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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 대민(주일낮)
기다리는 신앙(시40:1-3)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시 40:1-3,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눈앞에 당장 일어나면 다 믿겠는데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답답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하신다. 언제 약속한 것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못 박아 놓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 때'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는지, 의지하는지 살펴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약속은 다하시면서 시간 약속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이 말은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예정된, 약속된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때, 그 시기, 그 역사의 시간을 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방향과 목표는 정해졌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고, 역사는 완성될 것입니다. 분명 그런 날이 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그 시간과 때를 주님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역사의 방향은 정해졌지만, 그것을 이루는 때는 유동적입니다. 그것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는 때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믿음이 성숙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금방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훈련받아야하고, 더 성숙해야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성취를 뒤로 미루실 것입니다.
사실 성도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작정을 떠나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실망과 낭패가 따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과 정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속을 흐르는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기다림의 역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약을 주시고 즉시 이루기도 하시지만,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서 이루게 하셨습니다. 짧게는 며칠을, 길게는 몇 백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사야30장1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태아가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열 달을 엄마의 뱃속에
서 기다려야 합니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알곡
으로 성숙하기 위해 봄에 뿌려진 씨앗은 뜨거운 여름을 보내야만 합니다.
부모는 늦게 귀가하는 자녀를 기다리고,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는 제대하기를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항상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내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이로 인해 성도는 아무도 모르는 기쁨과 평안이 넘칩니다.
기다리는 신앙으로 복을 받고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성도 된 우리들도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당황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도우시는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귀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기도가 있는 한 낙심할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안 된다는 응답을 주시기도 하며 기다리라는 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모든 요구와 필요가 즉각적으로 응답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우리가 답답해할 정도로 천천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즉시 오셔서 고쳐주실 것을 당연히 믿고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나서야 도착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셔서 그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획하신 바로 그 때에 오셨을 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종종 우리가 당면한 어려운 상황 때문에 울다가 기진맥진해진 다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런가 하면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한 후에, 또는 사업의 어려움 때문에 속이 타 들어가는 경험을 한 후에 찾아오십니다.
그렇지만 나사로의 경우처럼 예수님은 결코 늦게 오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간에 맞춰 오셨는데 다만 그 시간표가 우리의 시간표와 달랐을 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게 시간과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항상 완벽하십니다.
삶이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위기를 벗어나 승리하는 지름길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 항상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할 때 부르짖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삶이 어려울 때 하는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르짖는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부르짖는 기도라 하면 언뜻 생각하기를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으로 연상합니다. 물론 틀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음’하면 항상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위한 간절함의 표현수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귀가 어두운 분으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응답을 위하여서 부르짖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예레미야 33장3절절의 “ 너는 내게 부르짖으나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 라는 말씀이나
산상보훈의 “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는 표현의 말씀을 앞 뒤 문맥은 무시한 채 구절 하나만을 기억하여 기도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부르짖음’은 회개의 요청입니다.
가슴을 찢는 일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향하는 태도요 표현입니다.
회개는 부르짖음이어야 합니다.
“ 내가 어찌할꼬 ! 왜 그랬던고 ” 하면서 가슴을 찢고 부르짖는 일입니다.
징벌이 온다면 그 징별은 필요한 징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볼 현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등 바벨론 멸망을 앞에 둔 시점의 의로운 선지자들은 멸망을 기정사실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면서 하나님앞에선 울고 부르짖으며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재앙이 혹 임할지 두려움 때문에만 꼭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울어야 하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들어야 하니까 우리의 귀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울어야 하니까 눈물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며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의 가슴을 찢어야 하기 때문에 참된 회개를 위해 부르짖음을 생각하고 가슴을 조여 짜내며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1절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이 말씀 속에는 다윗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아 부르짖는 모습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병행하여 묘사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때 가 되면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2.끌어 올리시고 견고하게 하십니다.(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가다리는 신앙에는 유익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충동을 참으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군이 되었습니다. 요셉도 억울한 고통을 당하였지만 충동을 통제하며 인내함으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국무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내일을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다리고 천국을 기다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희망을 키워 가기도 하고, 그 기다림 속에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기다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기다림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삭막하고, 허전하고, 무미건조합니다.
그러한 기다림이 때로는 간장을 태우듯 온 몸을 녹아 내리게 하고, 뜬눈으로 밤을 설치게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래도 기다리며 기대하며 산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편으로 기다림이란 신앙적으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기다림도 평안 할 때는 그것이 낭만이 될 수도 있고 견딜만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의 기다림, 절망 가운데서의 기다림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급합니다. 내 마음이, 내 상황이 용납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인 이란 기쁨 속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고난 중에서 더 더욱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너무나 황당한 경우를 만나게 되었을 때 “기가 막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이처럼 기가 막힐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다윗왕도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서 이렇게 기가 막힐 만큼 엄청난 고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수렁처럼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수렁 깊이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골리앗과 대적하여 설 때도, 장인이지만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더구나 사울은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입니다. 그러한 그가 시기심을 가지고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힘없는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죽이려 하는 왕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드디어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낮잠을 자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결국 그는 간음의 죄를 범하고 맙니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밧세바가 아이를 갖게 됩니다. 커져가는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다윗은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시금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침상이 젖을 만큼 크게 회개하고 회개해서 다윗은 겨우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도 이제 인생의 늘그막에 들어섰습니다. 자식들 다 키워놓고 편안히 쉴만한 노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생이 평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겁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이 암논을 죽입니다. 형제간의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다윗은 노년에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다리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십니다.
뿐 만 아니라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내 인생의 걸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태풍에도 넘어지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걸어 갈 수 있는 견고한 인생을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리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 까지 기다리면 우리를 끌어 올리시고 우리의 걸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기다리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합니다.(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다윗의 생애는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수많은 역경 중에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찬송을 입에 두고 살았습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마다 부르짖어 기도하며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셔서 자신을 건져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송케 하였다 며, 지난날 기도응답을 받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복되고 영광 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다윗은 거룩한 노래로, 영혼을 불태워 부르는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찬송은 힘이 있고 능력이 동반됩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 본문 3절의 교훈입니다.
사도행전16장25-28절에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방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거기에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옥 터가 흔들리더니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리며 온통 기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결박에서 완전히 풀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옥졸들이 그만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살하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찬양 중에 거하십니다. 찬양은 위대한 능력이 동반됩니다. 원수 마귀가 벌벌 떨며 떠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무엘상16장16절에 “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
악귀 들린 사울 왕을 위해 어린 다윗이 제금을 치며 찬양했더니 사울의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가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다윗은 수금에 맞추어서 입으로 노래도 불렀으며, 그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노래였다고 합니다. 다윗의 노래는 사울의 질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찬양은 흐트러지고 우울해졌던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쾌하게 하여 주는 자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엘리사는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자 하였을 때 찬양을 이용한 바가 있습니다(왕하 3:15).
어떤 사람은 음악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영향과 감화를 받는데, 사울이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음악은 악신에 대해 어떤 마법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은 그의 영혼을 진정시키며, 악마가 이용하는 동물적인 심령의 소란함을 가라앉힙니다. 태양의 광선은 칼로도 짜를 수 없고, 물로도 끌 수 없고, 바람으로도 불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덧 창문을 닫아 버리면 방 안에서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음악은 악마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작용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악마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릴 수는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가 된 조니 에릭슨이란 미국여성이 있습니다. 다이빙하다가 사고로 전신 마비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불평과 저주로 나날을 보내다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손가락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자입니다. 그러나 이 형편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녀를 만나주셨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입술만큼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니 에릭슨은 붓을 입으로 물고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런 시간들이 지나고 점차 완숙한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 지고 길렉터라는 볼펜 회사에서 광고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자기 회사 볼펜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는 사진을 광고하자는 것입니다. 그 청을 수락하면서 조니 에릭슨은 그림 밑에 들어가는 싸인만은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그림에 싸인을 합니다.
‘PTL’이라는 약자였습니다. 이것은 “Praise The Lord” 라는 말 “주님을 찬양하라” 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로 조니 에릭슨은 모든 글과 그림에 PTL을 적어 넣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힘주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고 주님을 전도하는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찬송의 힘은 대단합니다. 날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찬양이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야호와를 의지하게 하는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은 많은 응답을 받습니다.
1.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1)
2.끌어 올리시고 견고하게 하십니다.(2)
3.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야호와를 의지합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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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다리는 훈련 잘하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