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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
너무 많은 언니, 오빠들
젊은 남자 손님이 나이 든 식당 여종업원을 향해 ‘이모’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는 않지만 아주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이 든 남자 손님이 젊은 여자 종업원을 향해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거니와 아주 많이 이상해 보인다. 젊은 여성들이 남자 친구를 오빠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제 관용어가 된 듯하지만, 그 여성의 친구들까지 그 남자(그러니까 자기 친구의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이모나 언니나 오빠는 매우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 쓰이는 호칭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모가 아닌 사람을 이모라고 부르고 언니나 오빠가 아닌 사람을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렇게 호칭하는 것은 모든 관계의 사람들을 가족화, 내지는 친척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여긴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바람직하긴 한 것일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대방을 어떻게 부를까 하는 것은 은근히 신경 쓰이는 문제다. 호칭에는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 사이의 사회적, 정서적 관계가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가장 포괄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출돼 있기 때문이다. 친소관계는 물론 나이와 직위, 성별, 서열, 호감의 정도까지 다양하고 미묘한, 더러는 주관적인 정보들이 반영되는 것이 호칭이다.
어떤 사람은 만나자마자 형이라고 불러 친근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몇 년을 만나도 깍듯이 누구누구 씨나 누구누구 선생님이라고 불러 예의를 차린다. ‘형’은 친근감을, ‘씨’나 ‘선생님’은 예의를 지시한다고 말해 버렸는데, 사실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형’이라고 부른다고 다 친근한 것은 아니고 ‘씨’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쓴다고 해서 다 깍듯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표면상으로는 어쨌든 ‘형’이라고 부르면 친근감이 느껴지고 ‘씨’나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예의가 전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호칭을 선택할 때, 그것이 비록 무의식적이라고 하더라도, 친근감을 전하려는 의도나 예의를 표시하려는 의도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이라는 호칭에는 친근감이 아니라 친근감을 전하려는 발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는 셈이다. 물론 각자의 기질이나 자라난 환경에 따라 선호하거나 기피하는 호칭이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호칭에 상대방을 향한 발화자의 무의식적인 욕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가족 호칭의 일반화에 어떤 동기들이 작용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자기 남편을 ‘우리 오빠’라고 호칭하는 한국 여자를 서양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오빠와 결혼했다는 소리로 알고 경악할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가족화 하려고 하는 걸까. 가족으로 만들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을 가족으로 묶어둠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안도감과 이득이 유독 형이나 언니, 오빠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가족화 호칭을 통해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효과로 엉기기와 누르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족은 모든 것이 용납되는 관계라는 관념이 우리에게는 있다. 가족은 논리와 계산이 아니라 감정과 핏줄이 지배하는 곳이다. 응석부리고 떼쓰고 엉겨 붙어도 되는, 혹은 어떤 점에서는 그래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지 않으면 가족 같지 않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사회의 문제를 응석부리고 떼쓰고 엉겨 붙어서 해결하려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리가 남이가’식으로 사회 문제를 형, 삼촌, 언니, 오빠를 내세워 얼렁뚱땅 해결하려는 경향에 꽤 관대하다. 원칙과 논리가 사라진 자리에 혈연과 지연을 비롯해 온갖 연을 앞세운 뒷거래가 성행한다.
조폭 집단의 ‘형님’ 문화를 떠올리면 가족화 호칭의 다른 효과인 누르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족은 모든 것이 용납되는 관계라는 관념은 응석부리고 떼쓰고 엉겨 붙게 할 뿐 아니라 심리적, 언어적, 물리적 폭력에 대해 상당히 느슨한 경계심을 갖게 한다.
아버지는 때릴 수 있고 형은 야단칠 수 있다. 왜? 아버지고 형이니까. 아버지로 불리고 형으로 불리니까. ‘내 자식처럼 가르치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학원에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어느 중학생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가족화 호칭 선호 현상이 그 지점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데이트 폭력의 문제는 오빠와 여동생(으로 불리는) 사이의 문제가 아닌가.
지난 달 북경에서 열린 동아시아문학포럼에서 중국의 문학평론가인 리징저가 발표한 원고를 읽어보니 자본주의와 상업주의가 빠르게 퍼져나가는 중국에서도 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 모양이다. 중국 전자 상거래 사이트에서는 판매자가 고객을 ‘친(親)’이라고 칭한다고 하는데 십 수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호칭은 제일 친한 사람, 예컨대 연인이나 부모자식 사이에서만 사용가능한 어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장의 한국어 통역자는 이 ‘親’을 ‘자기’라고 통역했다. 요즘은 세무서가 납세자에게 그럴 뿐 아니라 심지어 경찰이 탈주범을 향해 ‘親’이라고 칭하는 등 남용되고 있는 사례를 열거했다. 리징저의 해석이 흥미롭다.
“우리가 가정 관계, 사적 관계에서만 쓸 수 있는 호칭을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사용할 때, 비록 그 목적은 ‘교제 원가’를 절감하기 위한 것일 수 있겠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사회관계의 취약함과 공공적 교제의 규범화, 안정화가 결여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교제 원가 절감을 위해 사회관계의 규범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이승우의 어떤 생각]
이야기 셋
① 바빌로니아의 왕은 자기 나라의 건축가들과 마술사들을 동원하여 미로를 만든다. 누구나 그곳에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교묘하고 복잡한 완벽한 미로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어느 날 그 왕궁에 아랍의 한 왕이 찾아온다. 바빌로니아 왕은 자기의 손님인 아랍 왕을 그 미로에 들어가게 한다. 아랍 왕은 모멸감과 혼돈 속에서 방황하다가, 신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빠져나온다.
아랍 왕은 바빌로니아 왕에게 자기 나라에도 다른 형태이지만 미로가 있다고, 기회가 되면 그것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바빌로니아 왕국을 침공해 성을 무너뜨리고 왕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는 바빌로니아 왕을 자기 나라의 미로인 사막으로 데려갔다. 사흘을 걸은 다음 아랍 왕은 바빌로니아 왕에게 말한다.
“바빌로니아에서 당신은 나로 하여금 수많은 계단들과 문들과 벽들로 된 미로 속에서 길을 잃도록 만들었소. 이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계단도 문도 복도도 벽들도 없는 나의 미로를 보여줄 기회를 부여하였소.”
그런 다음 그는 바빌로니아 왕의 포승을 풀어주고 사막 한가운데 남겨두었다. 바빌로니아 왕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짧은 단편 <두 왕과 두 개의 미로>의 내용이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만들어진 미로보다 만들어지지 않은, 본래 있는, 자연의 미로가 더 복잡하고 교묘하다. 사람이 만든 어떤 가상의 세계보다 현실의 세계가 더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다. 어떤 픽션도 현실을 능가할 수 없다. 현실이 가장 비현실적이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도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현실 세상에서 일어난다. 뉴스가 소설을 압도한다. 아무리 기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심심하다. 소설을 읽을 수 없다.
② 산그늘 덤불 속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나무꾼. 몇 명의 목격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 승려는 죽은 남자가 여자를 말에 태우고 가는 걸 보았다고 말한다. 다조마루라는 도둑을 붙잡은 이는 죽은 남자가 가지고 있던 화살을 근거로 도둑이 그 남자를 죽였을 거라고 증언한다. 여자도 그 도둑이 해치웠을 거라고 추측한다.
도둑인 다조마루는 자기가 남자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자는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자를 차지할 마음을 품고 남자를 숲으로 유인해 사내의 목숨을 끊지 않고 여자를 손에 넣었으며 그때까지도 남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자가 두 사람 중에 누구든 죽어야 한다고, 자기는 누구든 살아남은 사내를 따르겠다고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를 풀어주고 맞대결을 벌였다고, 스물세 합 째에 그 사내의 가슴을 찔렀다고, 그런데 결투가 끝나고 돌아보니 여자가 온데간데없었다고 말한다.
여자는 자기가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도둑이 자기를 욕보이는 장면을 남편이 묶인 채 멸시하는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고, 자기는 남편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였기 때문에 죽어야 했다고, 그 전에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자기도 죽으려고 했는데 그럴 기력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말한다.
죽은 남자는 무녀의 입을 빌려 다르게 말한다. 도둑이 아내를 욕보이고는 자기의 아내가 되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때 아내가 어디든 데려가 달라고, 남편인 자기를 죽여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도둑이 자기에게 저 여자를 죽여줄까 하고 물었다고, 자기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내가 도망가자 도둑이 밧줄을 끊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아내가 떨어뜨리고 간 단도를 집어 자기 가슴을 찔렀다고 말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속>의 내용이다. 남자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들의 진술이 추가될 때마다 진실이 흐릿해진다. 죽은 사람은 있지만, 누가 죽였는지 오리무중이 된다. 말이 더해질수록 진실이 달아난다. 진실을 덮기 위해 말들을 쌓는 일도 일어난다. 증언이 쌓이면서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③ 공부를 많이 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 연구원들, 박사들, 대학의 교수들, 사법고시·행정고시·외무고시에 패스하거나 여러 고시에 동시 합격한 수재들, 신문사와 방송국에 근무하는 언론인들, 그리고 또 유능하고 바르고 자격을 갖춘 선량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 곁에 있었고, 대통령은 그들의 능력을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많은 유능하고 바르고 자격을 갖춘 선량한 이들을 가까이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유능하지도 바르지도 자격을 갖추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사람들만을 불러 나라를 다스렸다. 유능하지도 바르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그들은 나라를 자기들의 텃밭으로 만들었다.
대통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대통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데, 대통령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고, 말하더라도 다르게 말할 것이고, 유능하지도 바르지도 않은 이들이 무슨 말인가 할 테지만, 그들 역시 다른 말을 하거나 여러 가지 말을 할 것이므로, 국민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유능하고 바른 건축가와 학자들을 거느린 바빌로니아의 왕이 아니라 그저 사막을 가진 아랍의 왕이 승리한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치욕과 모멸감과 울화와 슬픔 가운데서 술을 마실 것이다.
이승우 작가 195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장편소설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낮의 시선>, <지상의 노래> 등을 발표했다.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 LUXMEN. 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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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