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고양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아들 자랑을 합니다.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던 큰아들이 3주째 음식을 가져와 정성스레 대접을 하더랍니다. 근래 목사님의 마음의 상태가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 같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한 마리 양 같고, 빈 그물을 멍하니 쳐다보는 베드로 같았는데 그런 아버지를 위로하려는 아들의 마음에 사랑으로 배부르고 행복해졌답니다.
2천년전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돌아선 제자들을 위해 정성스레 생선을 굽고 아침밥을 차려주셨습니다. 초라한 식탁이지만 그 안에는 길 잃은 인생을 향한 새로운 소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이었습니다. 날은 추워지지만 서로를 위로하는 사랑과 용서의 식탁이 차려져 추위를 이겨내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김빠진 사이다, 앙꼬 없는 진빵입니다. 고전13: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I am nothing.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I gain nothing.”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존재의 의미도, 무언가를 값진 것을 남기는 것도 없기에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은사는 신유의 능력도/ 방언도/ 예언도 아닌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사랑이 없다면 율법적으로 사는 바리새인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며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이란? 둥병상련의 마음이다.
루케이도의 책 <The Gift>에 보면 이런 따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강아지를 사러 애완 동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가게 주인은 강아지를 몇 마리 보여 주었고, 소년은 한 마리씩 살폈습니다. “어느 놈을 골랐니?”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소년은 강아지의 가격을 물어보고는 며칠 후에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빨리 와야 한다. 네가 원하는 강아지가 팔릴 수도 있거든.” 소년은 빙그레 웃었습니다.“아마 제가 고른 강아지는 제가 올때까지 그대로 있을 거에요.”소년은 잡초를 뽑고 유리창을 닦고 마당을 청소하는 알바를 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 가게를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말했습니다.“어떤 강아지를 골랐니?”소년은 가장 볼품없는 마르고 다리를 저는 이 강아지를 골랐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 아인 데리고가지 말아라. 보다시피 불구라 너하고 놀 수도 없고 공을 던져도 다시 물어 올 수 없단다.”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얘가 제가 꼭 갖고 싶었던 강아지에요.” 주인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모든 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소년의 바지 밑으로 의족이 보였습니다. 소년이 그 강아지를 원했던 것은 다리를 절뚝거리는 강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고, 소년에게 그 강아지는 정말 특별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소년의 마음이 바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잘나고 멋진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겠지만, 나 같이 모나고 볼품없는 사람을 주님이 아니면 누가 사랑해줄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줄만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사랑에 감격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랑도 영원한 사랑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랑이 자기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29절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그의 질문은 참된 사랑의 대상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아들러는 이런 태도 즉 자기의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합니다. 아들러(Adler)는 열등감이 생기는 원인을 세 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신체적 결함에 의해 생긴 '기관성 열등'입니다. 둘째, '응석받이'로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되어 있어 베풀 줄 모르고 관심의 중심에 서지 않으면 버림받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무관심으로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많이 보이는, 사랑과 관심, 돌봄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며 사회에서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소외되며 자아존중감이 결여되어 열등감을 갖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에 능통한 이 학자가 이웃이 누군지 몰랐을까요? 과부와 고아, 나그네된 이방인을 성경은 돌봐야할 이웃을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했거든요. 그런데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이웃이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많은 선행을 하되, 자기 자랑거리가 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님을 아십시오. 참된 사랑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즉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그 귀한 사랑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나가 버린 사람들: 비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현대의 그리스인들이 과연 사랑을 알고 이해하고 있는가? 저부터 찔리는 내용이라 설교하기 참 불편하네요. 하지만 해야죠. <5가지 사랑의 언어> 게리 채프먼박사는 이런 예화로 사랑을 설명합니다. “당신의 아내 수잔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했나요?”하고 묻자 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저는 아내보다 먼저 집에 와서 매일 저녁준비를 시작합니다. 일주일에 네 번 정도는 그녀가 오기 전에 저녁준비를 거의 끝냅니다. 다른 날 저녁은 외식을 합니다. 그녀의 허리가 좋지 않아, 청소도 제가 합니다. 그녀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정원도 제가 까꿉니다. 빨래가 끝나면, 옷도 제가 갭니다.”그는 사랑스럽게 아내를 위해 하는 일들을 죽 열거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박사는 다시 남편에게 “아내는 무슨 일을 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제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 보여주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했는데, 그녀는‘지난 2,3년간 저한테서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니, 도대체 그녀를 위해서 뭘 더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수잔을 돌아다보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박사님, 그런 것들은 다 좋아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같이 앉아서 대화하는 겁니다. 우린 대화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항상 뭔가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시간을 내어 나와 함께 서로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사랑의 본질은 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가까이 다가간다는 뜻이지, 무엇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자랑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느냐? 왜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냐?”라는 불평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우슈 코르작의 아이들>이란 책의 일부입니다.“"1942년 8월 6일 코르착과 아이들의 죽음의 행진은 전설이 되었다. 피로에 지치고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코르착은 200명의 아이들을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게 이끌며 기차역을 향해 숨죽인 바르샤바의 거리를 힘차게 행진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들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이들과 트레블링카의 가스실이 종착지인 화물차에 올랐다." 사랑은 함께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타는 불구덩이 속에 있었던 하나님,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물론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와 달리 코르착의 이야기에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그 순간에도 아이들은 그들의 선생님과 함께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사명,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들도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곳에서 손잡아주고, 기뻐하는 곳에서 축하해주고, 인생의 가장 어두운 길을 함께 걸어주는 것이고, 강도 만나 피흘리는 곳에서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애들한테 가르치는 것이“괜한 일에 상관하지 말아라, 괜히 돕다가 덤태기 쓰는 수가 있어!” 이런 가르침속에서 어떻게 강도만나 피흘리는 사람의 곁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24일 경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시내버스에서 갑작스럽게 쓰러졌던 50대 승객이 기사와 승객들의 응급조치 덕분에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지난 23일 오전 11시 33분쯤 경주시 51번 시내버스에서 50대 승객 A 씨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자 한 승객이 다가와 A 씨의 몸을 바로 눕혔고, 버스 기사 김수찬 씨가 운행을 중단한 뒤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고, 다른 승객은 119에 신고해 버스 위치와 A 씨 상태를 알렸습니다. 심폐소생술은 약 1분정도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승객은 A 씨의 목을 받치고 팔다리를 주무르는 등 거들었습니다. 심폐소생술과 119 신고는 A 씨가 쓰러진 지 단 '18초' 만에 이루어졌고, 기사와 승객들의 재빠른 대처 덕에 A 씨는 의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을 졸지에 잃을뻔한 사고가 이웃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는 한 가정을 지키는 숭고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분들의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동병상련이란 말을 다시 하게 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를 가진 사람을 돌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는 삶, 자기들끼리 살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생업을 위해서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면 주눅이 듭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유대인들의 시선이나 말투 대하는 행동도 따뜻하지 않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분노가 있지만 유대인들이 더 많으니 그 분노를 불출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여야 합니다. 민족감정이란게 이상한 것이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에 코로나 확진자수가 50명, 100명수준이라는데 화가 납니다. 목사도 심술이 나는데 다른 일반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지들도 잘난게 하나도 없는데 수백년을 무시당하고 살았으니 원한 관계가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딱 봐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당하는 입장이지만 그는 긍휼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다 가졌어도 긍휼을 갖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긍휼은 그를 돌보게 만들었고 자기 시간을 사용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물질도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는 보상을 바라거나 상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구약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이방인이라고 말하지만 이웃을 성경대로 사랑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도 못하는 자비와 선행을 베풉니다. 희생적인 행동을 합니다. 본받을 모범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더 닮아 있나요? 레위인이나 제사장 혹은 사마리아 사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들의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신앙의 본질인 사랑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성탄의 계절,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며 사랑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찾아가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헌신을 실천하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