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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8년 임자(1732) 5월 8일(갑자) 비가 옴
08-05-08[10] 시민당에서 사은 겸 동지사를 인견하는 자리에 정사 낙창군 이탱 등이 입시하여 수정한 《명사》와 은화에 관한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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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천도(天道)가 순환하니 오랑캐는 백 년 동안 지속되는 운수가 없다. 이종성(李宗城)이 전에 ‘몽고(蒙古)와 서달(西㺚)이 힘을 합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별단을 보니 진실로 그러하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서달도 몽고의 한 부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영고탑(寧古塔)으로 쳐들어간다면 우리나라는 피해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영고탑을 수리하는 일이 있다고 하니 몹시 괴이하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토적(土賊)의 봉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대만(臺灣)입니다. 복건(福建)의 아래쪽 상강(湘江) 근처에 위치하고 해도(海島)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지 않는데,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져 남쪽 지방이 요란하다고 합니다.”
하고, 이탱이 아뢰기를,
“지금은 몽고도 순종하지 않아 이미 반역의 형세가 있으니, 심양(潯陽)의 장군이 변화를 살피러 왔다가 몽고에게 쫓겨 갔다고 합니다.”
하고, 이일제가 아뢰기를,
“서달이 거처하는 지역은 장성(長城)의 바깥쪽에 있는데 한나라의 사군(四郡)과 송나라의 영하(寧夏) 근처인 듯합니다. 서쪽으로는 청해(靑海)와 서장(西藏)과 통하고 동쪽으로는 한해(瀚海)와 천산(天山)과 접해 있습니다. 한 무제(漢武帝) 때 매번 막(漠)을 건너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니, 이른바 막은 바로 사막(沙漠)인데 북해로 가는 옛길입니다. 천리나 되는 사막으로 모래 바람에 인가는 전혀 없고, 달적(㺚賊)의 소굴이 북쪽에 있기 때문에 토벌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듣건대 달인은 추위와 배고픔을 잘 견디고 오곡을 먹지 않아 사람과 가축을 막론하고 만나기만 하면 살을 갈라 생으로 먹으며, 말 또한 나는 듯이 사막을 달린다고 합니다. 그 추장의 성명은 바로 측왕아이희탄(測汪阿伊希攤)인데 중국인들은 단지 측왕(測汪)이라고 부릅니다.
당초 전쟁의 발단이 생긴 것은 합밀국(哈密國)의 진과(眞瓜)를 다투었기 때문인데, 결국 전쟁과 재화(災禍)가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릇 강(羌)과 번(蕃)은 다른 종족이라고는 하나 본래는 하나의 부류이니, 이른바 서적(西賊)은 바로 강의 종자라고 합니다. 지난해 8월 옹정제가 병사를 보내 출정시켰는데 모든 군대가 패망하였고, 또 마이새(馬爾賽)를 보내 출정시켰는데도 대패(大敗)를 면치 못하고 겨우 필마로 도망쳐 왔습니다. 거용(居庸), 관서(關西), 북몽고(北蒙古)의 경계를 참혹하게 침범하고 습격하는 근심이 있어 옹정제가 몹시 걱정한다고 합니다.
관동(關東) 및 연북(燕北)의 군대는 팔기군(八旗軍)이라 불리는데, 의식(衣食)과 행장(行裝)을 모두 관에서 준비하여 공급하며, 이들 모두는 기병(騎兵)입니다. 나머지 중국의 군대는 녹기군(綠旗軍)이라 불리는데, 모두 보병(步兵)입니다. 근년 출정은 모두 팔기군을 썼는데, 악종기(岳鍾琪)는 녹기군을 이끌고 옥문관(玉門關)을 방비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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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복건의 아래쪽에 있는데 정지룡(鄭芝龍)이 일찍이 할거(割據)하던 곳입니다. 근래에 들으니 이들이 해구(海寇)가 되어 쳐들어올 조짐이 있어 연경 사람들도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동복국지(海東復國志)》는 임진년(1592, 선조25) 이후 지어진 책으로 단지 1건만 있고 이미 본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얻어 보고자 했지만 결국 얻을 수 없었고, 단지 지도 1장만 보았으므로 베껴서 가져왔습니다.
복건은 우리나라와 마주 보는 곳으로 지역이 맨 아래쪽에 있어서 제주(濟州)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신이 남쪽 고을에서 직임을 맡고 있을 때, 바다 밖의 지형을 직접 살펴보았는데, 바다 가운데에 물마루가 있어서 중국 배가 왕래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바닷길이 몹시 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지역은 한쪽 방면이 동해로 툭 튀어나와 있어 우리나라의 호서(湖西), 해서(海西)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에는 중국 배가 출몰할까 몹시 우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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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23] 복건(福建) :
원문은 ‘幅建’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幅’을 ‘福’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4] 사막(沙漠) :
원문은 ‘沙幕’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幕’을 ‘漠’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 동해 :
중국의 처지에서 동해이므로 우리나라의 황해를 가리킨다.
。 上曰, 天道循環, 胡無百年之運? 李宗城前言, 蒙與㺚, 合力云矣, 今觀別單, 信然矣。尙絅曰, 㺚亦蒙之一枝也。上曰, 彼若驅入於靈龜塔, 則我國難免被害矣。今聞有修理靈龜塔之事云, 甚可怪也。尙絅曰, 南方有土賊起焉, 所謂臺灣是也。在於幅建[福建]之下, 湘江近處, 入海島中, 不削髮, 其勢漸盛, 南方擾亂云矣。樘曰, 卽今蒙古, 亦不順, 已有叛形, 潯陽將軍, 察變而來, 爲蒙古所逐而去云矣。日躋曰, 西㺚所居之地, 在於長城之外, 似是漢之四郡, 宋之寧夏近處, 西通靑海·西藏, 東接瀚海·天山, 而漢武時, 每以度漠爲難, 所謂漠者卽沙幕[沙漠], 而北海故道也。千里風沙, 杳無人煙, 而㺚賊巢窟, 在於其北, 故所以征討之甚難。聞㺚人耐寒耐飢, 不食五穀, 勿論人畜, 遇輒割肉生啖, 馬亦馳沙如飛云矣。其酋長姓名, 卽測汪阿伊希攤云, 而中國人, 只稱以測汪。當初兵端之起, 蓋爭哈密國眞瓜, 而終至於兵連禍結。凡羌與蕃, 雖曰二種, 而自是一類, 所謂西賊, 卽羌之種落云矣。前年八月, 雍正送兵出征, 全軍敗沒, 又送馬爾賽出征, 亦未免大敗, 僅以匹馬逃歸, 居庸·關西·北蒙古之界, 慘有侵軼之患, 雍正深以爲憂云矣。關東及燕北軍, 則稱以八旗軍, 衣食資裝, 皆自官備給, 此皆騎兵也, 其餘天下軍, 則稱綠旗軍, 皆步兵也。近年出征, 皆用八騎軍[八旗軍], 岳鍾琪則率綠旗軍, 防玉門關云矣。有林本裕者, 居在瀋陽西街, 善文有識見者也。以筆談, 問西賊事, 仍及中原事, 則答以爲恐有輪臺之悔云, 又問然則財窮兵竭耶? 曰, 然矣。以年年出征之故, 財力蕩竭云矣。臣等入去時, 過東八站, 騷屑太甚。問其處人曰, 關東卽根本之地, 而連年發此土兵, 得無失固根之意耶? 答曰, 此實不得已也。當初則出征軍兵家屬所食, 皆自其國周給, 故軍兵皆樂赴, 而今則國用, 漸竭於征役, 至有抄富民爲兵之議, 故民心騷動, 關內亦云不太平。西賊如是, 天子眉頭, 每不展云矣。所謂馬爾賽, 卽從閣中出征, 佩大將軍印, 率兵而去, 未及下寨, 西賊掩擊, 全軍覆沒, 馬爾賽瞎一目, 僅僅逃還云矣。有星變, 極其怪異, 三使臣皆見之矣。二月初六日夕時, 西方極西邊, 星殞如盆, 尾長十餘丈, 大如楹, 其殞有聲, 蜿蜿若龍之形, 良久不滅, 燕人畏之矣。其後岳鍾琪捷報至, 彼人以星變, 爲西賊之敗徵云, 而其言何足信也? 或云, 康熙喪時, 有星變, 皇后喪時, 亦有之。今又有星變, 而雍正之病甚重, 彼人皆以爲憂, 岳將軍捷音至後, 稍以鎭定云矣。臺灣卽福建下也, 而鄭芝龍曾所割據處也。近聞有海寇之漸, 燕人亦以爲慮云。海東復國志, 壬辰以後所作之書, 而只有一件, 旣無本板, 故欲爲得見, 而終不能得, 只見地圖一張, 故摸得以來矣。蓋幅建[福建], 對沖我國, 地勢最下, 與濟州, 恰相對矣。臣待罪南邑時, 親見海外地勢, 聞海中有水宗, 不曾有唐舶之往來, 蓋海路甚艱, 而登·萊一角斗絶, 入於東海中, 與我境湖西·海西相對, 故此等處, 唐舶之出沒, 最可虞矣。文命曰, 書狀所達, 大體慮念之道則是矣, 而康熙本非一代後卽亡之主, 雍正亦非常人, 西賊雖作梗於其處, 而非有志於天下矣。尙絅曰, 㺚與蒙如此, 中國其於蕩敗, 何哉? 文命曰, 蒙則不遠似入於中原矣。關外之人, 則其主不美之事及不好之談, 必皆爲之, 此乃漢人故也, 其言不足取信矣。 有勤勞者, 懸註事, 分付政院, 可也。榻前下敎
첫댓글 우리가 배운 한사군중인 하나인지, 단순 한나라 네개의 군이지 모르겠습니다. 마주본다는 표현이 너무 많아서 어딜봐도 다 마주보니 참. 그냥 참고 차원에서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복건과 제주부분의 글은 명백히 교열된 글로 보입니다. 윗부분의 장성 및 몽고 영하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고증한 북방 현 알타이산의 설명과 부합되는군요. 감사합니다.
與濟州, 恰相對矣 의 번역은 '복건이 청나라의 최남단에 있어 제주가 아국의 최남단에 있는 것과
흡사하다'라고 번역하여야 하는데 고전번역원에서 반도 제주를 의식하고 '제주는복건과 마주보고
있다'고 엉터리로 번역하였네요. 세금이 아까운 현실입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