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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했습니다. 농지개혁법을 시행하고 한미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것은 우리모두가 아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의 대표적인 치적입니다. 그 외에도 전국민에게 초등 교육을 의무화한 것은 문맹퇴치를 위한 지도자의 선견지명이었습니다. 1945년 우리나라의 문자 해독율은 22%에 불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당시 78%가 문맹이었습니다. 특히 이승만 은 1948년 투표권에 대한 개념도 없던 그 시절에 남녀동등 투표권을 부여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이승만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발로라고 하겠습니다. 세계각국의 남녀 동등 투표권이 시행된 년도를 살펴보면 벨기에가 한국과 같은 1948년이고, 그리스가 1952년, 멕시코가 1953년 스위스가 1971년 포르투갈이 1976년에 완전한 남녀간 동등한 투표권이 생겼습니다.
이승만은 국민다수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던 암흑기에 이미 서구 문명을 익히고 국제정세를 논할 정도로 의식이 깨어 있었습니다. 이런 메시아적 환상에서 그의 가부장적 권위가 싹튼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의 통치스타일은 가부장적 위임 형이었습니다. 가부장적 지도자는 아첨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승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그는 자기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선호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2인자 독재를 유발했고, 그것은 결국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론해 봅니다.
이승만은 용미(用美)에 능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는 숭미주의자(崇美主義者)는 아니었습니다. 미국을 앞세워 정부수립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라는 승인을 받아 냈습니다.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끌어 들여 패전을 막았습니다. 미국으로부터 31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받아 피폐한 국가경제를 지탱했습니다. 이 돈은 우리나라 연평균 GNP(1945-1961)의 12%, 연평균 총수입에 73%에 해당되는 거액이었습니다. 1950년도에는 정부 재정의 절반이 원조로 충당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라가 그만큼 가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용미(用美)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손바닥에 금을 보듯이 훤히 읽고 있었고 미국사람들도 감히 얕잡아 볼 수 없는 카리스마와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대통령이나 국무장관에게도 해야 할 말은 거침없이 했고, 한국에 나와 있는 미당국자들을 수하처럼 호통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승만은 소박하고 검소 했습니다.
이승만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고, 치부와 사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 기독교선교사업에 심혈을 쏟을 정도로 신앙심이 돈독했고, 이런 기독교 정신은 그를 부정과 거리를 두게 했습니다.
1960년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갔을 때 이승만은 빈털터리 였습니다. 현지교포와 미국인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생계를 꾸려 나갈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하와이에서 나눈 가슴 저린 대화한 토막에서 그의 근검 절약하는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마미, 밥한그릇 가져다 준 사람, 숟가락 가져다 준 사람, 찻잔 가지고 온 사람, 식탁가지고 온 사람, 책상 가지고 온 사람…다 기억해야 돼. 깨끗이 쓰고 서울로 돌아갈 때는 돌려줘야 하니까.
우리는 여기 살러 온사람이 아니오, 마미. 잠시 쉬러온 거야.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야 해.”
프란체스카. “파파, 오늘이 일주일치 식료품 사오는 날 이 에요. 시장 다녀 올께요.”
이승만. “오늘이 금요일인가?.... 마미, 이번 주일에는 식료품 안 사면 안되겠어? 장보러 가지말아. 돈을 아끼자. 돈이 있어야 서울로 돌아 갈수 있소, 마미.”
프란체스카. “파파, 서울 가는 비행기표 사려고 먹을 것을 안 먹고 굶으면 힘이 없어 어떻게 비행기를 타겠어요.”
이승만. “그러면 조금만사와, 돈다 써버리면 서울 못 가.”
자료출처. 김호진 저 대통령과 리더십(170-171쪽)
이승만박사부부는 생애 마지막 거처인 하와이 마우나라니 노인병원에 입원하러 갈 때 현지교포들이 가져다 준 가재도구를 원래 주인에게 모두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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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의 신임을 받아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장관, 사회부 장관, 6.25전시국무총리서리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던 허정 전총리의 이승만 이 권좌에서 물러날 때 미련없이 결단하는 모습을 회상하면서 역시 대인의 풍모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젊은 학생들의 애국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 함은 이승만이 아니고 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
자료출처: 나무위키
◎이승만 하야 담화문(1960년 4월20일)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 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 했는 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 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 탐탐하게 기다리고있다는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시기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 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자료출처: “대통령과 리더십” 김호진 지음
◎하늘이 낸 이승만의 이모저모.
★진보청년 이승만. 왕조에서 민주국가로의 이행을 주장, 사형수로 투옥.
★감옥에 간 이승만. 모진 고문을 받던 중 기독교 신자가 됨(종신형). 5년7개월 수감생활후 사면으로 출옥.
★게일 선교사 추천. 햄린 목사를 소개받아 조지 워싱턴대학입학.
★프린스턴대학입학. 뉴욕선교부에서 만난 어네스트 홀 선교사 추천.
★3개월지체 귀국. 미국무부가 반미인사로 낙인 찍어 귀국 방해.
미국 선교사의 아들 우광복의 도움으로 귀국.
★트루먼의 파병결단. 1939년부터 5년동안 이승만이 출석한 교회
파운드리교회 헤리스목사가 트루먼을 설득.
★한미상호수호조약. 한미간 조약을 성사시킨 미국무장관 덜레스는 이승만의 조지 워싱턴,프린스턴 대학 후배.
★농지개혁의 시행. 불완전하나마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으로 1949년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고 1950년대 이후 한국농촌은 이승만 정권의 가장 안정된 지지 기반이 되었다. 6.25 직전인 50년 5월에 농지원부 열람케 함. 전쟁 중 농민봉기 등 민심이반 전무했음.
★ 이승만의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 미국의 명문대학(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톤대학)을 단 5년 4개월만에 이수하는 진기록으로 박사 학위 취득했습니다. 그의 저서 Japan Inside Out(일본내막기)은 1941년 6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 대한 미국정계의 무지함을 꾸짖고 그들의 미국침공을 예언한 책으로 대한 민국 최초로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 되신 분이 우남 이승만 이었습니다.
자료출처: ‘운좋은 대통령을 뽑자’ 외천지음(내용 일부는 필자가 보완했음)
◎이승만의 교훈
이승만은 빛과 그늘이 교차하지만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
교훈 1. 권력자의 의지가 민주주의 관건이다.
이승만이 취임할 당시 한국의 정치제도는 민주적경쟁원리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차례나 개헌을 단행하며 그 틀을 부셔버렸다. 이승만도 주어진 임기만 끝내고 초야로 돌아 갔다더라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과 같이) 그는 지금도 국부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교혼 2. 권력의 생명은 합법성과 도덕성이다.
이승만이 남긴 두번째 교훈은, 지도자가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쳐도 그의 권력이 합법성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면 버림받는 다는 사실이다. 그가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된 것도, 4.19혁명을 맞은 것도 실은 카리스마를 과신한 결과이다.
교훈3. 정권 연장에는 명분이 있을 수 없다.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은 어떤 논리와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술수와 공작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도 이승만의 추락이 주는 교훈이다.
교훈4. 콤플렉스는 양면성이 있다.
지도자에게 콤플렉스는 자기실현의 동인이 되기도 하지만, 파멸의 불씨도 된다는 가설 또한 이승만의 성공과 실패가 시사하는 한가지 교훈이다. 이승만에게는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곳저곳을 떠돌며 주변인적 삶을 살아야 했던 소외된 낭인이었다. 두말할것도 없이 이 모든 것은 그의 영혼을 괴롭히는 일종의 콤프렉스였다. 이 콤프렉스 때문에 권력의 화신으로 돌변했고 급기야는 ‘나 아니면 안된다’는 편집증에 걸리고 말았다.
교훈5. 지도자에게 위임통치는 자멸의 함정이다.
이승만의 리더십 스타일은 가부장적 위임형이었다. 지도자가 2인자에게 의존하는 위임통치는 자멸의 함정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이기붕이라는 2인자를 잘못 만났다. 이기붕이 대권까지 내다보며 제3. 4대 대선 때 부통령후보로 자임하자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그이 손을 잡고 부정선거라는 도살장으로(자기도 모르게 끌려) 들어 갔다. 결과는 공멸이었다.
교훈 6. 지도자에게 인의 장막은 금기이다.
국가 경영자가 소수 충복으로 구성된 인의 장막에 갇히면 민의와 세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결국에는 실정의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것도 이승만의 실패가 주는 교훈이다.
위 이승만의 교훈 여섯가지는 김호진교수(고려대학교 명예교수)저 “대통령과 리더십”(청림출판) 172-177쪽에 나와 있는 내용을 축약한 것입니다.
◎등소평의 이승만 가상 평가.
“그래도 마오 주석이 일정기간 동안 실수를 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분명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요한 창립자임에 분명하지요. 우리가 그의 공과를 논할 때 그의 실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 하지만 그가 중국인들을 위해 한일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답니다. 우리 중국인들은 항상 그를 당과 국가의 창시자로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모택동에게 먹칠을 한다면 우리 국가, 우리 공산당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역사 사실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승만에게 먹칠한다면 우리나라, 자유대한민국에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역사사실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이 80세 넘어 실수를 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분명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주도했으며 대한민국의 중요한 창립자임에 분명하지요. 우리가 그의 공과를 논할 때 그의 실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가 한국인들을 위해 한 일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향상 마음속에 그를 자유대한민국의 창시자로 소중히 여길 생각입니다.”
자료출처: “운좋은 대통령을 뽑자”, 외천지음.
◎이승만 전대통령 조사(弔辭)
박정희 대통령
“조국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초대 건국 대통령이신 고 우남 이승만 박사 영전에 정성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사를 드립니다.
-전략-
일찍이 대한 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와 조국의 개화와 반 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어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 광복을 맹세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 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 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속에서 만난을 헤치고 새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 한국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 말로 오직 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 정기에 입각하여 항일 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 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었고 또 그 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 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의 역사적 발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 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 망정 구경에는 박사의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이자리에서 다시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에 어느 일부분일 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책임으로서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는 귀국제일성은 오늘도 오히려 이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 사활의 잠언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후략-
자료출처: ‘운좋은 대통령을 뽑자.’ 외천 지음.
이승만 전대통령 조사(弔辭)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작성한 것입니다.
지금 시중에 장기 흥행 기록중인 영화 “건국전쟁”의 상영을 계기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 활동에 대한 역사적 지위 재평가에 도움이 될 관련자료 몇 가지를 필자가 찾아 서 나름대로 편집하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끝으로 등소평의 모택동 동지의 역사적 지위와 모택동 사상에 관하여 축약한 발췌문을 인용합니다.
“모택동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 공산당의 영수였다. 모택동의 잘못에 대하여 과도하게 써서는 안된다. 과도하게 모택동에게 먹칠한다면 우리 공산당, 우리국가에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역사사실을 위반하는 것이다.” 지료출처 “운좋은 대통령을 뽑자,외천 지음
대한민국국민들이 등소평이 모택동의 공과를 수용하여 공산당의 영수로 받들듯이 진영논리를 떠나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한지 15년만인 1960년 5월29일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을 잡고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84세, 짐 가방 하나가 소지품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국 땅 하와이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낡은 성경 한권이 그가 남긴 유산의 전부였습니다.
이승만은 누구보다 국제정세에 정통하고 높은 식견을 지닌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승만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줄여서 표현하자면 애국자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남 이승만은 신념에 찬 애국자였습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