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남한한성 순교성지
한옥 모양 성당에 칼 쓴 십자가 예수상 독특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요충지였으며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1595년(선조 28년)에 현재와 같은 성곽이 축조되었고 1621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은 뒤 1626년(인조 4년)에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었다.
이처럼 광주 유수의 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박해 때마다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치명터'가 되었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81)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이곳에서 첫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이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순교정신을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04년 순교자 성월에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자락에 우뚝솟아 이곳이 성지임을 알려주는 남한산성 순교성지 순교자 현양비문의 내용이다.
우후죽순 생겨난 음식점들에 묻혀 성지 성당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나마 현양비 덕에 이 지역 일대가 천주교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내놓았던 곳임을 알려준다.
"아직도 사람들이 남한산성이 순교성지이고 또 성당이 있는 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분들은 남한산성에 바람쐬러 놀러왔다가 순교자 현양비를 보고 그제서야 이곳이 성지인 걸 알고 성당에 들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지전담 박경민 신부는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이고 그린벨트 지역이다보니 성지를 더 개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며 순례 오는 이들이 쉽게 찾을 수 있고 또 누구에게나 눈에 띌 수 있도록 개발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래도 장점은 있다. 녹음으로 우거진 성지성당 주변은 자연과 함께 살아 숨쉬며 인공미를 가미하지 않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당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대형 십자가가 있는 야외미사터가 나온다.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인 야외미사터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돼 있다.
묵주를 들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순례객들이 눈에 띄었다. 깨끗한 산내음을 들이키며 순교성인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다보면 몸과 마음이 온전히 정화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한옥 모양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엔 독특한 십자가가 눈에 띈다. 두팔을 벌리고 있는 십자가 예수상에 칼이 씌어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옛 우리 순교성인들이 옥살이할 때 쓰고 있던 칼을 형상화한 십자가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고문과 박해를 당한 뒤 옥에 갇힌 우리 신앙선조들을 떠올리게 된다. 제대 밑에는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김성우(안토니오)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매주 목요일 미사 후에는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성지를 순례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성지순례 코스는 순교자 현양비를 시작으로 포도청과 감옥→행궁과 좌승당→북문→연무관→수구문→동문 밖으로 이어진다.
순례지 어느 곳 하나 신앙 고백터가 아닌 곳이 없다. 순교자들과 그 가족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곳이다.
포도청과 감옥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그 당시 감옥은 헐거운 천막과 판자로 이뤄져 흙바닥에 엉성한 멍석을 깔아 놓은 외양간이나 창고 같이 지어졌다. 당연히 비와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순교자들은 이러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심문을 당하고 다시 갇히기를 반복했다. 감옥은 단순히 갇혀있던 곳이 아니라 성체조배실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영혼을 정화하며, 순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한 신심 단련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교살형이나 교수형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에 감옥터는 순교터이기도 하다.
행궁과 좌승당
1817년(순조 17) 이전에는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이 따로 없어 행궁에서 집무를 했다. 그러다 1817년 행궁 담 밖에 좌승당이 지어져 유수는 이곳에서 집무를 봤다.
당시 죄인을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은 유수와 판관에게 있기에 전ㆍ현직 관리나 양반출신 신자들은 좌승당에서 심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좌승당은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증거한 신앙 고백터다.
북문
문헌에 따르면 구산에서 잡혀온 김성우 성인 동생들이 남한산성에 끌려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 옥바라지를 위해서 김성우 성인 일가 친척들이 드나들던 문이 북문이다. 이들은 북문을 지날 때마다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연무관
연무관은 수어영의 다른 이름으로 종5품 판관이 집무를 보는 제승헌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양반들을 심문하던 좌승당과 같이 일반 신자들을 심문하고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는 곳이었다.
수구문
수구문은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곳으로 성안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 시신이 수구문 밖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시구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박해를 통해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에 수 십일씩 방치되었고, 그 피가 경안천(광주천)까지 흘러내려갔다고 전할 만큼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쌓여있던 곳이다. 그러기에 수구문은 남한산성 순교성지의 순교자들의 무덤이며 가장 중요한 곳이다.
동문, 동문 밖
동문은 서울, 하남, 광주, 이천, 용인 지역의 신자들이 잡혀온 문으로 한 번 들어오면 죽어 나가는 문으로 알려졌다.
또한 동문 밖은 남한산성 최초의 순교자 한덕운(토마스)이 1801년 처형 당한 곳이다. 그의 목을 베었던 망나니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의연한 그 기운에 눌려 두 번 헛칼질을 하고 세 번째서야 목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매주 신자들을 성지순례로 이끄는 박경민 신부는 "비좁고 더러운 감옥에서 썩은 지푸라기를 뜯어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던 순교자들과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인이 돼 온갖 고문을 받았던 신앙선조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고통이 느껴진다"며 "순교자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믿음의 품위와 가치를 알려줬기에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성지에서는 성지순례 시간 이외에도 날마다 다양한 성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화~토요일 오전 11시, 주일 오후 2시에는 미사가 봉헌된다. 화요일 미사 후에는 음악과 함께하는 성체강복이 있으며 목요일 밤 11시 30분에는 성시간이 있다.
또한 금요일 미사 후에는 연령구혼에 힘쓴 한덕운 순교자를 생각하며 연옥 영혼과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친다. 이밖에도 매달 첫째 금요일 밤 8시에는 떼제미사를 봉헌한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
남한산성 첫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영혼의 안식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는 데에는 남한산성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125위 하느님의 종 명단에 올라있는 한덕운 토마스는 1752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790년 윤지충 바오로를 통해 천주교를 처음 접한 한덕운 토마스는 이후 말씀에 깊이 빠져들어 천주교 전파에 온힘을 쏟았다.
1800년 경기도 광주로 이사한 한덕운 토마스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박해가 이뤄지자 한양으로 신자들 상황을 살피러 길을 떠났다. 그러던 중 길에 버려진 홍낙민 루카, 최필제 베드로 등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거나 방치된 신자들 시신을 수습하며 몰래 장례를 도왔다.
또한 배교자들을 꾸짖으며 신자들이 어떠한 박해와 고문에서도 신앙을 져버리지 않도록 격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1801년 신자들 시신을 옮기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된 한덕운 토마스는 가혹한 매질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남한산성으로 끌려와 동문 밖 형장에서 참수를 당한 한덕운 토마스는 죽을을 겁내지 않은 의연한 태도에 오히려 망나니가 놀랐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신자들 시신을 수습하고 연령구혼에 힘을 쓴 한덕운 토마스는 연령의 시성이 될 경우 '연령의 주보성인'으로 모실 수 있는 영성을 지니고 있다.
성지안내 및 후원문의 : 031-749-8522
성지성당 입구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
성지성당 마당에 마련된 초가구유. 주변 경치와 조화를 이루며 포근한 시골마을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만 나올 수 있다는 동문
성지성당 십자가상.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던 칼을 형상화한 십자가상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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