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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넷째 주일)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삼상16:6~13; 엡5:8~14;요9:1~12,35~41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뭐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 66권 전체의 말씀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에 여러 장소에서 서로 다른 관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구약만 해도, 천여 년에 걸쳐서 기록된 책이구요, 여러 관점으로 말하자면, 남쪽 유다의 관점에서 북쪽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승리자의 관점에서 전쟁 포로민의 관점에서, 제사장의 관점에서 예언자의 관점에서,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개혁주의자의 관점에서, 부자의 관점에서 가난한 이의 관점에서, 지배자의 관점에서 일반 평민의 관점 등, 여러 관점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중심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이 전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약은 구약에 비해 짧은 시간, 약 50여년에 걸쳐 쓰여진 책이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집중되어 있어 비교적 중심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서신들(믿음)과 야고보서(행위)의 관점은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들이 의미하는 바는 성서학자들이 세밀하게 밝혀낼 일이고,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는, 그 모든 관점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문자를 넘어서 성경이 전하려는 그 중심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 중심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드리는 이 말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요?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소중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니, 이 말씀이 뜻하고 있는 깊은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저 머리로, 소위 “생각의 세계”에서 이 말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본다면, 우리는 “눈이 먼 것”입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이런 식입니다. 잠깐 뭉클하는 순간도 있겠지만, 동화 속 그들의 행복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나 영성가들은 그렇게 깨어나라고, 눈을 뜨라고 외쳤던 겁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걸인을 고쳐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9장 앞부분과 끝부분을 복음서 독서로 읽었지만, 오늘 말씀은 9장 전체입니다. 9장은 나면서부터 눈 먼 맹인을 고쳐주신 이적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이적의 결과를 접한 사람들(이웃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 유대사람들, 또 바리새파 사람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의아심, 의견분열, 당혹감, 분노를 보이고, 마침내 고침 받은 이를 정죄(출교)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예수님은 누가 진정 앞을 못 보는 눈 먼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오늘 이야기는 제자들의 이런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길을 지나다 구걸하고 있는 눈먼 사람을 보고는 제자들이 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는 당시 유대인들의 통념이 깔려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그러니까 1세기의 유대인들)은 질병이나 재난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지은 죄 때문에 이런 병이 걸리고, 이런 재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질병이나 재난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당사자의 죄에서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당시의 통념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자주 하는 일입니다. 어떤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왜 나에게 이런 재난이... 왜. 왜, 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의 죄 때문도, 그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 때문에”라는 원인을 주목한 것이 아니라, “~을 위해서”라는 그 질병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 한 사람을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한 사람의 곤경을 기회로 삼아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밖에 없는가?”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겠지요. 아마도 고통 받고 있는 당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결국은, 고통 받는 당사자는 이런 질문을 넘어서, 그 병이 가리키는 방향을 볼 때에야, 비로소 그 문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오늘 이 질문과 대답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생각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사실의 세계”를 보는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생각에 딱 달라붙어 자신과 생각 사이에 틈을 낼 수 없습니다. “생각이 세계”에서는 자꾸 원인을 찾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왜, 왜? 분석하고 이유를 찾고 그러다 투사할 대상을 찾지요. 그 대상이 미워하는 원수일수도 있고 “힘없는 어린자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은 모두 머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일이 하루이틀 걸리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의 세계”에서는, “왜?” 보다는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에 모아집니다. 이 일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어떤 길로 인도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서 실제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실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오늘 태생 맹인(이 사람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이 고침을 받은 것을 보고, 그 뒤에 이어지는 반응들을 보십시오. 먼저 이웃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구걸하던 그 사람이야? 맞아, 그런 것 같은데? 아냐, 다른 사람이야!” 자기들끼리 설왕설래합니다. 그러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고, 고침 받은 이가 “예수라는 사람이 이리저리 해서, 내가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묻지요. “그 사람은 어디에 있소?” 그러자 고침 받은 이는 “모르겠소.” 대답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적을 “세메이온”이라고 하지요. 세메이온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이적”이라는 겁니다. 그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알아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적을 무슨 “마법”처럼 생각하거나 반대로 “말도 안되는 얘기”로 치부해버리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적 이야기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고쳐주신 예수님이 현장에 계시지 않습니다. 마태나 마가의 다른 치유 기적 이야기를 보면, 기적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걸로 끝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정작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구도는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이 더 이상 육신으로 계시지 않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지요.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이 직접 행하시는 이적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순간순간, 보이지 않는 예수님,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보면서, 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있구나, 하나님 사랑에 감싸여 있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난다, 눈을 뜬다는 의미이고, “사실의 세계”를 산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이웃사람들의 반응 이외에, 바리새파 사람들의 반응, 유대 사람들의 반응, 또 다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은 그야말로 생각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표상입니다.
사람들이 고침 받은 사람을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을 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소경이 눈을 떴다는데 대해 분개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앞을 보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은 안중에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자기 생각 속에 갇힌 사람의 전형적인 말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자기 식대로 보는 것에 대해서, 앤소니 드 멜로가 전해주는 이야기 있지요? “헨리, 너 엄청나게 변했구나, 전엔 키가 퍽 컸는데, 무척 작아졌네, 몸도 매우 건강했는데, 아주 약해졌고, 표정도 전엔 밝았었는데, 좀 어두워졌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러니 상대가 말합니다. “난 헨리가 아냐, 난 존이야.” “아니, 너 그새 이름도 바꿨구나.”
이런 사람을 어떻게 제대로 보게 하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결정해 버리고 정죄해 버리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도 제일 무서운 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리새파 사람의 이야기이기만 합니까? 우리도 얼마나 우리의 생각대로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지, 우리도 얼마나 우리의 생각대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허물었다 하는지...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예의와 법도의 이름으로! 그래서 토머스 머튼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론상 가장 좋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규범으로 강요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좋은 것이 될 여지조차 없다.” 그러면서 좀더 강하게 말을 하지요. “규범으로 강요된 가장 좋은 것은 악이 된다.” 신앙은 규범이 아닙니다. 신앙은 생명이고 삶입니다. 삶은 규범이 아닙니다. 삶은 살아있는 생명이고, 지금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그 다음을 봅시다, 유대 사람들은 급기야 그 부모를 불러다가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이들도 역시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앞을 보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치 않는 말이 나올 때, 이들을 올가미에 옭아맬 생각 밖에 없습니다. 이에 비해 배운 것 없는 부모의 대답은 두려움에서 나온 말이기는 했으나 분명했습니다. “그 아이가 우리 아들이고,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맞는데, 어떻게 눈을 떴는지는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다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재차 두 번째로 눈멀었던 사람을 불러 하는 말이 나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고집불통에 자기모순, 자기 분열에 빠집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죄인을 시켜 당신의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런 자기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들의 안식일”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거룩하게 지킨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신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생각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이 예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대부분 이런 생각의 세계에 머물러 살아갑니다. 내가 이미 설정한 세계가 있고, 내가 이미 설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설정한 이상적인 내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설정한 친구가 있고, 내가 이미 설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은 그것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그럴 때만 나는 괜찮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어디 삶이 그런가요? 그런데도 우리는 주구장창 내 생각을 고집합니다. 그러니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유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고침을 받은 사람은,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의 삶을 열게 되고, 마침내 믿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사람이 차례로 한 말을 보십시오. “예수라는 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눈을 뜨기 위해서는 내 눈에 칠해진 진흙을 씻어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로 나가려면, 동일시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붙잡고 있던 것들을 모두 흔들어 봐야 합니다. 심지어 내가 딛고 있던 땅의 흙까지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성장과정이란 바로 내가 붙잡고 있던 것들을 가게 놓아두는 과정입니다. 심지어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조차 가게 놓아두어야 비로소 온전한 신앙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생각에서 떨어질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옵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지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지요.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소리 없이 울리면,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압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압니다.
여러분, 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 눈을 뜨는 과정, 생각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오랜 시간을 걸쳐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이 떨어지는 과정을 지날 것입니다. 상담의 도움도 받고, 믿을만한 사람들의 조언도 들으면서, 조금씩 내 생각에서 떨어지는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거쳐야 할 연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올라올 때, 수없이 만리장성을 짓고 허물고 있을 때,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고 있을 때, 원망과 불평이 올라올 때, 자신에 대해서 계속 평가하고 있을 때, 근심과 걱정에 휩싸일 때, 단순히 말씀 한 줄을 붙잡고 그 말씀을 되뇌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생각의 세계에서 하나의 진실한 세계로 옮겨가는 좋은 수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수많은 생각에서 단 하나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 말씀에 머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짧은 행위 안에 우리 삶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많은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한 줄 말씀을 붙잡을 수 있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여러분이 전에는 눈먼 소경이었으나 이제는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눈을 뜬 사람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눈을 뜬 사람은 진정 모든 선과 의와 진실을 압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가 생각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사실의 세계로 옮겨가게 하옵소서. 우리가 눈을 뜨게 하시고, 깨어남으로 이 세계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감싸여 있음을 직접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