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판의 신라자성 이족의 시조론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책소개
서양의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옛 선조님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조상님들의 말씀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조상의 말과 말은 글로 생생히 살아 우리 앞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광이 문중만이 갖고 있는 조상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요 자랑거리란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번 연구에서 80여 건의 관련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불과 5~6건을 제외하고는 둔촌시조, 둔촌 실 시조 내지 이에 상응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둔촌 선생이야말로 우리의 시조가 되실 수밖에 없는 분일뿐더러
둔촌시조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시조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이셨습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묵헌(만운ㆍ萬運)은 석담 선생 7대손으로 정조 때 문과 급제했으나,
4대조 정재공(담명)이 신임옥사를 당하여 형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는 과거 숙종연간의 경신환국 때 희생된 부친(원정)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묵헌공은 이 같은 조상 때의 해묵은 일로 벼슬길이
막혀 조상의 땅 칠곡에서 선비로 은거하였다.
그 후 60세의 늦은 나이에 중앙의 인정을 받아 안의 현감에
이어 사헌부 지평에 오르고 더 이상은 오르지 못하였으나
천문, 지리, 역산, 명물(名物)에 밝았으며,
『묵헌집(?軒集)』을 남기었다.
조상의 일로 비운을 겪어온 묵헌 선생이기에
선대에 대한 흠모가 남달랐을 것이다.
묵헌은 석담에 이은 역대 조상의 유지를 몸소 이어받았다.
이에 따라 역대 선조가 남긴 ‘광이 시조 둔촌’과 관련된 문헌을
조상의 비문, 묘지, 행장 등에 적극
반영하여 11건이나 되는 관련 문헌을 문집에 담았다 .
이렇게 많은 문헌들이 인멸되지 않고 후세에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은 자신의 문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서 선생은 후세의
광이 정체성을 바로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_4) 묵헌 선생의 ‘둔촌시조론’ 중에서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선현의 어록(語錄)
둔촌 선생의 덕업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아서
백대에 길이 영원할 지어다.
뿌리가 깊고 근원이 멀면 가지가 무성하고
흐름은 긴 법이니, 우리가 줄곧 창대하여
대를 이어 침체치 아니한 것은
우리 조상이 여러 자손을 감싸
멈추지 않게 하시는 게 아닌가?
시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이 닦은 덕을 잊지 말고,
그 덕을 닦고 쌓아라.”
昭如日星百世以俟者非耶 故其根?源遠枝茂流長
綿延昌大繼繼不替者抑非 吾祖蓋覆其萬子孫勿替者也
詩曰 無念爾祖聿修厥德
1665년 예조정랑(휴징) 찬, 「둔촌시조비문」에서
둔촌을 시조로 하고, 생원공을 소자출로 정한 것은
우리 문중이 백세토록 바꿀 수 없는 규범이다.
以遁村爲始祖 以生員公爲遁村之所自出者
此固吾宗 百世不易之範也
「5대보」 범례에서
‘둔촌선생휘집 실위시조’를 쓰면서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자부심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써서 결과물이 책자로 나온다 해도 과연 누가 알아줄까 하고….
그러나 이 순간 불후의 명화 ‘천지창조’를 그린 어느 화가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높은 천장 바로 아래의 거치대 위에 4년간 꼬박 누워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꼼꼼히 그릴 때 지인이 물었답니다. “그렇게 구석구석까지
들인 정성을 누가 알아주겠나?” 그는 답했답니다. “내가 알아주네”라고.
저는 4년이 아닌 6개월여뿐, 나만이 아닌 근열 도유사가 알아주고 시하 총무가 도와주고….
이에 이르러 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았습니다. 그런 사명감이 오히려
일을 쉽게 해줄뿐더러 동기까지 유발시켜주었습니다.
따라서 이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족보상의 시조와 우리가 일상 부르는
시조와의 차이였습니다. 하나의 시조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종중인데 우리는 1종중에 2시조이니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1세가 시조이고 1대는 그 아들이라는, 즉 세와 대는 다르다는 잘못된
이론이 광복 후에 등장하여 이에 지대한 영향을 세상에 미쳤습니다.
다음으로는 엄연히 전해오는 생원공(휘당) 시조비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족보상의 둔촌시조가 실 시조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헛수고였습니다.
때문에 역대 조상들이 직접 쓰신 비문, 묘지, 행장, 제문 등의 문헌들을
중심으로 논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샛말로 팩트를 갖고 이런
문제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공허한 이론이나 원칙만으로 들이대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란 사실은 최초의 광이 족보가 나오기 80여 년 전부터
‘둔촌시조’라 표기한 비문이 연이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여정에 오른 기분이었습니다.
서양의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옛 선조님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조상...님들의 말씀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조상의 말과 말은 글로 생생히 살아 우리 앞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광이 문중만이 갖고 있는 조상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요 자랑거리란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번 연구에서 80여 건의 관련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불과 5~6건을
제외하고는 둔촌시조, 둔촌 실 시조 내지 이에 상응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둔촌 선생이야말로 우리의 시조가 되실 수밖에 없는
분일뿐더러 둔촌시조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시조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이셨습니다.
둔촌 선생의 위업이 너무나도 고귀하게 빛을 발하기에 그것은
어두운 밤하늘에 한 줄기 혜성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이 좀 들기도 했습니다. 조그마한 이 책자가 오히려 그 빛을 흐릴까봐.
이렇게 나온 이 책자가 나름으로는 힘들여 이뤄진 결과물이지만,
아직도 바르게 고쳐야 할 부분이나 내용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 부족한 부분을 잡아주고 채워주실 몫은 이 책을
읽어주실 종친들이십니다.
아무쪼록 이 조그마한 책자가 광이의 정체성과 후배
종인들의 보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가 되길 빕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