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칼바위 능선- 진달래능선 산행기
길을 나설 때부터 마음이 심란했다. 예정대로 산을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 갈팡질팡 했다. 칼바위 능선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화판을 휴대했는데 막상 올라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기예보를 주시하면서 일단 나서보기로 했다.
12시 56분 정릉탐방안내소에서 들머리에 들어섰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는 오후부터 개일 것으로 나왔었는데 실제 상황이 달랐다. 얼음이 언 계곡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몇 일전 청명한 날씨에 맑은 햇살이 고여들때는 금세라도 봄소식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일전 비봉능선을 다녀올 때 보았던 북한산 산길도 눈이 거의 다 녹아 있었다. 그런데 많은 눈이 내려서 한동안 산에 눈이 두텁게 쌓여 있을 것 같았다.
망설이지 않고 오를 결심을 한 다음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위에 깔린 작은 바위들이 눈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디딜곳을 잘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르막길을 한동안 오르다 언덕을 넘어가는 지점에 위치한 공터를 지났다. 장소가 평평하고 벤치가 있어 평소 많은 사람들이 많이 쉬어가는 곳인데 오늘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너머 완만한 길을 지나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있었다. 멈춰 사진을 찍다보니 뒤에서 한 분이 다가오다 내가 들고 있는 화판을 가리키며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잠시 후 다리를 건너 보국문 갈림길에 당도했다. 앞서 간 분은 내가 사진을 찍는 사이 보국문으로 향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우측으로 칼바위 능선에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평소 사람들이 오가던 발자국이 눈에 묻히고 있었다. 오늘 내리는 눈은 찰지고 잘 쌓이는 눈이었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에 지난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눈길을 조심스레 걷자니 힘이 더 들었다. 지나는 동안 눈에 묻혀가는 발자국이나 상고대를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가다보니 시간이 더 걸렸다. 지나는 사람이 없어 산천이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을 대하니 겨울이 다시 깊어오듯 느껴졌다. 평소 익숙하던 길이 눈에 덮여 지워진 듯 잘 보이지 않았다. 눈 속으로 산천의 모습이 감춰지고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느껴지고 깊은 적막이 감돌아 내 안에 쓸쓸함이 슬며시 찾아들었다. 늘 홀로 오르는 북한산 산행에서 좀체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둑한 하늘빛에 인적 끊긴 눈길을 헤쳐가는 고단함이 그런 감정을 불러온 것 같았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경사지에는 길이 아예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길에 눈이 깊게 쌓인 터라 평소와 달리 디딜 곳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칫 헛디디게 될 까봐 염려하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한참 오르다 보니 앞에서 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칼바위 능선을 오르려다 눈이 쌓여 그 앞에서 돌아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속으로 화판을 들고 지나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계속 이어지는 오름길을 오르다 보니 쥐똥나무 군락이 보였다. 능선이 가까워짐을 알 수 있었다. 쥐똥나무는 잎이 상록수여서 푸른 잎이 그대로 있었다. 그 아래 지금은 마실 수 없는 샘이 단정히 보였다. 샘 입구를 문틀처럼 구조물을 두르고 샘의 벽을 돌로 가지런히 쌓아 놓아서 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날 것처럼 보였다.
오르막길 막바지에 다다라 계단을 디디고 칼바위능선에 올랐다. 좌측으로 오르는 길 입구 표지판에 위험구간 표시가 되어 있었다.
띄엄띄엄 등산객이 생태 체험관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 건물은 내가 설계한 것이다. 암릉 입구에서 시장기가 느껴져 준비한 떡을 먹었다. 한 사람이 다가오다 간식을 먹는 사이 앞서 기면서 칼바위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풍광이 좋아 그것을 보려고 올라왔다고 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마음을 다져먹고 칼바위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첫 암릉을 오르니 앞서 올라간 분이 멈춰 있었다. 보려는 곳이 여기냐고 물으니 오늘은 시여가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곳을 지나 막바지 암릉 앞에 다가섰다. 눈이 쌓여 평소보다 지나가기가 더 험난해 보였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암릉을 올랐다. 발을 디디기 어려웠다. 화판을 들고 지나다 보니 좁은 틈에 끼어 제대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중간쯤 오르며 화판에 묻은 눈을 치우다 안에 있는 그림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경사진 바위를 겨우 오르고 있던 중이라 난감했다. 칼바위 능선에 솟은 바위 늘 그리던 장소에서 그린 것인데 좀 더 그려볼까 하고 갖고 온 것이다. 그것을 그리고 새 종이에 다시 그리려고 준비해왔다.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 화판을 평평한 곳에 던져두고 아래로 내려가 찾아 다시 올랐다.
지나는 능선에서 가장 험준한 암릉을 조심스레 넘어섰다. 짧은 능선을 지나는 사이 칼바람이 몰아쳤다. 늘 오르던 경사 바위를 우회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가다 그림 그릴 곳으로 올라갔다. 1시 47분 그 봉우리에 올라섰다. 오늘은 평소보다 오르는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 앞에 놓여 있었다.
올 떼마다 늘 앉아 그림을 그리던 바위에 서서 돌아보니 시야가 흐렸다. 눈발에 평소 펼쳐보이던 풍광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 쌓인 눈이 거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치고 풍광이 눈보라에 가려서 그림은 그릴 수 없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휴대한 큰 화판도 짐만 된 꼴이 되었다.
둘러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등산로로 내려선 다음 조금 전 보이던 칼바위 능선 정상 봉우리에 올랐다. 거기서 북한산 주능선을 동영상에 담는 사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거세어 화판이 날아갈 듯 들썩이고 잠시 멈춰서 있기도 어려웠다. 성곽을 향하여 봉우리를 넘어가다 보니 얼마 전 휴대폰을 떨어뜨려 급경사지 아래로 내려가 눈 속에서 핸드폰을 찾았던 곳이 보였다. 오늘 같으면 더 위험할 것 같았다.
안부를 지나 다시 올랐다. 성곽이 트인 쪽으로 다가서다 바위에 눈이 쌓여 지나기가 망설여졌다. 아래로 내려서 우회할까 망설이다 성벽을 잡으며 조심조심 성곽 안으로 들어섰다. 성곽 옆은 북서풍으로 날려 온 눈이 쌓여 사람들이 디디고 다닌 길이 더 깊게 패여 있었다. 길옆에 쌓인 눈언저리가 공예품처럼 바람결에 다듬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멈춰 사진을 찍으며 대동문 쪽으로 갔다. 평소 완만하고 가깝게 느껴지던 길이 오늘은 험하고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대동문에 도착했다. 문루 안쪽 너른 공터에 세 분이 서 있었다, 한 분은 딸과 함께 올라왔는데 정상까지 가려다 눈이 많이 내려 여기서 돌아서려 한다고 했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고 했다. 얼마 전 안데스 산맥을 다녀왔는데 거기보다 북한산이 훨씬 좋다고 했다. 다른 한 분은 북한산을 오래 다녀서 모르는 길이 없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 배낭에서 대추차를 꺼내 마시며 추위를 달랬다. 보온병을 겹겹이 감싼 덕분에 아직 따뜻했다. 잠시 후 진달래 능선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완만하고 긴 코스인데 오랜만에 걷는 길이다. 조금 가다보니 앞서 내려가던 부녀가 사진을 찍으며 멈춰 있었다. 먼저 가겠다고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다른 한분도 보였다. 그 분은 올해 80세라고 했다. 걸음은 훨씬 젊게 느껴졌다.
내려서는 진달래 능선에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다. 손과 얼굴이 얼얼했다. 동상이 걸릴까 염려되기도 했다. 걷다보니 만경대쪽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야가 눈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전에 지날 때 보았던 그 풍광이 떠올랐다. 만경대는 동장대쪽과 이곳에서 보는 모습이 더 멋져 보인다.
오늘은 하산 길이 더 길고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눈길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다보니 힘이 더 들었다. 눈보라를 피해 어서 산행을 마치고 싶었다. 길 막바지가 목재 울타리로 막힌 지점에 당도해 좌측으로 내려섰다. 저만치 포장길이 보였다. 더 내려서니 철조망에 낸 출입구가 보였다. 악천우시 오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써 놓은 안내판을 뒤집어 놓아서 내려서는 시선에 바라보였다.
철조망 옆 도선사로 오르는 포장길로 내려섰다. 아스팔트 길 위에는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어 눈이 다 녹아 있었다. 잠시 지나온 능선을 돌아보았다. 도선사로 가는 도로는 자주 지났지만 오늘 지나온 진달래 능선으로 오르는 철조망 문은 드나들 때가 거의 없었다.
아래쪽으로 내려와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을 먹으며 추위를 추슬렀다. 북한산우이역으로 다가가다 뒤돌아보니 주능선이 보였다. 도봉산방향으로는 우이암이 솟아보였다. 우이암 뒤로는 오봉능선과 주능선이 희미하게 좌우로 펼쳐보였다. 추위에 언 몸을 추스르려고 귀갓길을 서둘렀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2025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