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자기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 -
아래에 소개하는 남강 이승훈 선생같은 분이야말로 참 보수주의자에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업에 성공하여 부유한 삶을 살던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하여 열심히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을 펼치다 안악사건, 105인 사건, 33인 민족대표 등의 혐의로 옥살이를 하다 1922년에 풀려납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승훈은 견학 겸 1년간 일본에 갔다옵니다. 돌아온 이승훈은 3.1운동과 같은 단기적 소요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가 없고, 민중을 대상으로 교육등을 통하여 점진적인 수준을 향상시키는 실력양성론에 다시 한번 깊은 확신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그는 1920년에 자신이 결성했던 물산장려회에 다시 참여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회를 열기도 하고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서 이상재, 조만식, 김성수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의 중앙상무위원이 됩니다. 이 민립대학 운동은 비록 일제에 의해 좌절되어 광복때까지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지 못하였으나 교육에 의한 민족독립운동의 굳은 지표가 되었습니다. 1924년에는 김성수 대신 반년간 동아일보의 사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하여 이승훈은 민족운동의 큰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공동체 운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이상촌 운동이라고 명명했던 이 운동은 이미 1907년 고향인 용동에 강명의숙을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위생, 단발, 금주, 근면, 문맹퇴치를 목표로 야학과 청년회를 통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이 이상촌 운동을 용동 뿐 아니라 인근 마을 7곳에도 확장시키기 위해 동회를 조직하고 주민들을 위해 생필품과 학용품 등을 파는 협동조합을 운영하였습니다. 그가 이 시기에 이상촌 운동의 기본 조직으로 조직한 "자면회(自勉會)"는 근면 · 청결 · 책임의 정신 하에 농지 개량, 최신 농법 도입, 협동 생산, 소득 증대를 통하여 민중의 생활과 수준 향상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925년, 실력양성론자 중 이광수같은 일부가 민족개량주의에 빠져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을 부르짖자 크게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산학교의 초대 이사장이 됩니다. 그 후 교육과 민족 공동체 운동에 힘씁니다. 그는 자신이 세웠던 오산학교의 학생들을 상당히 좋아했기에 자주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민족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이 되자."라고 말하며 학생들이 교육에만 전념하도록 청소, 화장실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하기도 하였습니다.
1928년, 오산학교 졸업생들과 지역 주민들은 오산학교 교정에 이승훈 동상을 세우려 하고 전국적 관심을 받게 됩니다. 일제의 방해가 있었지만 결국 1930년에 이승훈 동상은 성공적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달에 이승훈은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당초 이승훈의 유언은 "낙심하지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의학용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하라." 였으나 당시의 유교관 문제와 일제의 방해로 기증되지는 못하고 오산학교 교정에 묻히게 됩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훈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합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종교나 사상으로 인한 분쟁을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같은 33인이었던 한용운 선생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의 지적에 "나라가 있어야지, 종교가 있지! 결국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자치론, 참정권을 부르짖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요.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자기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위인들 중에서 매우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능력있던 수완가였으며 민족의 자립과 실력양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최고의 애국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승훈이 1926년에 잡지 「동광」에 실은 글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오직 조선을 위하여! 어언간 나이는 육십이 넘고 한 일은 변변한 것이 없소마는 나는 후회하지 않소, 그때그때 나로는 최선을 다한 줄로 생각하는 까닭에 나의 생활 방법이 이러하니까 나의 나이 이십 세면 이런 일을 하여 볼까 또는 삼십 세면 저런 일을 하여 볼까 당초 생각할 까닭이 없고 이십 세든지 삼심 세든지 앞에 당한 일을 옳게 생각 하는 대로 힘써 할 뿐이지요. 끝으로 내 생각 하나 더 적어 둘 것이 있소. 지금 나를 쪼개어서 이십여 세 먹은 청년 세 사람을 만들어도 그 세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조선을 위하여 일할 것이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