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신작 '사마리아'를 들고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참가한 김기덕 감독(右)과 주연배우 곽지민씨.
"깨끗한 삶은 환상 … 현실은 추악한 것"
제 목표는 영화제에서 상을 타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제 수상작 감독이 된다는 것은 규격화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감독에게 맡기고 난 지금처럼 논쟁적인 감독으로 남고 싶습니다. 절반은 나를 지지하고, 절반은 나를 비판하는 감독 말입니다."
지난 5일 개막한 제5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사마리아'를 출품한 김기덕(44) 감독은 10일(현지시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본인의 뜻과는 달리 '사마리아'는 김감독에게 상을 안길지도 모르겠다. 시사회와 일반 상영의 반응이 좋기 때문이다. 2년전 이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나쁜 남자'가 양극단의 반응을 얻은 것과 달리 '사마리아'는 골고루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김감독의 열번째 영화인 이 작품은 전작인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처럼 '종교적'인 영화다. 원조교제에 나선 여고생과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아버지가 남자들에 대해 복수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바탕에는 용서라는 주제가 깔려있다.
영화의 포스터도 '죄없는 자가 저 소녀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성경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무대 인사에서 김감독은 "지루한 영화를 인내력을 갖고 봐줘서 고맙다"며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 뒤 "사실 이 영화는 인내에 관한 영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에 대해 인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영화에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세 번 등장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감독은 "인간이 모두 도덕적으로 깨끗할 수 있다고 믿는 건 팬터지다. 아버지는 딸이 깨끗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현실에서 그건 기적이고 환상이다. 기적을 바라는 대신 현실의 추악한 면을 직시하자는 의미다"라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딸과 상대한 남자들을 죽여가는 대목에 대해서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해서는 안되고, 신만이 벌할 수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외국기자가 "당신 영화에서는 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무슨 뜻이 있냐"고 묻자 김감독이 "우리가 매일 아침 세수를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외국기자들은 주인공인 신인배우 곽지민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한 기자가 "사마리아는 조용한 영화라서 신인으로서 연기가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사실 처음이라 아주 힘들었다. 다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재미있고 밝은 역을 하고 싶다"는 답변이 나왔다. 옆에 있던 감독은 "촬영당시 곽지민은 여고 3년생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해 컷을 외친 후에도 눈물을 뚝뚝 흘려 자르지 못한 장면이 많다"고 거들었다.
회견장에서는 북한 영화에 대한 김감독의 생각을 묻는 질문도 나왔다. "몇 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까지 기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화만들기에 부족한 것 같다. 주체사상이 아니라 개인의 삶이 보이는 북한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감독은 답했다.
독일 일간지 '디 벨트'의 영화담당기자는 "김감독의 영화를 그동안 쭉 주목해왔다"면서 "그의 영화가 갈수록 점점 더 보편적이고 관조적으로 성숙돼가는 것 같다"고 호평했다. '사마리아'는 내달 12일 한국에서 개봉된다.
한편 '사마리아'와 함께 경쟁부문에 오른 22편의 작품 가운데 10일 현재까지 가장 관심을 끈 영화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셋'이다. 이 영화는 1995년 한국에서도 히트한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여행 중이던 두 남녀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그렸었다. '비포 선셋'은 전편의 주연이었던 에단 호크과 줄리 델피를 다시 등장시켜 9년 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그리고 나 세 사람은 '비포 선라이즈'가 끝나자 마자 후속편을 만들자는 얘기를 했다. 그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 만나고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대사와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전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돈을 대겠다는 곳이 없어 고전했다"면서 "전편과 비슷한 2백50만달러(한화 약 30억원)을 들여 파리에서 보름만에 촬영을 마쳤다"고 밝혔다. 베를린 영화제의 수상작은 현지시간으로 15일 열리는 폐막식에서 발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