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시편 23(22),1-2)
교회는 오늘 동방 교회의 첫 번째 성인이자 일치와 개혁의 사도,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1508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 블로디미르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성인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인이 되기를 준비하였으나 돈을 버는 일보다는 영혼을 탐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이 있던 성인은 성 바실리오회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고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뛰어난 설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며 러시아 교회의 개혁에 힘씁니다. 그러던 중, 로마교회와 반목하던 러시아 교회의 일부 분리파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후에 성인은 동방교회의 첫 번째 성인으로 ‘일치의 사도’라고 불리며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됩니다.
이 같은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종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한 집안에 종으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주인의 집으로 돌아와서도 쉬지 못하고 마땅히 주인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며 주인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 함이 당연하듯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모든 일을 다 수행하고 하느님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뿐인 우리의 처지를 복음의 예수님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듣기에 오늘의 이 복음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처지를 굉장히 낮게 상정함으로서 우리의 인간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현대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를 종으로 상정하고 힘들게 일하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종이 쉬지도 못한 채 주인의 식사를 챙겨주고 그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복음의 내용이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약간은 거리감이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저 단순한 주인과 종의 노예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곧 그 분과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당시 일반적으로 여겨지던 사회적 신분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 이면에는 당시의 주인과 종 사이의 신뢰관계, 곧 그들 사이의 믿음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에게 전적인 신뢰를 갖으며 자신의 주인을 삶의 주인으로 여기며 주인에게 모든 충성을 다 바칩니다. 이에 주인은 자신의 종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며 주인과 종 사이에 삶의 신뢰가 형성되게 됩니다. 바로 이 신뢰의 관계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과 주인 사이의 이 같은 신뢰와 믿음의 관계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종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바칠 수 있는 믿음의 관계, 또한 주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종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그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오늘 독서의 말씀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이번 주간 계속되는 독서의 말씀인 티토서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티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인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여러 규칙과 삶의 태도 등을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젊은이들까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일러준 바오로 사도는 그에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3)
바오로 사도가 구구 절절히 언급하는 것과 같이 나이 많은 이들이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하는 것과 젊은이 역시 신중하게 행동하며 모든 면에서 나이 많은 이들이 보이는 선행을 본받으며 그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렇게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 당연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나이 든 사람이 나이 값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젊은이들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젊은 혈기에 치기어린 행동을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생겨날 때마다 도대체 이 모든 당연함이 당연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스스로 되물을 때가 많은 우리들에게 오늘 독서의 말씀은 그 해답을 제공해 줍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며 그 은총이 우리를 올바로 교육해 주며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벗어버리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주는 비결입니다. 그 하느님의 은총을 따라 사는 삶, 그 삶이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는 종과 주인의 신뢰관계를 가능케 하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되어줍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복음 환호송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누구든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주인의 말로 여기고 그 말씀을 지킵니다. 그 말씀이 비록 현재의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주신 그 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며 나를 지켜주시는 사랑의 주인이며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불사의 희망을 준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분은 우리가 믿는바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이 주시는 불사의 희망으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분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요한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