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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은 성스러운 분으로 시몬느베이유를 꼽았다.
영혼의 모든 자연적 움직임은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이다.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맡겨진 인간의 불행과
초차연의 빛인 은총의 순간
모든 인간이 처한 근본적 삶의 조건을 파헤친 인간 탐구의 기록
좌파/기독교 신비주의자, 전쟁에 반대하고 약자들을 위해 투쟁했던 운동가/유토피아와 혁명의 비전을 거부하고 ‘수난’에 주목했던 사상가, 광신적 금욕주의자/모든 아웃사이더들의 수호성인. 일직선상에 놓기 힘든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수식어들로 호명되어온, 프랑스의 철학교사이자 노동운동가, 사상가 시몬 베유의 대표작 『중력과 은총』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중력과 은총』은 베유 사후, 사상가 귀스타브 티봉이 베유가 맡겨둔 열 권이 넘는 공책들 중에서 단장들을 고르고 각 장에 제목을 달아서 출간한 것이다.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맡겨진 인간의 불행과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적인 주제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베유의 독특한 신학을 아포리즘적인 문장 속에 담아낸 일종의 종교적 수상록이자 모든 인간이 처한 근본적 삶의 조건을 파헤친 인간 탐구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력과 은총』을 비롯한 베유의 글들은 알베르 카뮈, 앙드레 지드, T. S 엘리엇, 아이리스 머독, 플래너리 오코너, 앤 카슨, 조르주 바타유, 조르조 아감벤 등 수많은 작가 및 사상가 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이후로는 지성계를 넘어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을 생각할 때, 베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주 오독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올겨울 세 출판사에서 시몬 베유의 세 작품 『중력과 은총』(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이종영 옮김, 리시올),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이종영 옮김, 새물결)을 공동으로 출간한다. 세 작품을 가로질러 읽음으로써 베유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는 『중력과 은총』은 개정판본으로 번역가 윤진이 기존 번역을 세심하게 수정했고, 책에 등장하는 문학작품 및 성경 인용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덧붙였다.
“우리는 가상의 낙원보다 실재하는 지옥을 선호해야 한다.”
중력 혹은 맹목적 필연의 구속을 받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주시
1909년 파리의 유대계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1943년 영국의 한 요양원에서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시몬 베유는 하나의 틀 안에 정리해 넣기 힘든, 상당히 복잡한 삶의 경로를 밟아왔다. 고등학교 철학교사를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공장으로 가서 직접 노동을 한 급진적인 운동가였으면서도 공산주의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이며 약자가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권력의 양상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영성 체험을 한 후로 종교에 몰두하면서도 세속 교회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으며, 그리스 비극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려 하기도 했다. 또한 나치 치하에서 유대계 프랑스인으로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면서도 유대 역사 및 유대교에 대해서는 더없이 적대적이었다.
베유 삶의 각각의 국면들이 하나로 수렴되기 어려워 보이는 것만큼이나 베유에 대한 반응 역시 양극으로 갈리곤 했다. 베유의 정치적 면모에 주목하는 이들은 베유가 이후 종교에 몰두하게 된 것을 두고 전쟁 경험을 통해 비관주의에 빠진 결과라거나 심리적 불안정으로 해석하면서, 종교에 ‘물들기’ 이전의 저작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고, 베유의 종교적 면모에 이끌리는 이들은 베유의 정치적인 경험을 통과의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정치적 색깔을 삭제한 채 텍스트를 독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베유에게 이 두 가지 면모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특히 『중력과 은총』은 베유 신학의 중요한 관념들을 담고 있는 책으로 간주되어 초기에는 종교적 의미를 찾는 독자들에게 더 많이 읽혀왔으나, 근래에는 중력, 은총, 필연, 우연, 폭력, 사랑, 악, 아름다움, 탈창조 등 베유가 독특하게 재정의하고 있는 관념들을 중심으로 복합적인 관점에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텍스트는 베유가 생전에 출간을 염두에 두고 완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저자의 의도이고 어디까지 엮은이가 개입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지점이 적지 않다. 여기에 단장의 나열이라는 형식적 특징까지 더해져, 매우 간결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모호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럼에도 베유의 목소리는 마치 선지자의 음성처럼 허공에서 울려 퍼지며, 강력하게 사람을 끌어들인다.
중력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은총은 받아들이기 위한 빈자리가 있는 곳에만 들어온다.”
“영혼의 모든 자연적 움직임은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문을 여는 『중력과 은총』은 중력 혹은 맹목적 필연에 구속받는 인간의 불행과 이와 대립되는 은총의 빛을 이야기한다. 베유는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거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는 식의 믿음을 통해 종교에서 위안을 얻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그 고통에 대한 위로이다. 고통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고통의 최고 가치이다.” 고통을 ‘실재’로 인정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맹목적 필연에서 해방된 세계를 약속하는 혁명 역시 현실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고 인간이 한계를 대면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베유에 따르면 “필연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상상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가상의 낙원보다 실재하는 지옥을 선호해야 한다.” 베유는 고통을 통해 우리가 처한 조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이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주체로서의 자아를 비움으로써 비로소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빈자리가 마련된다. “은총은 채운다. 하지만 은총은 받아들이기 위한 빈자리가 있는 곳에만 들어온다.” 그러고 나면 여기에 미약하지만 어떤 가능성이 생겨난다. “인간은 아주 짧은 섬광 같은 순간에만 세상의 법칙들을 벗어날 수 있다. 정지의 순간, 관조의 순간, 정신적 빈자리의 순간, 도덕적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런 순간에 인간은 초자연에 이를 수 있다.”
어떠한 위안도 구원의 약속도 없이 오로지 인간이 처한 비극적 조건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고, 인간 주체의 힘과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혁시킬 가능성을 부정하는 베유의 주장을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녀의 사유는 유럽 사회가 오랫동안 믿어온 합리성과 진보가 부조리한 전쟁 속에서 무너져버린 시대적 상황 속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띤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모든 가치를 탐문에 부쳤던 베유의 치열함은, 오늘날 일상성이라는 견고한 보루 안에서 중력에 더욱 강력하게 붙들린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은총의 빛과 “중력의 법칙들을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짧은 섬광 같은 순간”에 대한 베유의 아이디어를 ‘베유에 반(反)하여’,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사유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1.
데보라 넬슨은 『터프 이너프』에서, 알베르 카뮈가 “베유의 문학적 실행자”였다고 말한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파늘루 사제의 모습이나 그의 강론 내용은 베유를 중요하게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페스트의 도래 그 자체를 신의 자비의 증거로 파악한다는 강론이나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관련해 『중력과 은총』에서 유사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2.
앤 카슨은 자신의 책의 제목을 『중력과 은총』에서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탈창조’라 붙이고, 이 개념을 바탕으로 사유를 전개해나간다.
3.
베유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세월』에서 학생들이 종종 ‘사상가’ 시몬 베유와 ‘정치가’ 시몬 베유를 헷갈리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고 쓴 바 있다. 에르노는 1974년 정치가 베유가 임신 중단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남성들로 가득 찬 의회에서 홀로 분투하는 것을 보고, 그런 오해를 하는 학생들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고백한다.
「한 때 이현필이 무등산 「삼밭실」에서 병을 요양하며 지내는 동안(50세 무렵) 각혈이 심했다. 한번 각혈을 하게 되면 깡통에 절반이나 피를 토했다. 각혈을 할 때는 이현필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합장하고 앉아 각혈을 했다. 겁에 질린 수녀들이 곁에서 울면 “기도하시오. 기도하시오” 하고 연방 말했다. “주여, 내 피를 다 쏟게 해 주옵소서” 하면서. 두려움도 고통의 표정도 없었다.
수녀가 “선생님 힘드신데 누우십시오.”하면, 이현필은 “눕다니요, 눕다니요. 지금 내 더러운 피가 나가는데. 내 피는 다 빠지고 예수님의 피가 내게 들어와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신랑을 영접하는 이 기쁜 순간인데 눕다니요...” 하면서 평화스러운 얼굴로 기뻐했다. 그리고 “내게 병을 주 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했다. 자기는 폐병으로 일생 시달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까봐 곁에서 간호하는 수녀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여간 경계하지 않았다.」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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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은 시몬 베유가 살면서 깨달은 영적인 감동을 짧은 글들로 표현한 책이다.
그는 “영혼의 모든 자연적 움직임은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질계의 중력 법칙 즉 과학 법칙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종결된다. 부실 공사를 하면 건물이 무너지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파멸하게 된다.
그러나 은총은 다르다.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물과 공기를 내린다. 그가 선하든 악하든 상관 없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악인과 죄인을 막론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동시에 은총은 아주 특수한 환경과 상황에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이 내리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평생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은총은 언제 임할지 예측할 수 없으며 결과를 알 수도 없다. 그것의 의미와 가치 또한 측량하기 어렵다. 은총이 중력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것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중력 법칙이 일상이라면 은총은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이 초월이라고 해서 그것을 변화산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 전적으로 영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은총은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고 감당하는 어떤 것이다.
중력의 법칙 속에서도 우리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은총의 영역에서도 선을 선택하고 짊어질 수 있다.
중력과 은총을 반대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 중력 법칙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가 은총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알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은총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를 그 어려움으로부터 구해내시는 것,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른다.
암에서 고침을 받거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등, 우리는 고통이 행복으로 변하는 것을 은총으로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악이 선을 이기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악이 패배하고 선이 승리하고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될 때 마치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 또한 중력 법칙이 잘 작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은총은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고난이 은총’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고난을 통해 배운다,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이 빚어진다, 이런 말처럼 행복이 아닌 고난이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퍼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현필 선생도 질병을 은총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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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은총과는 다른 은총을 이야기한다.
불행이나 고난이 닥칠 때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인식하고 그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신의 은총으로 여기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죄도 없는데 고난을 당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력 법칙의 영역이 아니라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고난 당하고 죽는 것, 그것이 대표적인 신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은총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은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셨기에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괴로워하셨다.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이나 죽음의 두려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셨다. 신의 은총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화답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오로지 인간으로서 담당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너희도 나처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인간으로 사셨기에 가능한 말씀이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었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에 인간 예수가 전적으로 동의하고 합력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 동시에 인간이 전적으로 행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은총의 대표 사건이 십자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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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현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으로 오셨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셨고,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셨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산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살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인가?
그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먼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당연히 맞는 말씀이다. 예수님도 그것이 첫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교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가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종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므로 사랑이 기독교의 최종 가치이며 덕목이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나 말고 다른 사람, 소위 이웃으로 지칭되는 세상 모든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첫 번째는 사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것과 교회 나가서 예배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그래서 교인의 첫 번째 사명을 교회 나가서 예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여기고, 코로나 시대에도 예배를 강행한다.
이단들이 그렇게 예배하다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뻔히 보고도 주일성수와 예배사수를 외치기도 한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하는 것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시는 분들은 이사야나 예레미야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선지서에는 수많은 제사가 있었지만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사는 백성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성전에 헌금하기 전에 친구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제사에 매달리는 제사장과 율법사들을 비판하셨다.
평생 예수를 믿었다는 한 권사님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교할 수도 있지만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반쪽짜리 믿음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라면 둘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이며 이것은 첫째 계명과 같은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 사람(이웃)들을 미친 듯이 열렬히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시 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결국 예배뿐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주일성수와 예배에 목숨을 걸고 있다.
주일 낮밤, 새벽기도, 수요, 금요기도, 구역예배, 각종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예배와 유사 예배를 통해 성도들을 예배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예배와 성경공부, 제자훈련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원해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시 돌아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그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이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교회에는 ‘사람’이 없다.
사랑의 종교라는데 사랑의 대상인 ‘사람에 대한 생각’이 1도 없다.
전도와 선교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면 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인가?
그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선한 백성이 이 땅에 살면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면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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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은 약하고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고통당하면서 투쟁했던 시몬 베유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다.
그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근거 없는, 부당한 고통이 올 때 이유를 찾거나 거부하거나 이후에 위로나 보상을 원하지 말고 그저 묵묵하게 그 고통을 담당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총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예수를 믿는 아름다운 여성이 불의의 사고로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고통 속에 살고 있지만 그녀의 간증을 들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다.
불행과 고통이 어떻게 신의 은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누군가의 고통이 신의 은총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대속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총임을 우리가 모두 다 알고 믿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은총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고통은 빨리 벗어나야 할 어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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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유익도 없고, 은총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은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만약 죄가 있어 고난 당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이며 고난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그의 고난도 은총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차원 높은 고난은 죄없이 당하는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일 것이다.
중력 법칙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은총은 합리적인 이론을 넘어선다.
이 때 우리는 그 은총이 고난이든 행복이든 죽음이든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시몬 베유가 <중력과 은총>에서 말하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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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생각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임을 알 것.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닮을 것.
너무 순수하고 또 신들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벌 받은 인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가까워지면 형벌을 초래한다.
우리 존재 속에서 신이 찢긴다.
우리는 신이 겪는 십자가형이다.
신의 사랑은 우리에게 수난이다.
어떻게 선이 고통없이 악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신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고통이다.
찢김 없이는 신이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것도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두께를 지나야 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대속의 고통은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수한 상태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고통이다. 존재를 구원한다.
죄 없이 고통 받는 자는 악 위에 구원의 빛을 퍼뜨린다. 죄 없이 고통 받는 자는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난 죄 없는 신의 형상이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과 신을 사랑하는 인간은 고통받아야 한다.
시몬느 베이유(1909~1943)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예수는 우리 인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렸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하는 자책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유다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함께 사는 세상,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꿨다. 사회사상가 시몬 베유는 프랑스 명문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스물다섯의 어느 날 그녀는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동차공장 여공으로 들어가서 노동자생활을 체험한다.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향한 그녀의 강렬한 인간애의 꿈 때문이었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스페인내전에 의용군으로 지원한 그녀는 2차대전 때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활동에 뛰어든다. 불꽃 같은 삶의 틈새에서 신과 사회, 실천과 사랑, 철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사색과 저술에 골몰하다가 건강(폐결핵)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나 ‘남들과 같은 영양섭취’를 고집하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헐벗고 고통받는 민중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고집 때문이었다.
그녀의 불꽃 같았던 삶과 사색은 죽은 뒤 책으로 출판되어 2차대전 뒤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년에는 인간의 근원적 불행의 구제를 목표로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 경향을 보였다. 그녀의 생애는 억압당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실천으로 일관되었으며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유대인이었지만 역설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종교적 저술 때문에 몇몇 비평가들은 그녀를 거의 반유대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교육제도가 지닌 억압적 성격에도 반대했고, 저 죽음에 이르는 병을 탈고한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한 실존주의적 그리스도교를 지향했다.
시몬 베유의 종교적 명상집 『중력과 은총』
대표작 『중력과 은총』은 시몬 베유가 남긴 원고를 사상적 동지인 귀스타브 티봉이 가려뽑아 펴낸 책으로 인간 조건에 대한 그녀 나름의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통찰이 뛰어나다.
1947년 이 책이 출간되자 그녀의 불꽃 같았던 삶과 사색은 전쟁에 지친 온 인류에게 위대한 영혼의 목소리로 다가갔고, 시몬 베유는 한낱 이름없는 여인에서 고귀한 사상가로 거듭나게 된다.
시몬 베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천재적인 작품에는 고도의 정신이 요구되며, 엄격한 내면의 순화를 거치지 않으면 완전한 표현에 이를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순수함과 내면적 진실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녀는 문장의 기교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또 유행의 흐름에도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따라서 그녀는 허식 없는 영혼의 모습을 그려내듯 군더더기를 모두 쳐낸 문체를 가장 중시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들의 핵심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치 중력을 받은 것처럼 쓰러져 있으며 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일어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은총이란 지성과 믿음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게 하는 초자연의 빛을 말한다. 『중력과 은총』은 그녀가 특정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고백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삶의 근원적 조건에 대한 탐구와 그 극복을 위한 철학적 사유를 써내려간 글이다.
철저한 사유의 사상가이며 사회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마지막까지 고뇌하던 시몬 베유. 그녀는 신비스런 종교적 체험으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찾게 되지만, 그런 뒤에도 기존 종교의 제도권 밖에 머무르기를 고집한다.
『중력과 은총』은 이러한 시몬 베유의 내면적 여정와 사상적 마무리가 그대로 반영된 명저로서, 특히 종교계 인사들에게 종파를 뛰어넘는 사회참여운동과 높은 윤리정신이 요구되는 자기정화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어쩌면 예수의 삶을 질투한 여자 사상가의 일탈정도로 생각이 들 것이다.
세상의 고통과 비극을 온몸으로 껴안고 불꽃처럼 살다 간 시몬느 베이유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하셨다.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슬퍼 우는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그들과 삶을 나누지는 못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한다˝
자신의 자화상에 바보야,를 써놓고 ˝나는 바보가 맞네. 하느님은 위대하고 사랑과 진리 그 자체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 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말일세˝라며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셨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 속에 사제들이 철밥통이 돼 끼니 걱정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이 가시로 보이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정치의 대통령이라면 추기경은 종교의 대통령이다.
모두 높은 자리를 권하고, 말이 틀려도 맞다고 하고, 좋은 것은 제일 먼저 주고하니 자신이 교만해지더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가난하고 고통받고 아픈 사람들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추기경님은 계속해 말씀하신다.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내 전부인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시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은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꺽지 않으시고, 심지의 불이 하늘거린다 하여 끄지 않으셨다.
심지어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며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달동네건 피폐한 농가건 '낮은 자리'의 '작은 이들' 가운데서 태어나시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할 때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낮은 자리'에 찾아가 '작은 이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바싹 귀를 기울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무감에서 나온 '땜질식 사랑'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감탄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삶은 우리에게 감탄하라고 보여주신 게 아니라 그대로 따르라고 제시해준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과학 책으로는 특이하게도 마음에 기초한 접근이 돋보였다. 마음이 부서지고 깨진 비통한 자들에게, 그 부서진 마음을 흩어 내버릴 것(Broken apart)이 아니라 부서진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때(Broken open) 연대와 변화 같은 새로운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정치학을 이성과 논리와 경험적 데이터가 아니라 마음과 영성의 문제로 풀어낸, 기발하면서도 독특한 책이었다.
이 책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보다는 조금 더 발랄하고 가벼운 에세이 모음집이다. 에세이라서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은총을 바라보기로 한, 스스로 가볍다고 생각하기에 날 수 있는 천사가 되어 보기로 한 책이니까 그렇다.
버클리대학에서 종교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일, 애 셋 딸린 가장인 주제에 안정적인 교수직을 포기하고 사회운동가의 길을 택했던 이야기,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의 20세기 버전”이라 불리는 가톨릭 영성주의자 토머스 머튼의 책 ‘칠층산’과의 만남, 그럼에도 가톨릭 대신 퀘이커를 택한 이야기 등이 잔잔한 유머와 함께 전달된다.
이 책의 기조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과 같다. 늙는다는 것, 그래서 일 처리도 더디어 지고 뭔가 자꾸 잊어버리고 어설퍼진다는 것 또한 마음이 부서지는 사태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일 것만 같던 죽음이었건만, 이제 그 녀석은 내 발 밑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는 그 자체로 축하할만한 사건”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깨달음이다.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음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평생 나를 울리고 괴롭혀왔다고 생각해왔던, 대체 내게 왜 이래 싶었던 이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해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이제 “내 기대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다.” 이 즐거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불굴의 패배’를 할 것인가.
불굴의 패배는 이런 것이다. “결과에 연연하는 한, 우리는 결과가 나오는 점점 더 작은 과업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사랑, 진실, 정의 같은 가치들(결코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을 가치들)을 따라 살 때는 오직 충실함만이 판단 기준이다.” 거대한 몰락 앞에 서서 가볍게 날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다.
이세종은 어록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유케 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져야 한다.”라 고말했다. 한번은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이세 종은 “얻어먹어라.”고말했다. 그래서 오복희는 추운 겨울날 탁발을 실행했다. 이세종도 거의 거지같이 생활을 했다. 이세종의 탁발 강조는 도미니코의 탁발 강조와 프란치스꼬가 가난을 자신의 신부라고 말한 것과도 유사하다. 이세종도 가난을 이상적 삶으로 생각했다.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정신을 여제자 글라라가 계승했다면, 이세종의 가난의 정신은 여제자 오복희가 계승했다고 할수 있다. 이세종은 죽기 전 마지막 3년은 신
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한새골에서 지냈다. 3년간 산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전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았다. 얼굴과 손에는 때가 너무 끼어서 까맣게 되었는데, 그래도 음식 먹을 때에 쓰는 손가락 끝만은 짐승 발톱 마냥 하얗게 드러냈다. 이세종의 이런 금욕적인 모습은 니트리아의 수도사 이시도르와 유사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머리끈 외에는 좋은 내의를 입지 않았고, 목욕을 하지 않았으며, 고기도 먹지 않았다. 이세종이 임종하면서 남긴 유산은 바가지 세 개뿐이었다. 이세종은 평생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직 성경만 읽고 동방과 서방의 수 도사들에게 나타났던 금욕적 요소가 나타났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실천했던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처럼 이세종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실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동 이세종님, 방림 이현필님을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에서 같이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