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모처럼 만에 우리 대덕大德스님들과 여러 불자님들을 만나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게 생각합니다. 그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부처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큰 대사, 가장 큰 위대한 사업이 무엇인고 하면 주인공을 깨닫는 그러한 일입니다.
그래서 참선공부라는 것은 여러 가지 방편가설方便假說을 떠나서, 방편이라던가 권도의 돌아가는 그 우회로을 떠나서 바로 직통直通으로 우리 마음을 깨닫는 그러한 법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 모르는 분들은 참선법이 직통으로, 직행으로 가는 것이니깐 너무나 고된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가장 쉬운 일입니다.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참선을 가르켜서 안락법문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왜 안락법문安樂法門인고 하면, 우선 마음에 번뇌煩惱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몸이 괴로운 것도 그것도 상당히 고뇌스러운 것이지만, 그 마음에 번뇌가 없다는 거 마음에 번뇌가 있으면 그마만치 우리 범부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이 업덩어리 몸을 받은 것은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과거전생에 우리가 지은바 숙체宿體에 따라서 묵은 빚 따라서 잠시간 이 사람 몸을 받아있단 말입니다. 최상의 그런 몸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업業의 정도에 따라서 거기에 걸맞는 몸을 지금 받은 것입니다
즉 따라서 이 업덩어리, 업의 몸을 벗어나는 공부가 아까 말씀마따나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지만,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우리가 모르니깐 업을 짓는 것이고 업을 짓고 그대로 거기에 걸맞는 인생고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인생의 본래면목은 역시 우리가 모든 그런 업의 습성을 떠나서 본래의 생명의 실상자리, 생명의 고향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참선이라는 것이 가장 지름길인데, 지름길을 어떻게 갈것인가.
우리 지혜 가운데는 간혜지乾慧地와 반야般若의 지혜가 있습니다. 간혜지라는 것은 마를 간乾자, 지혜 혜慧자. 그 우리 마음이 아직은 깨닫지를 못해서 이론적인 개념적인 그런 범주에 머물러 있는 그런 지혜가 간혜지乾慧地의 지혜입니다.
그 부설거사浮雪居士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보면 이런 대문이 있어요.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라, 가사 법을 잘 설해서, 마치 운우雲雨와 같이 구름이 한가롭게 지나가고 또 비가 거침없이 내리고, 그렇게 그 운우같이 그런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간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라, 그런 바싹 마른 지혜, 개념적인 지혜로 해서는 생사生死를 못 떠난다 말입니다. 그 본래면목자리 생명의 실상자리를 훤히 우리가 증명해야 할 것인데, 아, 이치만으로 해서는 그것이 증명이 안되니깐 생사를 못 면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간혜乾慧라 하는 것은 바싹 마른 지혜는 생사를 면치 못 하기 때문에,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라, 그도 또한 허망한 다 물거품과 같구나, 이런 부설거사의 게송에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참선공부參禪工夫라 하는 것은 그러한 간혜乾慧를 떠나야 됩니다. 어떻게 떠나야 할 것인가. 우리가 부처님 법을 생각할 때는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그 본체體와 또는 그 활용하는 용用과 또는 성품性과 또는 현상相과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시각이 짧아서, 범부소견으로 밖에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천안天眼이나 법안法眼이나 그러한 투철한 안목을 미처 개발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항시 중생의 업식業識으로 보는 것이라놔서 현상만 우리 중생들은 사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모양이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내 마음은 앞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때에 내 마음이 있으니깐 살아있지 않겠습니까. 허나 우리 마음은 보이지가 않는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보이는 세계, 다시 바꿔서 말하면 그 상相의 세계만 가지고서 옥신각신 시비是非를 인간이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상의 범주내에서나마 우리는 따지고 분별하고 그렇게 하는 셈이고, 깨달은 성자는 어떠한가. 성자는 그 본체本體, 성품性品을 깨닫는다 말입니다.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범부이고, 성품을 깨달으면 성자고 그때는 부처다 말입니다. 무엇을 깨닫는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모양은 없지만 분명히 우리 생명의 하나의 실상實相존재란 말입니다. 그 마음을 깨달으면 그때는 바로 성자가 되는 것이고, 같은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때는 범부란 말입니다.
그 마음이란 어떠한 것인가. 우리 범부들은 마음의 실상實相을 깨달아서 마음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우리가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공덕을 항시 과소평가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별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범부라는 것이 별 나쁜생각을 많이하고 그런 무명심 때문에 업을 짓고 또 고를 받지 않는가,(혹업고惑業苦)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을 보통은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 없는데, 모양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한계가 없다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우주를 감싸있다 말입니다.
요새(요즈음) 쉬운 말로 '마음을 열어라.'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옥과면 톨게이트에) '마음을 열면 모두가 하나'라는 교통표어도 붙어있고 합니다. 참 좋은 표어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열 것인가, 마음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깊이 생각들을 해야 할 문제가 이 마음문제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불교에서 일체유심조란 아주 중요한 그런 성구가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있단 말입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도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그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모두가 차별이 없단 말입니다. 마음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타自他의 구분도 없습니다. 또는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존재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아까 제가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진리라는 것은 체가 있고 용이 있고 성품이 있고 상이 있고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마음 가운데 마음의 본성은 체體고, 성품이고, 또는 마음의 용用은 그때는 상이고 또는 현상적인 모든 것은 그때는 용이고 합니다. 허나(그러나) 비록 현상적인 상이나 또는 용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가 않는다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불교는 인연법因緣法이라, 이렇게 말씀을 간단히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고유한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때그때 모양을 나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연법因緣法을 생각할 때는 보통 이것 저것 모두가 관계 속에 있다. 그런 정도의 인연법은 아직은 소승의 인연법입니다.
대승의 인연법은 무엇인가. 불교의 전문술어로 하면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법계연기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연기라.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언제나 충만해 있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마명대사馬鳴大師께서도 역설한 법문입니다만, 우리 중생은 그 자리를 보지를 못하고 느끼지를 못할뿐 그 우주라는 것은 어느 때나 변함이 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법성眞如法性이 충만해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이라 하더라도 다른데서 온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 본체로부터서 본체의 공덕으로 잠시간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마음이란 말입니다. 내 몸뚱이나 그대 몸뚱이나 또는 모든 산이요 냇이요. 해요 달이요 모두가 다 진여법성眞如法性자리에서 나옵니다.
진여법성자리에서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불교를 생각할 때에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제법이 공이다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공空 도리를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불교를 이해를 못 합니다. 제법이 어째서 공인 것인가. 우리가 항시 읽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五蘊이 다만 비어있음을 비추어봐야 그래야 보일듯 보이리라 인생고를 여읜다는 그런 귀중한 성구도 있지 않습니까. 헌데 모두가 공이라는 공도리空道理, 공도리를 모르니깐 우리가 함부로 행동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공인 것인가. 용수보살의 중관론中觀論(중론中論)에 그 게송을 보면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이라. 인연 따라서 생겨난 법은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공을 이야기 할 때도 그 물질을 하나하나 분석해서 차근차근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가서 공이다. 이런 것은 석공析空 그래요. 분석할 석析자. 석공 그러는 것이고, 그건 현대에 과학적인 즉 말하자면 분석법을 이용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느끼는 공은 석공析空 그럽니다. 그래서 석공 그것은 같은 공을 이해해도 소승적小乘的인 이해라고 그렇게 합니다.
대승적大乘的인 이해는 무엇인가, 대승적으로 공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있는 그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그 금덩이 같이 소중한 내 몸도 바로 보면 그때는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산도 그러고 강도가 가장 강하다 하는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모두가 다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이런 원리를 그 부처님 당시라던가 옛날에 과학이 없었을 대는 참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려웠지만, 현대과학은 그런 도리를 지금 증명을 합니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일체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그 알 수 없는 우주에너지, 우주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우주에너지가 진동해서 어떻게 결합되는가, 거기에 따라서 물질이 구분이 있는 것이지, 본래근본자리는 사실은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우주에너지라는 것은 불생불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이른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우주에너지라는 것은 그때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그러면 에너지는 무엇인가. 모든 물질이 내 몸뚱이나 금이나 은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에너지의 진동으로 안 된 것이 없는데 그 에너지는 무엇인가, 지금 현대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과학은 모릅니다. 과학은 영구히 모르는 것입니다. 어찌 모르는고 하면, 그 물질이 아닌 것은 과학은 측정을 못 합니다. 시간성 공간성이 있어야 뭐라는 운동이나 위치를 알 수가 있을 건데 따라서 이 과학이라 하는 이 존재가 있는 물질적 흔적이 있는 것은 과학이 측정이 되나 존재가 없는 순수생명은 측정을 못 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그 불성佛性이다, 또는 법성法性이다, 진여眞如다 뭐다 이런 훌륭한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만은 이런 말씀은 어떻게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깨달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깨닫는 가장 지름길이 이 참선법參禪法이란 말입니다.
헌데 참선을 누구나가 하면 좋은데, 사실은 누구나가 잘 못하지 않습니까. 하기도 어렵고, 또 화두들고 의심을 계속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어서, 그냥 무슨 병만 걸리고 그때는 참선에 겁을 먹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참선법이 어렵지만, 사실은 그 방법을 알고 보면 제일 쉽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것은 우리가 분석하고 분석하고 공(석공)이 아니라 본래로 공(즉공)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 허상을 허망상을 환상을 좀 보일뿐일 것이지, 내 몸이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모두가 공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공 그것이 즉 말하자면 바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는 '나'요 '너'요 잘나요 못나요, 이것이요 저것이요 하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어째서 환상일 것인가. 순간순간 순간순간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화무상한 것은 우리 중생은 변화하는 과정을 지금 보지를 못한다 말입니다. 바로 내 몸뚱이도 결국은 세포가 결합되어서 신진대사 해서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 않는 것을 항시 내 몸뚱이를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이 생각한단 말입니다.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1초동안에도 내 몸뚱이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그때그때 머물다가 변화다가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인연이 다하면 금생에 생을 마치지 않습니까. 금생에 생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생명자체는 마음이기 때문에, 생명자체는 모양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자리, 불생불멸의 자리 죽음이 없는 그 자리에다가 항시 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오늘 제가 우리 스님네들한테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밑줄을 그어서 가지고 왔습니다만 육조단경에서 (법문을) 보면 육조단경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하나의 경전입니다. 보조국사도 육조단경을 제일 소중히 했고 또 서산대사도 마찬가지이고, 또 근래에 와서는 성철큰스님도 육조단경 돈황본을 역설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여튼 어느 선지식이나, 적어도 참선을 자기 생명으로 아는 분들은 육조단경을 절대로 소홀히 못합니다.
헌데 육조단경 그 핵심은 어디가(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그렇게 고구정녕苦口叮寧으로 역설하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나 자성自性이나 같은 뜻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이나 진여불성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나 우리 불교를 참선을 않더라도 공부하는 분들은 꼭 불성, 자성에 대해서 한시도 우리 마음을 거기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여불성, 자성을) 떠나게하면, 떠나면은 불법佛法이 되지 않는다 말입니다.
불법이라는 하는 것은 어느때나 어느때나 그 불성자리, 우리 본래 자성자리, 우리 본래 근원자리에다가 마음을 두어야 그때는 비로소 참다운 불법인 것이고, 또한 특히 우리가 성불하는 법의 가장 중요한 요체인 참선법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불성佛性에다가 마음을 두고 참선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의심을 한다던가, 또는 여러 가지 그런 가사 묵조黙照를 한다던가 그런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화두라는 것도 달리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자리 불성이 무엇인가. 달마 때나 또는 육조혜능 때나, 그 다음에 마조도일馬祖道一 때나 또는 남전보원甫泉普願 때나 임제의현臨濟義玄 때나, 그런 때에 있어서는 그 의심하는 것이 없어요. 그것이. 그냥 바로 그대로 그대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다. 그대 마음이 바로 참사람이다. 무위진인無爲眞人이다. 이렇게 해서 바로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송나라 때 와서 각 종파가 생겨가지고서 니 종파가 별 것이 아니라 내 종파가 더 우수하다는 그런 우월논쟁 때 비로소 화두가 나오고 뭐 나오고 그런 간접적인 무슨 계기가 있었지만 달마 때부터 순수한 선 시대, 육조혜능 때까지는 그런 어떤 간접적인 매개체가 없었습니다. 그냥 마음 그대로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불심인데, 불심을 딱 짚어서 깨닫게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임제의현스님도 그대 몸에서 지금 무위진인이다. 아, 참사람이 분명히 있으니깐 바로 그걸 보고 그걸 깨달아서 도인이 되어라, 그걸 깨달아서 참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한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니깐, 그렇게 못하고 임제스님한테 그야말로 퉁매를 맞고서 그렇게 딱 미트어져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놈이 결국은 똥마른 막대기구나, 이렇게 질책을 하셨단 말입니다.
육조단경에서 불성佛性, 자성自性이라고 그렇게 역설한 대문이 백 몇군데가 넘어요. 헤아려 보니깐. 얼마나 간절하게 우리 불성으로 돌아가라, 불성을 깨달아라, 얼마나 간절하게 생각하셨기에 그 조그마한 경전에서 백 몇군데가 넘도록까지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내 법은(오소설법吾所說法)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내 법은 불리자성이라, 내 법은 자성 즉 불성을 떠나지 않는다, 내 법은 자성이기 때문에 이체설법離體說法이라, 그 본체 그 불성을 떠나서 말을 하면 그때는 상설(名如相說)이라, 상에 떨어진 그런 말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섭상귀체攝相歸體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공부라는 것은 상을 거두어서 상을 여의어서 본체로 돌아가야 공부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금강경에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유의법이라는 것은 결국은 상이 있는 법입니다. '나'라는 상(아상), 너라는 상(인상), 그런 중생상 수자상 그런 상이 있는 법이 유의법입니다. 유의법有爲法 이것은 하나의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헛깨비요, 그림자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사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거지, 그런 것은 인연 따라서 임시로 이루어진 법이기 때문에 바로 즉공卽空이라,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그 열반경涅槃經에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무상 무아 말씀이 대승경전에 얼마나 많습니까. 무상이 아닌 것은 무상하다고 우리한테 알으키기 위해서 한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대로 무상한 것입니다. 본래 있는 대로 무아란 말입니다.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보면 그 항상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그때그때 순간찰나찰나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변화무상한 것에다가 어떻게 해서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해서 상주부동常住不動하다, 항시 그대로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는 것은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우리 중생이 지금 망념으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내가 없으니깐 내 소유도 없겠지요. (무소유無所有) 우리가 그런 자리를 체험으로 해서 깨닫기라는 것은 어렵습니다. 참선을 해야 하니깐요. 그러나 이치만이라도 알아야 됩니다. 이치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이치라는 것은 없는 이치를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억지로 부처님께서 가르쳐서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고 다 그런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 감투를 위해서 누구하고 싸우겠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누구하고 싸우겠습니까. 본래로 '나'와 나의 소유가 없거늘 본래로 무아 무소유라, 본래로 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고, 내 몸뚱이도 허망하니 잠시간 나한테 붙어있는 재산이나 권력이나 그런 것이 어떻게 내 것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을 잡을려고 몸부림 치고, 남 중상(모략)하고, 대통령 한번 될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상대편을 비방하고 욕하고 그야말로 없는 것을 끄집어 내어가지고 중상모략中傷謀略을 합니까. 이런 것이 모두가 부도덕한 짓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 인간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뒤로 물러남고 이렇게 해서 억지로 추대해서 멀 좀 하면 잠시간 (뭘 좀) 할 망정,
그와 같이 아까 말씀마따나 '나'라는 존재, 내 소유가 존재한다. 저건 내 것이다. 저것은 내 집이다.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 무위진인이라. 그러한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참다운 사람이 무위진인이라, 본래로 '나'라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거니 우리가 무엇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범부성을 초월해서 우리가 성자가 되는 일이란 말입니다. 어느 특수한 사람이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본래가 우리 본래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본래시불本來是佛) 바로 보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중생이 바로 못 보니깐 내가 범부라고 이렇게 보는 것이지, 공부시키기 위해서 본래 성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본래 분명히 명명백백히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 부처라고 생각할 때에 나만 부처가 아니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하게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한 부처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러기에 참선공부는 안락安樂공부라, 제일 쉽단 말입니다. 제법諸法이 공空한 자리를 모르고서 하는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본래의 자리, 본래의 자리를 우리가 깨달아야 그래야 비로소 참선의 시초가 되는 것이고, 참선공부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버릇이 금생에 나와서도 학교가서 배우고, 또는 집에서 배우고 또는 사회에서 배우고 한 것이 그런 버릇만 잔뜩 배웠단 말입니다. 버릇만 잔뜩 배워놔서 그 습기習氣를 녹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전생에서 별별 지은대로 습기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전생의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또 금생에 지은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이런 습관성이 딱 우리 마음에 덮혀 있어놔서 본래 부처이건만 부처인 줄을 모르고서, 아, 나는 내것이다 내 마음은 그야말로 참 가끔 남을 미워하고 욕심도 내니깐 이 마음은 별 것이 아니다. 그 버릇으로 욕심내고 버릇으로 그런 것이지, 우리 마음 자리는 본래 물질이 아닙니다. 모양이 없어서 오염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
보조어록에도, 보조국사(普照國師知訥, 1158~1210) 같은 분도 쉰셋에 가셨지만 젊은 우리 스님네들 가운데도 50 넘은 분들이 계시겠지요. 보조국사는 쉰셋에 가셨어도 아주 그 천재인 동시에 도인이란 말입니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 자성청정 자성해탈이라. 그 본래, 모두가 다 본래로 청정하고 해탈되어 있단 말입니다. 바로 보면 해탈 되어 있고, 본래가 다 청정하건만은 우리 중생이 업으로 보기 때문에 업에 딱 덮혀서 가려서 청정히 보지를 못합니다. 내가 참 별 것이 아니다. 보조국사는 청정한 위대한 도인이고,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부처고 어떻게 청정할 것인가. 우리가 그렇게 자기비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부처인 것을 분명히 느껴야 참다운 불법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아까 말씀마따나 참선공부하는 준비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모든 것은 다 허망무상하고 다 공이요 다 무아요. 또 참다웁게 있는 것이 공이요 무아요 그 자리의 참다운 성품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 습관성習慣性이 너무나 다닥다닥 끼여서 하루나 이틀으로 해서는 잘 벗겨지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용맹심과 업장業障 따라서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가 오랫동안 본래 부처의 자리의 체體를 안 놓치고서 공부를 해야 비로소 녹아진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결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출가한 우리 불자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공부하시는 재가불자님들도 꼭 결제하는 용맹심을 내어서 집안에서 낮에는 활동을 하신다 하더라도, 또는 활동을 하시는 동안에도 (활동을) 하시는 동안에도 우리 마음의 그 주인공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불성을 여의지 않으면 공부에 큰 손해가 없습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서도 이런 말씀을 했어요. 우리 마음이 본체本體를 안 여의면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승가에 있으나 또는 속가에 있으나 참선공부 아님이 없고 또는 행역선行亦禪 좌역선坐亦禪이라, 우리가 걸음걸어가나 또는 좌선하고 앉아서나 모두가 다 참선이 아닌 것이 없고, 또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이것도 역시 이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말을 하건 또는 말을 않건 또는 활동을 하건 또는 동하건 또는 고요히 있던 간에 모두가 다 체안연體安然이라.(증도가 - 행역선좌역선行亦禪坐亦禪 어묵동정체안연語黙動靜體安然) 아주 그 안정된 공부아님이 없다는 그런 말씀을 영가스님이 하셨어여.
영가스님은 위대한 분입니다. 그 육조혜능스님의 법제자란 말입니다. 아주 투철한 분이기 때문에 육조혜능스님을 만나기 전부터 공부가 굉장히 깊이 된 분입니다. 그때도 31살 먹어서 육조혜능스님을 만났어요. 만나서도 그 일일히 혜능스님한테 법을 받아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 말 몇마디에 같이 계합되어버렸단 말입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이 가볍고, 또 천태지의학天台智顗學을 공부해서 마음이 열린 분이기 때문에, 31살 되어서 육조스님을 만나자마자 말 몇마디에 깨달아 버렸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꼭 걸려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우리 상을 떠나서, 상을 떠나서 우리 마음의 주인공 자리인 진여불성자리를 거기에다가 우리 마음을 골똘히 머물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온다 말입니다.
영가현각스님은 가까스로 49세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증도가라고 하는 아주 투철한 저술을 남겼단 말입니다. 증도가를 보면 그렇게 시원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 모두를 다 지꺼기를 씻어버리고서, 정말 우주자체가 우리 마음자체가 그대로 청정무비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그런 마음에 항시 머물러 계신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습니다. 그렇게 맑게 살다가 죽어지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맑게 살다가 죽어지면 그때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한 본체하고 하나가 딱 되어버린다 말입니다. 그러면 들어가는 자리도 희망(원願) 따라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서 오랫동안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고, 또 중생을 보면 중생이 그런 도리를 몰라가지고서 자꾸만 헤메니깐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중생이 스스로 범부를 지어서 고생하니깐 그때는 중생계에 와서 중생들을 제도를 한단 말입니다.(수원수생隨願受生)
우리가 불가에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근본경전 보면 삼명육통이란 그 말씀이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하면 다 삼명육통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통을 말하면 우리 자성공덕 불성공덕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통이라는 것은 그 외도나 하는 거지 정도가 무슨 신통이 있는 것인가, 우리 본래 마음자리는 신통이 없는 하잘거 없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본래마음자리는 무량신통無量神通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원수의 우리 습관성 때문에 가려서 만공덕萬功德을 제대로 발휘를 못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대승신앙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영원한 생명인 동시에, 내 마음이 본래로 불생불멸한 영원한 생명인 동시에, 또는 무량한 공덕을 다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한한 그런 영원한 생명인 동시에 자비나 지혜나 또는 행복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그런 공덕을 갖추고 있는 우리 마음자리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대승신앙입니다.
그렇게 믿는다 하면 우리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 할 일이 그때는 자명해 집니다. 다른 것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다 갖추어 있거니, 다른 것을 무슨 필요로 할 것입니까. 장사를 하나 농업을 하나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의 본래자리,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성자리에다가 딱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하고 산단 말입니다.
아, 장사하고 농사하고 직장이 있고, 어떻게 자성자리에다가 마음을 머물게 하면 그런 농사나 그런 것이 안 되지 않겠는가 사실은 제일 잘 됩니다. 남하고 사귈 때라도 그 자성자리에다가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아, 저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아니다' 이렇게 될 적에 그 사람하고 관계가 얼마나 순탄하겠습니까.
가족적으로 내외간이라던가 또는 부모나 자식이라던가 그런 관계에서도 모두가 다 본래 똑같은 부처님이 아닌가. 다만 금생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다르게 태어났을 뿐이지, 본래는 다 똑같은 부처님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상대편을 부처님 같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자기 아들도 부처님 같이 보고 학교 선생님 같으면 자기 제자도 부처님 같이 보고,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그 어느 처소, 어느 처소에 있던지 간에 가장 최선으로 올바른 인간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주가 진여불성뿐입니다. 진여불성뿐인 것을 우리 중생이 잘 보지를 못합니다. 잘 보지를 못한다 말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우주가 다 일진법계입니다. 화엄경으로 보면 일진법계인 것이고 법화경으로 보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모두가 다 실제 불성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공도리로 보면 그때는 제법諸法이 공空이고 말입니다. 제법이 공이라는 것은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모두가 다 부처란 것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공이기 때문에 우리가 집착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할일은, 우리 할일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번뇌에 가려서 우리 본래면목을 지금 다 보지를 못합니다. 그 번뇌, 업습業習을 업장의 습기를 녹이고서 업장을 녹이고서 우리 본래면목을 보는거란 말입니다. 그 작업이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 있는 것인데,
결제하는 복福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수승한 복입니다. 그 세상이 범부들이 어울려서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얼마나 소요하고 또 어수선하고 말입니다. 복잡한 일이 많이 있습니까. 이런 때 다 적어도 몇 개월동안 다 잊어버리고서 다 방하放下하고서 오로지 내 주인공 내 고향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육조혜능스님께서 그 자성自性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을 꼭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자성性이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같은 뜻입니다. 불성佛性 또는 실상實相 중도中道 또는 주인공 또는 한 일자一자 놈者자 일자一者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둘이 아니라 진리와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자성 불성이라는 말을 그 단경 조그마한 경전에서 백 몇번이상 말씀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성을 떠나면 참다운 도가 아니다. 내 법문은 모두가 다 자성에 의지해 있다.(불리자성不離自性) 이체설법離體說法은 상설相說이다, 상에 의지 한다 말입니다.
금강경 마지막(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우리가 상相이 있으니깐 공연히 상을 보고서 상에 얽매이니깐 도를 깨닫지 못하고 참다운 고향에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상이 본래로 약견제상비상이라,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상이 아님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즉견여래라. 바로 부처를 본다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이니깐 상만 여의면 바로 그때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부처인데, 부처인데 억울하게도 우리가 나쁜 버릇 때문에 우리가 부처인지를 자각을 못한다 말입니다.
23정도 먹을 때 깨달은 육조혜능스님이나 31살에 깨달은 영가현각스님이나 그분들이나 우리나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은 똑같습니다. 마음은 자타시비가 없는 것이놔서 똑같습니다. 그이들이 그렇게 젊을 때 깨달았거늘 우리라고 그래서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삼동결제三冬結制동안에 다른 생각 마시고 애쓰고 우리가 화두를 참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가 본래면목자리를 얻기 위해서 잠시간 화두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두라는 것은 빨리 타파를 하고서 본래면목자리에만 집착하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육조혜능스님이나 마조스님 임제스님이나 화두를 참구한 것이 없어요. 그냥 바로 깨달아 버렸습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그 마음 불심佛心 그대로 느끼고서 그대로 마음을 닦아서 그대로 천재?가 되었단 말입니다(깨달아버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대오철저大悟徹底라, 한마디에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습기가 있기 때문에, 그냥 이치로 깨달은 간혜지乾慧地로 해서는 바싹 마른 지혜로 해서는 공덕을 못 냅니다. 공덕을. 삼명육통三明六通을 갖추고 무량신통 변화를 갖춘 것이 우리 마음인데, 오랫동안 닦아서 습기를 없애야 공덕이 나올 것인데, 이치로 하는 간혜지乾慧智만 가지고서는 이 공덕을 내지를 못 합니다.
따라서 이 삼동(결제) 동안에 정말로 다른 생각 마시고서 그 영원히 변치 않고 모두의 공덕을 갖추고 또 가장 행복스러운 우리 자성,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자리를 그대로 참구하셔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20001110 백장암 동안거 결제 청화큰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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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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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근념하시였습니다. 실상사 조실스님으로 추대 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