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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율사에 관한 기사는 『송고승전(宋高僧傳)』 외에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비교적 상세한 편이어서 『진표전간眞表傳簡』’조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조에 중복되어 나오고 진표의 제자들 이야기도 『심지계조心地繼祖』’조에 실려 있다.
신라와 백제시대 때 부터 꽃피기 시작한 도솔천의 천주님(미륵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진표 대성사로 부터 영글어 민중신앙으로 개화되었다.
법상종의 개조(開祖)이기도 한 그는, 일찍이 12세 때 어머니와 아버지(眞乃末)의 출가 허락을 받고 고향(전주 만경현 대정리)을 떠나 곧장 전북 김제군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숭제법사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그리고 미륵님으로부터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겠다는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전국 명산을 순행하다가, 27세 되던 경덕왕 19년(庚子, 760)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초인적인 정열을 발휘하며 구도에 정진하였다.
쌀 두 가마를 쪄서 말린 양식을 가지고 입산한 그는 하루에 두어 홉씩 먹으며 미륵불상 앞에서 지극정성으로 참회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천상으로부터 장차 도를 통하게 되리라는 암시적인 한소식[授記]을 받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는데, 이 순간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진표 대성사를 손으로 받아 바위에 올려 놓고 사라졌다.
이에 용기를 얻고 서원을 세워 21일을 기약하고 생사를 걸고 더욱 정근(精勤)하며 온몸을 돌에 던지고 수없이 참회하자, 3일이 되었을 때는 팔굽과 두 무릎이 터져 피가 흐르고 힘줄이 드러났다.
7일째 밤에 지장보살이 주장자를 짚고 나타나 몸을 간호해 주고 가사(架裟)와 바리때를 전해주자, 더욱 확신을 갖고 혈심으로 정진하여 21일이 끝나는 날 마침내 정각 도통을 하여 천안(天眼)을 열었다.
이에 지장보살 등 수많은 도솔천중(兜率天衆)을 거느리고 오시는 도솔천의 천주님이신 미륵존불을 친견하고, 다음과 같이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받는다.
“장하도다. 대장부여! 계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신명을 아낌 없이 지성으로 참회함이여! … 이중 제8간자는 본래 깨달은 불종자를 표시함이요, 제9간자는 새로 닦아 나타나는 불종자를 표시함이니 이것으로 장래의 과보를 알리라. 이 뒤에 그대는 이 몸(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후에 도솔천에 나리라.” 하시고 천상으로 환어하셨다. 이 때가 율사 30세 되던 임인(762)년 4월 27일이었다. 『三國遺事』
우리나라의 미륵불 신앙은 진표율사로부터 대중화되었다. 진표율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에 ‘진표전간眞表傳簡’ 이 있고, ‘관동풍악발연수 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가 있다. 그리고 <송고승전>에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이 있다.
<송고승전>에 있는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은 988년에 쓰여졌기 때문에 <삼국유사>보다 빠른 시기에 나왔지만 중국인이 기록했기 때문에 문헌적으로나 사료적으로 <삼국유사>보다 떨어진다고 평가되고 있다.
‘진표전간’은 <삼국유사>를 편찬하신 일연스님이 직접 쓰신 글이다. ‘관동풍악발연수석기’는 금강산 발연사의 주지인 영잠瑩岑스님이 1198년에 쓴 것을 일연스님의 제자인 무극無極스님이 <삼국유사>에 넣었다.
진표율사가 미륵부처님으로부터 전수받은 189개의 간자는 고려중기까지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의 제자인 영심永深스님이 속리산에서 간자 전수를 통해 법통을 계승해서 점찰법회를 열었고, 이어 심지心地스님이 간자를 전수받았다고 나온다.
신라 말기에는 석충釋沖스님이 진표율사의 가사와 간자 189개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고려 16대 예종은 팔공산 동화사에 보관돼 있는 간자를 대궐 안에 가져다가 공양을 하고 예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원각(圓覺) 대도통을 하신 진표 대성사는 자신의 때로부터 천 수백 년 후에 일어나는 천지 대개벽의 환난을 훤히 내다보고, 그 때 미륵 천주께서 동방의 이 강토에 강세해 주실 것과
자신을 큰 일꾼으로 써주실 것을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였다. 그러자 미륵존불로부터 금산사내에 있는“사답(寺沓) 칠두락七斗洛” 정도 넓이의 연못인 용추못(龍沼)을 메우고 미륵존불의 불상을 세우라고 계시를 받는다.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엄택곡부(奄宅曲阜)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三人一夕(修): 닦을 수修자를 파한 자(破字)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田田은 태전(太田)에 이로움이 있으니
도하지(道下止)하라: 그 도道에서 그치라.
정감록(鄭鑑錄)
한 때 민중신앙처럼 되어 버린 적이 있는 정감록 비결은 본래의 내용은 극히 간결하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덧붙여 졌다. 정감록의 핵심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앞으로의 지구촌 인류 미래에 대한 3대 예고다. 각 예언의 구성은
나를 죽이는 것(殺我者誰)과
나를 살리는 것(活我者誰)은 무엇인가로 반복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여인대화(女人戴禾)가 인부지(人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십팔가공(十八加公)이라.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여인대화(女人戴禾)가 인부지(人不知)라.
임진왜란은 계집 여(女), 사람 인(人), 벼 화(禾)인 것이 사람인 줄을 모른다(人不知) 하였는데,
이는 왜(倭)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일본, 왜놈들의 침략으로 민족 전체가 화를 당하리라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십팔가공(十八加公)이라.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는 자는 십팔가공(十八加公)이라
십팔가공(十八加公)은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의 松자를 파한 자이다.
명나라의 도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으로 출병할때 일본 공주가 영기(靈氣)로 미래를 내다보고
성공치 못하리니 떠나지 말라 하였는데, 이를 묵살하고 떠나려고 하자, 그러면 소나무, 솔 송(松)자를 조심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2. 병자호란(丙子胡亂)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우하횡산(雨下橫山)이 천부지(天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오 부토(浮土)는 온토(溫土)니 종토(從土)하라.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우하횡산(雨下橫山)이 천부지(天不知)라.
병자 호란때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혹한의 엄동설한을 틈타 쳐들어왔는데(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넘), 이때 백성들이 미리 산으로 피난가서 숨어 있다가 얼어 죽을 것을 말한 것이다.
우하횡산(雨下橫山) 천부지(天不知)라.
비 우(雨) 아래 뫼산(山)을 가로(횡,橫)로 하면 눈 설(雪)자다. 천부지(天不知) 하늘에서 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활아자수(活我者誰)오 부토(浮土)는 온토(溫土)니 종토(從土)하라.
나를 살리는 길은 "떠 있는 흙(浮土)이 따뜻한 흙(溫土)이니 그것을 따르라(從土) "했는데, 이는 온돌방의 구들을 말한 것으로서 방에 가만히 있어야 살수 있다는 말이다.
3. 앞으로 지구촌 인류가 맞이 할 최후의 변국과 사는 길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신부지(神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엄택곡부(奄宅曲阜)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신부지(神不知)라.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신부지(神不知)라: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천지신명인줄을 모른다(神不知)고 하였다.
귀신(鬼神) 귀(鬼)자에서 작은 머리에 다리가 없다 하였으니, "귀신우두머리 불甶자로서 천군(天軍)의 총지휘자인 신장(神將)을 암시하는 단어다. 노스트라다무스가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Du ciel viendra un grand Roi deffrayeur
Ressusciter le grand Roi dAngolmois Avant apres
지상의 앙골모아(조비알리스트(Jovialiste)의 대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그 전후,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백시선: 10권 72편]
남사고(南師古·1509~1571) 선생의 「격암유록(格庵遺錄)」에는 사람과 비슷하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신이 내려오니 하늘불(甶)을 아는 자는 살게 되리라...
도를 닦지 못하여 귀신이 혼을 빼가는 병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망하게 되는구나. <격암유록>
남사고 선생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하늘의 신’, ‘하늘불’, ‘귀신이 혼을 빼가는 병’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사고 선생은 이를 ‘이름 없는 하늘의 질병’이라고도 했는데 그 질병의 원인이 알고 보니 천지신명들이 일으키는 병이라는 것이다.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엄택곡부(奄宅曲阜)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삼국유사>에 원각(圓覺) 대도통을 하신 진표율사는 자신의 때로부터 천 수백 년 후에 일어나는 천지 대개벽의 환난을 훤히 내다보고, 그 때 미륵부처님께서 동방의 이 강토에 강세해 주실 것과
자신을 큰 일꾼으로 써주실 것을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였다. 그러자 미륵존불로부터 금산사내에 있는“사답(寺沓) 칠두락七斗洛” 정도 넓이의 연못인 용추못(龍沼)을 메우고 미륵존불의 불상을 세우라고 계시를 받는다.
진표율사는 불상을 세우기 위해 처음(762년 건립시작)에는 흙으로 연못을 메웠는데, 이튿날 보면 다 파헤쳐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때 지장보살이 나타나서 숯으로 메우라고 일러준다.
이에 진표율사는 도력(道力)을 써서 안질을 퍼뜨린 후 `누구든지 안질을 앓는 자는 금산사 용소에 숯을 한 짐 집어넣고 못물로 눈을 닦으면 낳는다.'는 소문을 낸다.
안질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숯을 집어넣으니 그제야 연못은 메워지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연못이 숯으로 메워지자 미륵불상을 받쳐 세우기 위해 연못 한 가운데에다 연꽃모양을 조각한 큰 바위(석조 연화대 또는 석련대, 현재 보물 23호)를 세웠으나, 무슨 조화에서인지 석련대(石蓮臺)는 밤 사이에 20여 미터나 떨어진 위치(현재 석련대가 있는 위치)로 옮겨져 버린다.
하루는 미륵부처님이 꿈에 현몽하여 “시루를 걸고 미륵불상을 세우라”고 계시한다. 이에 다시 진표율사는 연못 중앙에다 밑이 없는 대형 시루(甑증)를 걸고 그 위에 우물 정(井)자 형태의 받침목을 얹은 다음 쇠로 된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다(4년에 걸쳐 766년 완공).
지금도 금산사 미륵불상 밑에는 밑없는 거대한 시루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동서고금에 없는 기이한 형태이며, 세계 최대의 미륵존불상이다. 3층 미륵전과 함께 국보 62호로 지정되어 있다.
寺沓七斗洛(사답칠두락)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신부지(神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엄택곡부(奄宅曲阜)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활아자수(活我者誰)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엄택곡부(奄宅曲阜)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三人一夕(修): 닦을 수修자를 파한 자(破字)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田田은 태전(太田)에 이로움이 있으니
도하지(道下止)하라: 그 도道에서 그치라.
첫댓글 증산도 이야기 같은데
길고 어렵네요
이번 제 생에는 상관없을듯 요
임진왜란의 중심에서 조정공론을 이끌었던 영의정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형인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은 일찍이 계룡사부설(鷄龍四府說)을 주장했는데
동유의정부(東有議政府), 서유군부(西有軍府), 남유계룡부(南有鷄龍府), 중유궁내부(中有 宮內府)로 동쪽에는 정부종합청사, 서쪽에는 군사령부인 계룡대, 남쪽에는 계룡시가 들어서서 그의 예고가 적중했다.
앞으로 중앙에는 새 세상의 황궁이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동유의정부(東有議政府), 동쪽에는 정부종합청사
@가을단풍(충청)
서유군부(西有軍府), 서쪽에는 군사령부인 계룡대
@가을단풍(충청)
남유계룡부(南有鷄龍府), 남쪽에는 계룡시
@가을단풍(충청)
중유궁내부(中有 宮內府) 앞으로 중앙에는 새 세상의 황궁이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가을단풍(충청)
서애(西涯)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鷄龍石白 草浦舟行 大小中華偕矣 漢陽李氏三百年之地, 在於天數 若有小遺則四百年 以後至七甲子以後申年可知也
계룡산에 도읍이 들어서는 시기는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무넘이고개로 물이 넘어가 초포(草浦, 현 노성현 하류)에 배가 드나들 때 알 수 있다고 했는데, 1990년 금강 하구뚝 제방공사가 완공되자 강물이 불어 초포(草浦)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계룡산의 바위 또한 과거에는 검고 짙었던 바위가 대기오염으로 인한 산성비로 옅은 백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가을단풍(충청)
『기말록(其末錄)』에서는
國都連山 黎民得所 鷄龍石白 艸浦行舟 平沙三十里 南門復開 草浦西津 舟客萬里 沙岸南洞 國步千載
연산(連山)을 나라에 도읍으로 정하면 일반 백성들이 살 곳을 얻으리라. 계룡산의 돌이 흰빛이 되고, 초포(草浦)에 배가 다니고 모래벌 30리에 남문(南門)이 다시 열리고 초포 서쪽 나루는 배 탄 손님이 만리 정도 되고, 모래 언덕 남쪽 골은 나라의 운명이 천년의 세월이로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