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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4;11-13. 새롭게 전개된 2024년 가운데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2024. 1. 14.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빛이로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에도 모든 사람에게 빛이었습니다. 고통의 어두움이 떠났고 아픔과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죽음의 tunnel도 초월했습니다. 나사로와 나인성 홀로 사는 여인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능력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무엇을 말씀 하셨나요?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무슨 말씀입니까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고 권면이고 당부이고 주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빛은 능력이고 소금은 세상에 대한 의무이지만 맛이고 부패를 막는 아름다움입니다. 너희도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입니다. 전에는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빛으로써 우리에게 빛으로서의 능력을 주셨고 소금으로서의 감당할 은혜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2024년의 365일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없음에 낙심하고 안 풀림에 조바심을 내고 홀로 서야하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으로 능력을 덧입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겨내시고, 예수 이름의 권세로 어두움과 두려움과 고통과 낙심과 고독을 물리치시고, 기도가운데 계획하고 소망한 기도의 제목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셔야 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은 악한 사탄 마귀도 떠나고 질병도 떠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면 우리도 세상의 빛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의 소금이시면 우리도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 위임된 빛으로서의 능력과 소금으로서의 드러남이 마5;3-10의 팔복이 나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2024년에 위대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탈무드에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여섯 개의 소용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중에서 셋은 자신이 지배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셋은 자신의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전자(前者)는 눈과 귀와 코이고, 후자(後者)는 입과 손과 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없고,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을 수도 없습니다. 맡고 싶은 냄새만 선정해서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에 따라 좋은 말만 할 수 있고 손과 발을 이용하여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것을 갈 수가 있습니다. 누가 그럽니다. 과거(過去)는 믿음의 해석(解釋)에 따라 바뀌고, 미래(未來)는 믿음의 결정(決定)에 따라 결과가 만들어지고 현재(現在)는 믿음에 의한 행동에 따라 바뀌어 집니다. 그런데 바꾸지 않기로 고집을 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목표(目標)를 잃는 것 보다 기준(基準)을 잃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 방황을 합니까? 목표와 함께 기준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누구와 경주를 하고 있습니까? 누구와 경주를 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고가르덴(F. Gogarten)은 인생은 네 개의 전치사(of, for, with, by)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누구에 의한 of의 삶입니다. of의 삶은 주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둘째는 무엇을 위하여 for의 삶입니다. for는 삶의 목적에 대한 문제입니다. 셋째는 누구와 함께, 동행 with 하느냐 입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무엇에 의하여 by의 삶입니다. by의 삶은 방법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네 개의 전치사를 동반한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고,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삶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척도가 됩니다. 여러분,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다 보면 길을 잃기가 쉽습니다. 호도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대상을 알지 못한 채 달리기를 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생명을 걸면서 경주를 하고, 달리다가 보니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살피는 여유조차 없습니다. 고장 난 네비게이션과 거짓의 정보를 믿고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던 길을 잡시 멈추고 대상이 누구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물질과 권력을 위한 동행이 아니라 동행해야 될 사람과 경주를 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고독하고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무겁기도 합니다. 상황과 여건이 초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진짜인가? 아닌가? 부담이 됩니다. 일상의 삶이 그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확실성의 상황이 무엇일까요? 고전 7;35.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익 때문입니다. 그 유익은 이치에 합당하게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흐트러짐이 없는 헬라어는 ἀπερισπάστως아베리스파스토스는 씨앗을 주변에 다 휘날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이해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집중하여 목표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현재 놓여있는 난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나갈 수 있는가? 입니다. 갈렙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유다지파사람입니다.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출애굽 후 유다 지파의 지도자가 됩니다.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각 지파의 대표들을 정탐꾼으로 세웠을 때에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정탐에 나셨습니다. 민13: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곧 그들 가운데서 치리 자를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내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더라. 뽑힌 12명은 40일 동안 정탐을 했습니다. 가나안 정탐을 마친 후, 결과를 모세와 백성들 앞에서 보고를 하는데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켜 이르되, 우리가 당장 올라가서 그 땅을 소유하자. 우리가 능히 그것을 이기리라, 10명의 지도자도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의 환경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가나안 백성은 강하고,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기에 거인인 아낙 족속이 있고, 그들을 보니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약속의 말씀도 없었고, 거인들과 거대한 높은 성벽만 보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적인 보고를 듣고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고 하나님과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가 이집트에서 죽었으면 좋았으리라,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으리라, 다 죽기 전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도자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믿음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가운데 2024년에 만나는 장애물들 앞에서 힘들지만, 부정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4가지 전치사의 삶을 살아가는 갈렙은 절제를 하면서 신앙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면 갈렙은 어떤 사람이냐? 출애굽 당시 유다 지파의 지도자이었고 12명의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았고,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입니다. 출애굽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을 어떻게 성취해 가시는지를 알았습니다. 누구에 의하여 of와 누구를 위하여 for와 누구와 동행을 하는 with와 누구에 의한 by의 삶을 살아가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오늘 본문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지역을 자신에게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합니다. 그 땅은 자신이 45년 전 정탐한 곳입니다. 수14:6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던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나스 족속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주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말씀하신 일을 당신이 아십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45년 전, 모세가 자신과 여호수아에게 말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여리고 성의 진입은 갈렙과 여호수아가 진두지휘한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 때나 이제나 4개의 전치사의 삶으로 여호수아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때나 지금이나, 이전과 오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45년 전과 현재의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1. 갈렙은 누구에 의하여 of의 삶이 만들어지는 줄을 알았습니다. 빛의 능력과 소금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 이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갈렙에 대하여 민13:24 오직 내 종 갈렙은 다른 영을 지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데려가리니 그의 씨가 그 땅을 소유하리라. 하나님은 갈렙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어는 모세에게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는데, 갈렙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갈렙이 인정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45년 전 그때를 기억하며 온전히 하나님을 따랐다고 고백합니다. 수14: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올라간 내 형제들은 백성의 마음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온전히 주 내 하나님을 따랐으므로. 여러분, 초 불확실성 시대에 똑같은 것을 보아도 육신의 눈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이렇게 다릅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가질 때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대한 장애물이 있어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한숨이 나오고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강한 믿음이 그 장애물과 그 난관을 뛰어 넘게 합니다. 왜냐 하면 큰 장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갈렙의 삶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는 갈렙에게 그들과 다른 영을 지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좁게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이고 넓게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따른 것이 아니라 불신과 의심의 영을 따랐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두 가지 영적인 소리를 듣습니다. 성령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느냐? 결정은 믿음의 분량과 영적인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10;27,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양은 내 소리를 아는 것처럼 갈렙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들었습니다. 음성을 알고 들어야 온전히 따를 수 있지요.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45년 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고 말했습니다. 민13:24 오직 내 종 갈렙은 다른 영을 지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데려가리니 그의 씨가 그 땅을 소유하리라. 갈렙의 삶의 주체는 하나님이었고 주님에 의해서 비전과 소망이 만들어 졌습니다.
2. 무엇을 위하여 for의 삶입니다. 삶의 목적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목적 앞에 항상 장애물이 있고 가로 막는 것이 있고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 갈렙이 45년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2-1. 그것은 자신의 나이였습니다. 수14:10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살아남게 하셨나이다. 이제 보소서 이 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자신의 나이가 85세이지만, 그는 자신의 나이를 뛰어 넘었습니다. 가장 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라는 장애물을 미리 걷어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약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약해지는 이유는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갈수록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합니다. 실제로 약해집니다. 그러나 갈렙은 자신의 85세라는 나이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표현으로 여호수아에게 호소합니다. 수14:11 모세가 나를 보낸 날과 마찬가지로 이 날 내가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여 내가 싸우기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 대단한 믿음과 정신과 용기입니다.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40세와 85세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45년 전이나 똑같고 그래서 나가 싸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난관 앞에 섰을 때, 나이가 젊다고 작아 보이고 나이가 많다고 커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은 갈렙이 자신의 나이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 때문에 나이를 잊고 있었습니다. 난관과 불가능을 만나면 사람이 느끼는 것은 청년이나 노인이나 똑같습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젊은이나 노인이나 같습니다. 인생의 장애물은 언제나 낙심케 하고 좌절케 만듭니다. 그러면 갈렙이 장애물 앞에서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고 한 이 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나이가 85세지만, 그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히 따랐던 것처럼 지금도 그때와 같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45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꾼으로 갔을 때와 지금이 동일하게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는 날로 약해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 가지입니다. 고후4:16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도다. 그렇습니다. 갈렙은 변함없이 자신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늘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나이라는 자신의 최대의 장애물이 있었지만, 영적으로나 믿음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건 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의 난관 앞에 작아지지는 않습니까? 낙심해서 좌절한 적은 없습니까? 인생의 삶 가운데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장애물이 아니라 내 자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능가하는 장애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십니다. 빛이고 소금입니다. 시28:7 주는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그분을 신뢰하여 내가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가 내 노래로 그분을 찬양하리로다. 갈렙은 이런 믿음으로 85세라는 자신의 내적인 장애물을 뛰어 넘었습니다. 나의 힘이시고 방패가 되시기 때문에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시는 빛의 능력으로 동일하게 전쟁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휘몰아치고 있는 초불확실성도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뱅패가 되신다는 믿음으로 2024년에 놓여있는 난관들을 뛰어 넘는 그래서 for 의 삶을 확실하게 만들어 가시는 그래서 세상 속에서 능력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외적인 장애물입니다. 갈렙이 45년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남쪽 지역은 산과 거인인 아낙 족속이 살고 있었고, 그 도시들은 견고한 성벽으로 쌓여있었습니다. 여건과 조건과 환경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이것을 함락시킨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당당하게 요구를 합니다. 수14:12 그러므로 이제 그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산을 내게 주소서. 거기에 아낙 족속이 있었으며 그 도시들이 크고 성벽으로 둘려 쌓인 것을 당신도 그 날 들으셨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능히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여러분, 2024년, 나에게 내적인 장애물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이 산을 내게 주소서, 이 산은 헤브론입니다. 기럇 아르바라고 하는데, 이 기럇 아르바는 아주 크고 견고한 4개의 요새로 구성된 거대한 도시국가입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기럇 아르바는 산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 평지에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불리한 구조입니다. 산 높은 곳에 도시가 있기 때문에 함락시키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거기에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평균 키가 240이상 270정도 입니다. 그래서 45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들은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갈렙이 넘어서야 할 헤브론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눈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내가 능히 그들을 쫓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 위에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인들이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을 취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요?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24년, 우리 앞에 있는 여러 난관들은 결국 하나님과 그 말씀을 내가 얼마나 신뢰하고 믿느냐가 핵심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이 얼마나 어렵고 쉬우냐가 아닙니다. 초 불확실성 때문에 마음속에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러나 당황하지 말고 능력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믿음의 눈이 없다면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for의 인생은 없어집니다. 우리가 2024년을 살아가는 동안 내적인 장애물과 외적인 장애물 때문에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내적인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고 외적인 장애물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물 앞에서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갈렙과 같이 담대하게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울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가운데 믿음 위에 굳게 서서 2024년의 난관을 지혜롭게 이겨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누구와 함께하고 누구와 동행하는 with 입니다. 갈렙은 본능과 시각과 지각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고 여호수아와 동행, with를 했습니다. 14장의 상황이 어떤가? 14장부터는 가나안 땅 정복을 다 끝내고 각 지파별로 땅을 기업으로 얻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이후에 중부, 남부 그리고 북부 이런 순서로 이어집니다. 그 땅을 기업으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에 따라서 그 땅을 차지하는데 여기에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각 지파별로 제비를 뽑아 땅을 얻기는 쉽지만, 그 땅에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자기의 소유를 쉽게 포기합니까? 각 지역에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나안 원주민들은 좋은 옥토에서 옮겨 다니면서 골짜기와 산꼭대기 등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 된 것으로 알고 그들과 함께 살아갔는데 나중에 완전한 약속의 성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 지파 중에 어느 지파가 가장 먼저 이 일에 나설 것인가? 자문합니다. 왜냐하면 시작이 중요하잖아요. 한 지파가 영적으로 일어서면 다른 지파들도 따라 갈 텐데 이 까다롭고 어려운 일에 누가 나섭니까? 유다지파의 갈렙 입니다. 그러면 왜 유다지파의 갈렙이 맨 먼저 일어납니까?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3-1. 무엇에 여호수아와 동행을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동행합니다. 갈렙은 처음의 약속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삶에 묻어 있습니다. 6절에 열두 지파가 자기 땅 자기 기업을 얻는 시점인데 그냥 얻는 것이 아니고 그 땅에 남은 가나안 백성들을 쫒아내고 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갈 것인가?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때 유다지파가 여호수아에게 왔습니다. 왜 유다지파가 가장 먼저 나왔는가? 그 유다지파 중에 한 사람 갈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지파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영적으로 도전정신이 가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일어서려면 그 공동체의 모든 분들이 다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몇 사람,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도전에 대하여 결단을 하면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공동체가 일어납니다. 왜 갈렙이 자기 유다지파를 이끌고 여호수아 앞에 왔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40년 지기 친구인데 여호수아에게 요청합니다. 7절, 여호수아, 내가 마흔 살이었을 때에 가데스 바네아 기억하지? 여호수아 자네와 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기억하지? 가데스 바네아는 모세가 열두 정탐군을 가나안 땅에 보냈던 땅입니다. 그 곳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희 두 사람은 40년 광야생활 한 이후에, 약속의 땅을 밟게 될 것이다! 왜 그래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은 사람들의 믿음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수14;9, 민 14:24절에 오직 내 종 갈렙은 그들과 마음이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좆았으므로!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 약속을 받고 뒤로 물러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을 받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신1:36,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으니 그가 발로 밟은 땅을 내가 그에게 주리라 그래요. 그런데 10절을 보면, 그 약속을 받은 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45년이 지났어요. 광야생활 40년과 가나안 정복이후 5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45년이 흘렀어요. 그러나 갈렙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 하나가 하나님의 약속은 45년이 흘렀다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중도 폐기 되는 것이 없고, 약속은 피어리드가 없어요, 끝이 없고 성취가 휘니쉬이고, 거기서 또 다른 일을 위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용카드 한 장씩은 다 있지요. 카드에는 유효일자가 중요한데 유효일자가 언제까지인가? 약속을 들은 지 4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45년이 지난 것이 갈렙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천년이 지나도 유효합니다. 천지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 붙들고 헤브론 산간지역으로 올라갔습니다. 믿음의 도전을 누가 하는가? 믿음의 도약을 누가 하는가? 약속이 내 속에 생생한 사람입니다. 시각과 지각이 도전과 도약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의 도약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믿음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뛰어오를 것인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본인이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해볼 것인가? 본인이 결정을 합니다. 해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해보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생생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 믿음의 도전을 합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도약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능하지만 또 누구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면 다 도약이 가능한가?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은 도약이 불가능하고, 시큰둥한 사람은 도약이 막힙니다. 어떻게 믿음의 도전을 했는지를 따라해야 합니다. 따라 하는 것이 도약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으로 결단하고 얼마쯤 해보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점점 나에게 생생해지는 확신이 됩니다. 여러분, 예배의 도약을 위하여 한 주간 내내 기도하고 결단하고 와보십시오. 설교자와 대표 기도자와 찬양인도자와 예배드리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성령의 임재로 가득한 예배가 되기를 한 주간 준비하고 와보세요.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 말씀을 읽고 기대해보세요. 달라요. 약속이 생생하고 축복이 눈앞에 들어옵니다. 신1;38, 네 앞에 서있는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 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런데 이런 일에 갈렙은 여호수아와 동행을 합니다.
3-2>. 갈렙은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with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헤브론을 차지합니다.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유다지파를 살려 냅니다. 여호수아가 기뻐합니다. 영적 선봉장으로서의 도전을 매우 기쁘게 받아드리고 과연 내 친구 갈렙이구나! 여호수아가 갈렙을 축복합니다. 여호수아가 기쁜 것은 무엇이냐? 갈렙이 이렇게 도약하고 나감으로써 이제 각 지파가 자기 땅을 얻으려고 도전을 해야 하는 싯점인데 내 친구 내 동지, 갈렙이 가장 먼저 영적 선봉장으로 나서준 것입니다. 믿음의 용기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음의 도약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만, 내가 도약을 하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치고 올라갑니다. 반드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내 도약의 모습을 보고 영적 사기가 차오릅니다. 갈렙은 험한 산지 헤브론을 정복하였고 그 자손들에게 기업을 물려줍니다. with를 하느냐 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악조건 속에서, 절망 속에서 새로운 도전과 소망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다 포기할 때 의연히 일어선 사람, 이젠 죽었다고 통곡할 때, 아니라고 소리쳤던 사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배짱이 있어서 그럽니까? 무슨 별난 전법이라도 있습니까? 두렵고 떨리는 것은 그 두 사람도 매한가지입니다.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인데, 하나님이 인도해 들이시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외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with,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4. 무엇에 의하여 by의 삶입니다. 방법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갈렙의 삶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얼마나 당당한 선언입니까? 악조건을 내게 주소서. 불리한 조건을 내게 주소서. 어려운 일을 내게 주소서. 고난의 멍에를 내게 주소서. 싫어하는 일을 내게 주소서. 십자가를 내게 주소서. 산지를 내게 달라는 갈렙의 요청 속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산지를 주십시오. 거기 들어가서 아낙 자손과 싸워서 내쫓고 일구고 가꾸어 성을 세우겠습니다. 85세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과 용기와 결단입니다. 어떻습니까? 2024년이 평안한 시대입니까? 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정치의 혼란과 경제의 침체와 불황과 사회의 변동과 불확실성으로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별다른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에 대한 그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둔 이스라엘의 불안과도 같은 불안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풍성함과 평안이 우리 앞에 있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도 산지를 주십시오. 인생의 가파른 산지를 주십시오. 싸워서 이기겠습니다. 주님, 저는 패배도, 절망도 겁나지 않습니다. 헤브론 산지일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정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롭게 전개된 2024년 가운데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전이나 이제나. 그런 믿음의 by의 삶이 되시는 그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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