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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를 앞두고…
오는 2022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는 세계 오순절 신자들의 축제로서 1947년 스위스에서 처음 시작되어 3년마다 열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과 1998년에 개최된 바 있다.
이 대회를 앞두고 지난 6월 9일에는 ‘2022 한국오순절대회’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때 세 사람이 발제를 했는데, 그 주제는 ‘세계 오순절 성령운동의 역사’(이영훈), ‘존 웨슬리의 성령이해’(박창훈)와 ‘한국 오순절운동의 역사와 현황’(배덕만)이었다.
이영훈 목사의 발제는 24년 전에 내가 한세대신대원에서 강의시간에 들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배덕만 교수는 한국에서 오순절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발전했는지를 짧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는 또한 오순절 운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하는 네 가지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에 대한 기대와 체험을 더욱 강력히 추구하라.
2. 성령운동의 범위와 역할을 더욱 확대하라. 성령의 역사를 방언으로 한정하지 말라. 성령은 우리 안에, 교회 안에, 대한민국 안에, 천지만물 가운데 역사하신다. 성령이 모든 곳에 일하시도록 문을 열어라.
3. 다양한 성령운동들과 긴밀히 협력해서 한국교회가 건전한 성령의 교회가 되도록 이끌어라. 순복음교회, 하나님의성회, 복음교회, 연합교회, 하나님의교회, 성결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이 교리를 넘어 성령으로 하나되어라.
4. 정치와 신학 등으로 분열된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먼저 성령으로 화해하고 치유하는 일에 나서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라.
참고 자료
박창훈, 배덕만의 강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cF7AyGII70
위 세 발제자들의 강의안:
https://www.26pwc.org/ko/26th-pwc-book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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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는 1936년에 출생하여 지난 2021년 9월 14일에 별세했다. 그 시신은 오산리최자식금식기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조용기 목사는 오순절 운동의 한 가운데서 가장 큰 횃불을 가장 힘있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2022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오순절대회는 그 오순절 성령의 횃불이 다시 활활 타올라 모든 교회에 부흥의 불길로 번지기를 염원하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특히 이번 대회의 주제는 다음 세대에게 오순절 운동을 어떻게 전수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음세대는 1960년대 말에 태어난 나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2000년대에 태어난 청년들을 말하는 것일까?
엄밀하게 말하면 지나간 오순절운동의 물결 속에서 나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는 지금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 조용기 목사와 및 선배들은 성령 운동의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래서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지금 내가 목회자로 서 있는 강단에서 청년들은 신앙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올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세계오순절대회는 나와 같은 목회자에게 성령운동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이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던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우리 선배들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성령의 불을 지펴왔는데 그 후배들인 우리는 게을러서 그 성령의 불을 꺼뜨렸는가 하는 질문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어떤 성도들의 기도 속에서 이런 비난을 감지할 때가 있다. 아니면, 우리 시대의 성령운동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위에서 발제한 배덕만 교수는 더욱 간절하게 더욱 넓은 영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한국과 세계를 치유하는 성령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신학교에 다니던 1997년부터 나는 강의실에서 이런 말을 계속 들어왔다.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은 강단에 설 때면 언제나 성령운동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떤 운동이 지속하기 위해서 또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세대를 설득하고 이끌 수 있는 사상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조용기 목사도 오직 기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여러 책을 통하여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조용기 목사는 로버트 슐러 목사나 노먼 빈센트 필 같은 이들을 한국에 소개했다. 나도 청년 시절에 ‘적극적인 사고방식’(빈센트 필)을 사서 읽었다.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는 2011년에 가톨릭 교회에 매각되었고 그후 2015년에 로버트 슐러 목사는 별세했다. 수정교회의 파산과 관련하여 여러 분석과 평가가 발표되고 있다.
2022년 지금, 오순절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사람은 태어나서 잠시 동안 살다가 죽지만, 세상은 그대로 있으며(전 1:4),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모세가 그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던 시절에 만든 놋뱀은 박살나야 한다고 히스기야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백성을 향하여 그 신령한 유산을 ‘느후스단’(놋쪼가리)이라고 부르면서 부수었다(왕하 18:4).
모세가 광야에서 그 백성을 이끌 때 그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쳤다. 그는 홍해 앞에서도 그렇게 말했고 광야에서 힘들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그 백성을 권면했다. 그러다가 백성이 불뱀에 물려서 죽어갈 때 모세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올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믿음의 도구로 사용했다(민 21장).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했다. 놋뱀은 마치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든 어떤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출 15:22~25).
그런데 히스기야 시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혼미하게 되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어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겼으며 심지어 모세가 만든 놋뱀에게도 분향하는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보여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알지 못하고 무익하고 헛된 행동에 붙들려 있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일깨워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모세의 계명을 잘 연구하여 그것에 충실하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운동에 무슨 신학이 있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운동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영향을 주는 데는 그들을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주어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거나 또는 불의와 곤경에 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한다. 그 힘을 얻은 사람들이 많아졌으므로 운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오순절 성령운동은 어떤 힘을 가졌던 것일까? 이영훈 목사는 ‘세계 오순절 성령운동의 역사’라는 발제에서 종교개혁 이후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각 시대에 어떻게 일어나서 자기 시대를 깨웠는지를 열거했다. 그들은 루터와 칼빈, 필립 슈패너,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 그리고 조지 휫필드와 찰스 피니 등이며, 심슨, 찰스 파함, 그리고 윌리엄 시무어 등이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고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이끌어 용기와 희망을 제공했다.
그렇게 보면, 성령운동의 힘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은 종교개혁이나 경건주의 또는 신비주의나 은사운동 등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은 히스기야나 다윗, 그리고 모세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 진실되게 살아낸 바로 그 신앙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단의 성령운동은 방언과 뜨거운 기도만을 강조하는 것 아닌가 하고 나는 우려한다. 배덕만 교수가 성령운동의 범위를 넓히고 다양한 진영과 교류하라고 제안한 것은 같은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령운동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뜨겁고 진실된 만남이라면 그 만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은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의 과제이며 동시에 개인의 과제다. 개인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보통 개인의 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대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갈 동력과 방향을 거기에서 발견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렇고 경건주의자들의 체험이 그렇다.
오순절 운동도 그런 측면이 있다. 즉, 사회에서 빈곤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것이 바로 성령체험이 아니었을까? 조용기 목사의 경우에는 좋으신 하나님을 전하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그의 가르침은 바라봄의 법칙, 또는 절대긍정의 신앙, 그리고 사차원의 영성 등으로 소개된다. 그것은 모두 현실의 가난과 문제 앞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일어나라는 격려가 아닐까? 어쩌면 불광동 천막 속에서 그는 절대빈곤이라는 시대적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모세의 놋뱀이 느후스단이라는 오명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 방법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민족적 사명을 깊이 자각할 때 발견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놋뱀의 역사에 매몰되어 그것에 영험한 능력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거기에 분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고 그들에게 율법과 성막을 주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들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집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훗날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일으킨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고 세계 모든 나라의 모델이 되고 빛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절대빈곤과 절대가난 속에서 만난 긍정과 희망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한 세대를 이끌어 온 메시지다. 그것은 마치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한 놋뱀의 이야기처럼 이스라엘의 광야세대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 놋뱀의 이야기는 다른 의미가 되고 말았다.
절대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는 어느 시대나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다음세대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배고픔과 생존의 위기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선진국에 가입한 나라의 풍요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이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성령운동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그릇된 신비주의나 과도한 은사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과제와 시대정신을 이끌 수 없는 메시지도 더 이상 새로운 운동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최대 과제는 우리 시대의 과제와 시대적 문제를 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노력을 어떻게 기울일 수 있느냐다.
이번에 열리는 세계오순절대회 기간에는 파주 평화누리공원에서 기도대성회가 열린다. 거기에 주강사로 나선 이들은 모두 목회자들로서 찬양과 신유, 교회성장 등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하여 거의 고민해 보지 않았을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번 대회의 기획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는 중심이 아닌가?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일깨워줄 사람들을 앞에 세운다면 더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번에 드리는 DMZ 기도대성회는 교회에서 매주일 드리는 통일을 위한 기도와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서울에서 올림픽이나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할 때 주최자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들은 한국의 고유한 멋과 전통, 그리고 독특한 문화와 기술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계와 소통하려고 할 것이다. 이번에 열리는 제26회 세계오순절대회는 어떨까? 행사프로그램과 일정을 보니 문득 청년 시절에 교사강습회에 참석하던 생각이 난다. 훌륭한 강사들이 다채롭게 열어놓은 강좌를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 열리는 대회에서 한국인 지도자들은 이영훈 목사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청년의 간증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외국인들이다. 그들에게 세계오순절운동의 흐름과 방향, 그리고 과제와 해결책을 배우라는 뜻인가? 아니면, 이미 우리나라의 오순절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한국 안에서 이미 오순절 운동을 이끌어갈 동력이나 비전을 잃은 지 오랜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는 것일까?
몇 년 전부터 어떤 목회자들이 아프리카의 목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열고 있다. 그들의 집회는 보통 은사와 예언이 중심을 이룬다. 그들 중에는 몇 년 몇 월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이 큰 행사를 벌이는 모습이 우리의 빈약한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나는 우리 교단의 소속 목회자로서 이번 행사에 대하여 홍보물을 받았고 준비기도회에도 참석했지만, 이번에 우리가 절박하게 기도하고 한국 사회에 책임 있는 공교회로서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도전도 받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 다시 한번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고 이 땅에서 성령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기를 기도하자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이 대회를 알리는 홍보물에는 사회정의와 종교적 권리에 관해 정부와 국가에 담화를 발표한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차별금지법 입법을 반대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 주장은 우리 교단 신문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크게 실려 있다. 우리가 이 주장만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정신적 포용성을 가질 수 있을까? 도리어 시대정신에 퇴행하는 것은 아닐까? 교계 안에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대를 이끄는 성령의 역사는 단지 뜨거운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뜨겁게 기도하고 부르짖는 열성파는 자칫 극단주의로 흐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박해하는 유대인들도 뜨겁게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성령은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초대교회를 어떻게 이방인을 포용하는 세계인의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던가?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열린 대화와 말씀의 나눔, 그리고 진리 앞에 굴복함이 아니었는가? 초대교회의 문제는 유대교의 신앙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아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후에도 이런 주장을 계속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점차 성령의 역사에서 도태되었다. 그렇게 성령은 늘 사람과 제도의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의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초대교회가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경험한 성령의 역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 교단은 1906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을 언급하면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재현되었다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오순절의 경험은 반복되어야 할 경험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권능을 입고 증인이 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을 잘 읽어보면 사도들은 오순절의 경험을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사건이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예언의 성취이며 그 성취 내용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만인의 구주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증거해야 할 복음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바로 그 사실을 확증해준 사건이다.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확신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고인물로 이해하게 했으며, 로마의 통치자를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신다는 확신과 자부심이 교회에 충만했다.
그런 확신으로 교회는 피차 권면하고 격려했으며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하심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절박한 기도의 자리마다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초대교회가 성령을 위한 어떤 집회를 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오순절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확신했으며 그 주님이 교회를 새 언약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서 새 일을 행하고 계심을 확신했다.
교회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각성했으며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 희망은 자신들의 시대를 주름잡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며, 우리 주님이 오셔서 모든 거스르는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것은 종말론적 기대였으며,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갈 동기를 제공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독특성이 아닐까?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 저 세상으로 가려는 도피주의적인 모습이 아니었고, 도리어 저리로부터 주님이 오셔서 이 땅을 새롭게 하실 것을 강하게 기대했다. 그런 기대가 교회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고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주님이 곧 오시기 때문이다.
이영훈 목사는 오순절 운동을 복음주의 운동과 에큐메니컬 운동과 함께 기독교의 3대 운동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복음주의 운동이나 에큐메니컬 운동은 각기 시대적 과제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은 그 과제를 분명하게 포착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조용기 목사는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할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진 분이다. 전 세계 지도자들과도 만나 지구적 현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위한 특별한 메시지를 통해서 꿈과 희망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용기 목사는 우리나라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가 열릴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단 신문에 WCC와 무관하다는 광고를 크게 실었다. 이는 분명한 퇴보다!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유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제목이 생긴 이유는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진리를 발견한 데서 나온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민 없는 기도는 어쩌면 오늘의 느후스단이 될 수 있다.
이번 세계오순절대회를 통하여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싶다. 간절히.
<끝>.
홍보 동영상
참고:
첫째날 행사 프로그램과 소감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2900222275
둘째날 행사 프로그램과 소감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2900229758
셋째날 행사 프로그램과 소감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2900806529
전체 행사 소감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2900809178
특별 설교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를 마치고…
다음 세대에서 오순절 교회가 나아갈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