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엔 비가 참 많이 내렸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98년 7월말에서 8월초로 이어지는 바캉스 시즌의 극성수기였습니다. 대학생이 된 딸아이가 아직 태중에 있을 때라 그해엔 바캉스를 가지 않겠노라고 만천하에 선언을 해두었던 터였습니다. 피서철마다 산과 계곡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휴양지 강원도로 피서를 떠나는 것을 당연시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르르륵~ 따르르륵~ 따르르륵~
밤새 퍼부은 폭우로 온 집안이 눅룩한 기운에 뒤덮였습니다. 끈적한 바람을 힘겹게 토해내는 선풍기는 간헐적으로 꿀럭여운습니다. 영화라면 이 장면에서 뭐라도 불쑥 튀어 나와 반전을 노릴 분위기였습니다.
따르르륵~~ 따르르륵~~ 따르르륵~~
“여보세요?”
“어..난데(형인데) 지금 엄마를 모시고 속초로 가는 중이다.”
“근데?”
“어...아버지는 병원에 가셔야 하는 날이라 지금 집에 계신다.”
“... ...”
“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이리(속초)로 와야겠다.”
“... ...”
“길이 험하니깐 조심해서 와라.”
“올핸 피서 안 간다고 했잖아. 아내가 임신중이라구. 게다가 집중호우로 전국이 물난리가 났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라구.”
“그럼 편찮으신 아버지를 휴가동안 혼자 계시게 하겠다는 거냐?”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내(차남) 의견 따윈 물을 필요도 없이 장자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면 식솔들은 따라야 된다는 분위기가 집안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편에도 나설 수 없었던 선친과 조실부모하고 친척집에서 큰언니 노릇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불운했던 가족사가 위계를 중시하는 가풍을 잉태했을 겁니다.
부모님과 형네가족은 속초에서 이틀을 묵고 3일차가 되던 날 아침 일찍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갑판장네는 이틀 전에 서울에서속초로 오는 길에 온갖 고초를 겪은 것이 억울해서 좀 더 뽕을 뽑다 느지막이 상경을 하기로 했습니다. 전국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내려 도로 곳곳이 유실되었고, 다리가 떠내려 간 곳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특히 서울~홍성~속초 구간은 산사태로 인해 집채만한 바위들이 도로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7번 국도를 따라 유람하며 바다구경도 하고, 주문진항에 들러 회도 먹고, 장도 보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향했었습니다. 아뿔싸! 미시령을 넘어 상경하는 길은 산사태와 수해로 인해 무척 위험하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대부분의 차량들이 대관령으로 몰렸습니다. 당시는 영동고속도로가 왕복 2차로였던 터라 차량정체가 시작되면 세월아 네월아 길이 뚫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무려 12시간, 강릉서 서울까지 12시간을 걸려 귀가를 했더니만 산모였던 아내의 복부는 빵빵함을 넘어 바윗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다짐을 했었습니다. 다시는 강원도로 피서를 안 가겠노라고...
파란 바다를 보러 가기로 한 날,
봉은사역엔 푸른 바람이 불었습니다.
한나절 바람이나 쐬고 오기로 작당을 하던 중 한 놈이 이제껏 강원도 구경은 양양 솔비치에 고작 한 번 다녀 온 것이 전부이랍니다. 그나마 태풍(?)이 불 때라 숙소에만 있었다나 뭐라나 흠냐...그래서 무리해서 주문진으로 목적지를 잡았던 것인데 정작 그 인물은 한줌 바람으ㄹ 소멸되었습니다. 오전 8시 24분까지만 해도 몹시 들떠 카톡이던 인물이 불과 36분 후인 오전 9시에 봉은사역으로 못 나온 나름의 까닭이 있었을테니 고뇌는 온전히 그자의 몫으로 남깁니다.
주문진항은 20년 만입니다.
저녁에 영업일선에 나서야 하는 몸인지라 오후 6시까지는 귀경을 하는 것을 목표로 오전 9시에 봉은사역 앞에서 만나 출발을 했습니다. 주문진항까지 3시간을 예상했었는데 무려 4시간 40분이나 걸렸습니다. 아무렴 어떴습니까? 우린 지금 주문진항에 와 있고, 누릴 준비가 돼있지 말입니다. 사실 일요일 오후 2시에 출발하여 동해를 보고 당일 자정 안으로 귀가를 하는 것은 가능한 미션이지만 토요일 오전 9시 출발, 동해 보고 당일 저녁 6시까지 귀가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었습니다.
쥐치 혹은 전복치가 목표였습니다.
그날(6/24) 주문진항 회센터 기준으로 쥐치는 안 보였고, 전복치의 호가는 kg당 5~8만원이었습니다. 약간의 딸린 음식, 회를 떠주는 값과 자릿값이 포함된 가격입니다. 좀 더 둘러 보고 흥정을 할 요량으로 어시장에도 가봤습니다. 거기는 횟감 값 따로, 회 뜨는 값 따로, 자리(양념)값 따로 계산하는 시스템인데 회센터에서 안 보인 쥐치가 보입니다. kg당 2만5천원인데 3만원에 오징어까지 담아 가랍니다. 전복치도 보입니다만 둘이서 그것까지 먹기엔 벅차지 싶어 양보를 했습니다. 이날 운전을 전담한 이는 반주를 못할텐데 원하는 횟감이라도 먹이고 싶었습니다.
3만원에 어른 손바닥만한 쥐치 4마리와 중간 크기의 활오징어 2마리를 담았습니다. 여기에 손질값 5천원과 자릿값 5천원, 소주 1병 4천원, 공깃밥 2개 2천원, 매운탕 끓이는 값 1만원 등 2만1천원을 더 지불했습니다. 총 금액은 5만6천원으로 회센터랑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고로 아무런 준비 없이 주문진항에서 회를 드신다면 회센터든 어시장이든 비용은 비슷합니다. 미리 양념과 쌈채소 따위를 챙겨 가서 바닷가에 돗자리를 깔고 드시든지 아예 포장을 해가서 숙소에서 드실 거라면 어시장이 좀 더 저렴하겠다 싶습니다. 가성비를 따지거나 진짜 맛난 것을 먹고싶다면 그냥 서울의 단골집으로 가시기를 권하겠습니다.
쥐치회는 기대만큼 쫀쫀하거나 달큰하진 않았습니다.
이는 덜 위생적인 환경에서 횟감을 손질하느라 손질이 끝난 횟감을 마지막에 물로 한 번 빨듯이 헹구는데서 기인하지 싶습니다. 생선이나 해산물은 일단 손질을 시작하면 물과의 접촉을 피해야 고유의 풍미를 고스란히 지킬 수 있습니다.
활오징어회는 물로 헹구나 안 헹구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싸구려 와사비맛 소스를 푼 공장표 초고추장맛 소스에 푹 찍어 질겅질겅 씹으면 씹을수록 미끈한 단맛이 베어 나옵니다. 식감이 거친 다리부위는 상추쌈을 싸먹으면 됩니다. 손바닥 위에 상추를 펼치고, 뜨끈한 밥 한 술 얹고, 초고추장을 푹 찍은 오징어 다리회를 넣고, 생마늘과 풋고추를 넣은 후에 쐬주 한 잔 꺅~하고, 쌈을 입안에 넣어주면 임무완료.
솔직히 양념집에서 쥐치 서더리로 끓여준 매운탕에 대한 기대감은 제로였습니다...만
쫀득쫀득..쫀쫀..쫀질쫀질..암튼 좀 전까지만 해도 활개를 치던 놈이라서인지 식감이 유난히 찰집니다. 거기에 단맛까지..뽀독뽀독 씹을수록 감칠맛이 마구 샘솟습니다. 배우 이선균씨가 파스타에서 아귀간보다 쥐치간이 더 윗길이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이날은 가시에 붙은 살밥이 승자였습니다. 두고두고 회자 될 맛이었습니다.
오후 3시 53분...
배가 빵빵하게 불렀으니 이제 바다구경도 좀 하고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야겠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제 시각에 상경하기는 진작에 글러 먹었습니다. 도데체 누가, 왜, 뭣 때문에 동해로 오자고 한 걸까요? 주말 한나절 소풍이면 인천이나 문산, 양수리 쯤이 적당한데 말입니다. 파란 사천진해수욕장에 바람이 매섭게 붑니다. 푸르르르르~~~~ㄴ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
어느 고운 바람 불던날
잔잔히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감싸고
향기로운 입술도 내게 주었지
새찬 비바람에 내몸이 패이고
이는 파도에 깨끗이 부서져도
남의 생은 당신의 조각품인 것을
나는 당신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을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
우린 오늘도 마주보며
이렇게 서있네.
- 갯바위 1절 가사(1984년/한마음) -
그날 사천진해수욕장은 찬란했습니다.
비가 올랑말랑한 날씨라 오히려 바닷가를 거닐만 했습니다. 절대 예쁜(?) 아가ㅆ. 아지매들 때문은 아닙니다. 엄마랑 산책을 나온 아가들이 어찌나 이쁘던지...구.구.구.구...
얼음이 동동 뜬 냉커피가 간절합니다.
귀경길을 서둘러야겠기에 전망 좋은 카페는 포기하고 얼음방구가 슝슝 나올만치 차가운 냉커피 한 잔씩 손에 들고 차에 올랐습니다. 비라도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유기사는 늘 담배가 고푼가 봅니다. 틈만 나면 흡연질입니다.
절대 해변에서 마주친 아가씨 아가들 때문이라고 믿어줍니다. 유기사는 강아지랑 아가를 사랑합니다.
예쁜 비가 내립니다.
'툭...툭...추적추적...뽀드드득...삑삑...'
비 내리는 소리, 빗물이 차창에 부딪혀 튕겨지는 소리, 신경질적인 와이프 와이퍼질 소리도 유기사의 수다본능을 꺽을 순 없었습니다. 투머치 토커로 박찬호씨가 꼽히지만 우리에겐 유기사가 최고입니다. 그와 함께라면 오디오가 빌 틈이 없이 빼곡히 채워집니다. 나불나불...불라불라...아흑...
덧붙이는 이야기 둘
- 운전기사 유기사의 입장에서 푼 '주문진 소풍기'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 와인바 아르보의 유사장이 '아주 쉬운 와인 이야기'를 빙자해서 자신의 식견을 뽐낸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바람 맞은 난 쐰 갑판장>
첫댓글 푸르르르르른 바다가 참 좋아보입니다.
정동진 첫 여행은 이렇게 한줌 먼지가 되었군요.
이번에 눈물을 흘리면서 가족을 택했으니
다음에는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겠습니다.
다른 선택지로는 흰눈 소복소복 밟으며 청령포를 걸을 거라네요.
ㅋㅋㅋㅋ 손님이 없어서 말동무가 필요해서 그런가봐요.
햇님도 제가 아는 사람중에 top 3안에 드십니다. ㅋ
암튼, 다음번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고 사람 없을 청령포로 고고!!!
탑 2는 누군가요? 몹시 궁금타
@강구호 갑판장 ㅋㅋ 비밀이어라~ ㅋ
저 날 저는 전날의 숙취로 근무후 입덧을 맘껏 느끼고 있었던,,,
아르보에 들려 선장님께 드릴 공물을 두 손 가득 담아 갔다는 후문입니다. 밤 10시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