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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서소리 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인문학연구소
“가을바람 생각이노니 돌아가는 친구에 전해 주리”
왼쪽은 전라도, 오른쪽은 해남 지역이다. 붉은색 실선은 도로, 흑색 점선은 해로이다. 상단 중앙에 대흥사(대둔사)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각각 관두, 어란, 이진으로 이어져 있는데, 어란과 이진 모두 제주를 왕래할 수 있는 포구였다. 관두에서 시작되는 점선은 제주까지 이어져 있다. 사진 출처=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
제주와 육지 오가는 사람들
발길이 자연스럽게 닿을
뱃길 안전 부처님 전에 발원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을 연결하는 여러 간선도로가 있었다. 그중 제주로(濟州路)는 한양에서 출발해 과천, 수원, 삼례, 정읍, 나주, 해남을 거쳐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였다. 이 길의 육로는 해남의 관두포(館頭浦)까지 이어졌으며, 제주로 향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타고 제주로 이동했다. 해남 대흥사(大興寺)는 이러한 제주를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사찰로,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안무어사(安撫御使)에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 그는 1601년 8월 13일 한양에서 출발하여 9월 10일 해남에 도착하였으며, 제주로 출항하기 위해 순풍(順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해남의 문인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 1564-1618)의 제안으로, 마침 그곳에 와있었던 또 다른 관리 이천(梨川) 이홍주(李弘胄, 1562~1638)와 함께 장춘동(長春洞)을 유람하게 되었다.
“아침에 흐리고 늦게는 비가 종일 내리다. 식사를 하고 나서 백윤(이홍주), 선명(백진남)에게 대둔산 장춘동【온 산에 동백나무가 가득하여 사철 푸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장춘이라 한다】을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두륜사 침계루 아래에 앉아 시냇물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비를 무릅쓰고 현아(縣衙)로 돌아왔다.” 김상헌, <남사록(南錄)> ‘12일 병오(丙午)’ (홍기표 역, <역주 남사록>, 제주문화원, 2008.)
장춘동은 대흥사가 자리한 곳으로, 세 사람은 대흥사에 들러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정의(情誼)를 나누었다. 이때 그들이 나눈 시는 <대둔산수창록(大芚山酬唱錄)>이라는 시집에 담겨 전해진다.
一入長春洞(일입장춘동) 溪樓已夕暉(계루이석휘) 松潭路非遠(송담로비원) 乘月且同歸(승월차동귀) “한번 장춘동으로 들어가노니/ 침계루는 이미 석양이 들었구나 / 송담이 멀지 않으니 /달빛 받으며 또한 함께 돌아오네” - 선명 백진남
日下無來雁(일하무래안) 天涯怨落暉(천애원락휘) 秋風多少思(추풍다소사) 寄與故人歸(기여고인귀) “해 지는데 날아오는 기러기 없고 / 하늘 끝에서 지는 석양 원망하네 / 가을바람에 많은 생각이 이노니 / 돌아가는 친구에게 전해 주리라” - 백윤 이홍주
海雨鳴山竹(해우명산죽) 重雲掩薄暉(중운엄박휘) 居僧苦相挽(거승고상만) 路濕不須歸(로습불수귀) “바다 비는 산죽을 울리고 / 짙은 구름은 지는 석양 가리었네 / 스님도 애써 서로 붙잡으며 / 길 축축하니 돌아갈 필요 없다 하네” - 숙도 김상헌
= <대둔산수창록(大芚山酬唱錄)> ‘다시 두 형에게 드리면서 화답을 구하다(再呈兩兄求和 재정량형구화)’ (박종훈 역, <장춘동수창록>, 한국학호남진흥원, 2022.)
왕래한 사람들 다양한 사연
단서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
역사적·문화적 의미 ‘이야기’
훗날 백진남은 이때 주고받은 작품들의 모사본을 만들어 스님에게 주면서 절의 벽에 새기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대흥사의 역사와 사적을 기록한 <대둔사지(大屯寺誌)>(19세기)에는 이때 주고받은 시가 수록되어 전한다.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 박사륜(朴師崙, 1716-미상)은 1769년 5월, 제주목사 남익상(南益祥)이 진휼곡(賑恤穀)을 과다하게 청구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제주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당시 그곳에 머물고 있던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을 만났다.
연담의 문집에는 박사륜이 제주에 왕래할 때 그를 위해 지어 준 두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한 편은 박사륜이 제주로 출항하기 전에 지어 준 것으로, 악천후로 인해 출항이 지연된 상황을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은 박사륜이 제주에서 돌아온 후에 지어 준 것으로, 그에게 ‘고씨의 굴’과 ‘노인성’에 관해 물으면서 제주의 경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씨의 굴은 삼성혈(三姓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주의 시조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솟아난 곳이라 전해지는 구멍이다. 노인성은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별로, 조선시대에는 특히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천문 현상으로 여겨졌다.
繡衣返自瀛(수의반자영) 幾日泛重溟(기일범중명) 百蒼生活(백로창생활) 三山聖化明(삼산성화명) 有無高氏穴(유무고씨혈) 觀否老人星(관부로인성) 却笑千年事(각소천년사) 徒緣採藥行(도연채약행)
“수의어사께서 제주에서 돌아오시느라 / 며칠이나 저 큰 바다에 떠 있으셨나 / 배를 타는 모든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었고 / 삼신산에 임금의 교화를 밝히었네 / 고씨의 굴이 과연 있었나 없었나 / 노인성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 천년의 사적이 오히려 우습다 비웃는 것은 / 약을 캐러 간 일 부질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네” - 연담 유일,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 ‘박 어사가 탐라에서 육지로 나왔기에(朴御史自耽羅出陸박어사자탐라출륙)」(하혜정 역, <연담대사임하록>, 동국대학교출판부, 2020.)
한 층 깊이 조명될 ‘대흥사’
유자와 스님들의 교류 풍성
고승 문집 등 유산도 ‘다채’
한편, 대흥사는 “제주의 관리들이 멈추어 복을 비는(濟星停而祝釐,제성정이축리)” 곳이기도 했다. 이는 대흥사의 승려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 스님이 그의 시 ‘산수가(山水歌)’에서 대흥사를 표현한 대목인데, 그의 또 다른 저술 <대둔사지약기(大芚寺志記)>에서도 같은 맥락의 기록이 등장한다.
“또 제주와 서로 바라보는 곳이라, 제주목사, 제주판관, 대정현감, 정의현감, 네 사신이 입숙하여 불공을 드리고 배에 오르는 요로이다.” - 범해 각안,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대둔사지약기(大芚寺志記)’
(대둔사지)에 수록된 김상헌(좌면 3행)과 백진남(왼쪽면 마지막행)의 시는 “시인과 시승이 남긴 시가 처마 밑에 줄줄이 달려 마룻대를 짓누르고 있다”면서, 대흥사를 소재로 한 여러 인물의 시를 수록하였다. 김상헌과 백진남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김상헌의 시는 에 수록된 위의 시와 동일한 작품이다.
대흥사 승탑원. 사진=국가유산청
조선시대 제주의 행정구역은 1목(牧) 2현(縣)의 체제로,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이 설치되었으며, 제주목에는 제주목사와 제주판관이, 대정현과 정의현에는 각각 대정현감과 정의현감이 파견되었다. ‘대둔사지약기’는 이러한 제주의 주요 관리들이 공무 등의 이유로 육지와 제주를 오갈 때, 배에 오르기 전 대흥사에 들러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당시 육지와 제주를 오가는 바닷길은 언제나 표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이는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제주의 관리들은 바다를 건너는 위험한 여정을 앞두고 대흥사에서 기도를 올리며 앞으로의 항해에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하기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대흥사는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사찰로서, 이상의 기록들은 이 길을 왕래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그 단서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자료들이 더 발굴된다면, 대흥사가 지닌 역사적·문화적 의미와 그 속에 담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층 더 깊이 있게 조명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소리 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인문학연구소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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