는 부산고 교정이나 목표 유달산에서 내려다보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수역이 더 아름답지요. 금산 앞바다는 마음이 거칠 것 없는 바다와 하늘을 자유롭게 노닐면서 정진에 성공할 수 있었겠지요.(사진 2)
사진 2, 고성 문수암과 보현암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절경
보리암 대웅전 옆으로 ‘태조 이성계의 수도장’이란 팻말이 있습니다. 이성계와 금산의 이야기를 일찍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수도하여 ‘왕이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새 왕조를 연 후에 금산에 대해 보은을 하고 싶어 비단으로 이 산을 둘러싸려 했답니다. 그러나 비단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질 것이라 산 이름에 비단 금(錦)을 넣어 금산(錦山)이라 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방이 근거지인 이성계가 무슨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요. 서해로 올라온 왜구와의 전투에서 이긴 뒤 곧 바로 개성으로 갔을 터인데. 처음에 왔을 때 이 수도장을 꼭 보고 싶어 약 70m아래로 내려가니 길이 가팔라 족히 500m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조그만 정자 같은 게 있었는데 구글에서 사진을 찾아 올립니다. 당시 기도처가 있었다고 해도 토굴이나 가마니로 덮은 움막이었을 터인데 왕조를 세운 뒤 사뭇 멋지게 바꾼 것 같네요. 또 이번 여행에서는 수도도량이라고만 알고 있던 보리암 옆 바다가 문수암에 못지않은 절경이었습니다. 사진에서 점같이 보이는 것이 독수리 비슷한 새 모습입니다.(사진 3, 4)
사진 3, 이성계 수도장
사진 4, 보리암 입구에서 본 다도해. 검은 점은 키워보면 독리리 같이 새입니다.
정천스님에게 뭘 잘 만드는 재능이 있습니다. 공작기기를 잘 다루고 손수 집도 지었습니다. 문수암에서 300m 정도 옆길로 가면 보현암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정천스님이 여동생인 월정스님을 위해 지은 것인데 절벽에 붙어있는 문수암보다 크고 아름답습니다. 문수암은 옛날에 지은 것이라 건물이 작고 물이 부족하여 절 뒤 절벽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먹거나 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 km정도 가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오곤 했습니다. 아찔한 낭떠러지 위에 있는 절벽에 붙은 길이 아주 좁고 험했지만 머루나 으름덩굴 나무에 열리는 얼음이라는 맛있는 과일이 많아 종종 나가곤 했지만, 어머니가 위험하다고 말리셨지요.
절 차체의 모습도 아름다운 보현암은 차가 절 안까지 들어갑니다. 여기서 보는 다도해 광경은 문수암보다 좋지요. 문수암과 보현암이란 이름은 유래가 있는데.... 보현암은 비구니들을 위한 절입니다. 지금은 보현사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1980년대 중반 어머니와 함께 여기에서 하루 밤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창문을 열고 보니 말 그대로 ‘휘영청 달이 밝고’ 그 아래 다도해의 밤바다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더군요. 10살을 넘긴 집 아이가 영국에서 배운 리코더를 꺼내 한 곡조를 뽑더군요. ... 흥취를 좀 아는구나, 커서 나의 술친구가 되겠구나 생각하고 초등학생 때부터 식사 때 술을 주었습니다.
보현사에서 잔 다음날 인 듯합니다. 정천스님이 수도하는 석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옛날 득도를 앞두고 마구니와 싸운 토굴은 그때 통시(변소) 아래 어디에 있었다고 하는 데 아마도 오늘날 보현사로 가는 길 부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도입되기 전 통시칸이라 부르던 사찰의 변소는 청정도량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똥을 퍼서 채소를 키우는 거름으로 쓰기 편하도록 보통은 언덕 바로 위에 약간 앞으로 끌어낸 구조입니다. 한번 변소에 가려면 절문을 나서 한참 내려가야 했습니다. 절 부근 아무데나 일을 보면 도량을 더럽힌다는 경고를 수없이 들어 꼭 통시칸을 찾았지요. 해인사 통시칸에서 똥을 누면 한 시간이 지나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당시 절간의 변소는 멀리 있고 또 깊었습니다. 아래는 똥통이 있고 높은 언덕 위에서 일을 보는 거라 조심스러웠지요.
우리에게 보여 준 토굴은 정천스님이 스승이신 청담스님 사리탑을 세운 바위 언덕 아래를 파서 만든 수도장이었습니다. 혼자서 사용하기에 넉넉한 공간으로 최신식 장비를 모두 갖추었더군요. 바위틈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아 차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추울 때 어떻게 지내느냐 물었더니 보일러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나무와 기름을 겸용으로 쓰는 보일러를 손수 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로 기름만 쓴다고 하네요. 산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것이 나무인데 그래서 기름과 나무 겸용보일러를 개발했는데. 나무를 거두어 올 인력이 없고 또 인건비가 기름 값보다 비싸다는 겁니다. ‘어휴,..... 내가 상좌 노릇했다면 지금도 나무나 베고 있었겠구나,’라고 속으로 웃었지요. 토굴 밖 바위 위에는 회색 이끼가 낀 둥근 모양의 커다란 자국이 여러 개 있는데 스님은 이걸 공룡 발자국이라고 했습니다. 부산대 지질학과 교수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고성은 공룡의 고향이죠. 문수암은 공룡 박물관이 있는 상족암 쌍발리에서 별로 멀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그런데 스님이 2006년 돌아가신 뒤 청담스님 사리탑으로 들어가는 곳에 철문이 만들어져 굳게 잠겨져있고 그 아래 정천스님 수도석굴은 방치되어 있더군요.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이런 곳에 처박혀 수도하는 스님들이 몇 분이나 되겠어요? 나에게 주면 딱 좋은 것인데..... 아마도 정천스님을 보현사에서 모시고 문수암과 완전히 분리되면서 문수암은 청담, 정천 두 분의 자취를 지우려한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2022.2.25.)
사진 1, 청담스님 사리탑과 그 밑에 있는 석굴에 갔을 때는 1980년대 초 사진에 별로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쳤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보현사에 있는 걸 사리탑이라 하는데, 정천스님이 다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사리탑은 복사가 안되어 사진을 찍은 겁니다.
사진 2, 고성 문수암과 보현암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절경
사진 3, 이성계 수도장
사진 4, 보리암 입구에서 본 다도해. 검은 점은 키워보면 독리리 같이 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