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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수필을 올립니다.
어떤 말씀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끔한 충고와 쓴소리 부탁드립니다.
아들의 반항 - 주선태
아들이 처음으로 나에게 반항을 했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보행기를 탄 채 현관으로 와서 좋다고 소리 지르던 아들이, 외출을 나갔다 집에 오는 길에 다리가 아프면 업어 달라던 아들이 말이다. '미운 네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큰 소리 한번 칠 필요가 없었던 아들이었다. "싫어!"를 배운 순간이 제1 반항기라고 한다던데, 그런 것도 없이 지나간 아들이었다.
워낙 순하고 착하게 컸던 아들인지라 먼저 아들을 키운 선배나 형들과 대화를 하다가 아들한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얘기를 하면 두고 보자고 들 했다. 나중에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순간이 올 거라며. 도통 실감이 나질 않고, 난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건 나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내 아들은 착해서 나를 그렇게 화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데 내 아들은 이상하리만큼 트레이닝복만 입는다. 그렇다고 운동을 좋아하거나 스포티한 패션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저 편해서. 반대로 청바지는 불편해서.
운동을 좋아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누가 봐도 아빠가 체육교사이니 아들도 운동을 좋아하고 잘 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들은 그 흔한 축구공 한번, 야구 글러브 한번 사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어릴 적에 밖에 데리고 나가서 공놀이를 하면 한 시간도 안 되어 들어가자고 하고, 다음날 또 나가자고 하길 기대하는 아빠와는 달리 그걸로 끝이었다. 밖에 나가 축구를 하자고 하면 레고가 더 재미있다고 하는 아들을 억지로 끌고 나갈 수는 없지 않는가? 여의도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뒤를 잡고 가르쳐 줬지만 자기 신발이 페달과 미끄러져서 못 타겠다고 하는데 어찌나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던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 봉천동 낙성대에서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기어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갔던 나의 추억이 떠올라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줄까, 하고 물었지만 필요 없단다. 필요 없다는 데 사 줘봐야 고철만 될 뿐.
사실 아들의 운동 신경은 진즉에 알아보았다. 가수가 다른 사람의 노래 한 소절만 들으면 실력을 알아보듯 체육 전공자는 다른 사람이 20미터만 뛰는 걸 보아도 바로 답이 나올 텐데 하물며 운동회에서 전력으로 뛰는 모습을 본다면야.
요즘엔 초등학교 운동회를 토요일에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빠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함일 것이다. 만약 댁의 자녀가 토요일에 운동회를 한다고 하면 교사들은 전부 반대해도 교장의 고집이 교사들을 이겼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들이 4학년 때였던가? 토요일에 운동회를 한다기에 갔다. 혹시나 담임선생님이 힘들어 하시면 도와드릴까, 또 혹시나 아빠들의 달리기 시합이라도 있으면 참가해서 아들을 으쓱하게 해주려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갔다. 유치원 운동회 때도 참가해서 우리 팀 우승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는데 그건 내가 체육교사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결혼을 좀 일찍 한 덕에 아빠들 중에 젊은 편이었던 것이다.
진행하시는 선생님이 마이크에다 대고 반가운 안내를 한다. 곧 학년 별로 아빠들 달리기 시합이 진행 될 테니 참가할 아빠들은 나오라는 것.
4학년 차례를 기다렸다가 나갔더니 웬걸, 아들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말린다. 체육 선생님이 달리기 시합에 나오면 반칙이라나? 출발선에 선 아빠들의 날 쳐다보는 눈이 곱지 않다. 그 아빠들도 다들 자녀들한테 1등을 해 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왔는지 내가 참가하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볼멘소리들을 했다. 자식 앞에서 아빠들의 경쟁심과 성취욕은 상상을 초월한다. 할 수 없지 뭐. 아쉽지만 등을 돌려 응원석으로 돌아왔다.
몇몇 순서가 지나고 드디어 4학년의 달리기 차례가 왔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달리기 경기는 중학교 체육대회처럼 학급 대표를 뽑아서 하는 계주 경기가 아닌 반별로 예닐곱 명씩 조를 이뤄 뛰는 경기이다. 자기 조에서 1등을 했다고 1등끼리 결승을 하는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냥 한번 뛰고 그걸로 끝.
이윽고 아들 조의 차례가 왔다. 내가 더 떨린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출발. 저만치에서 아들이 먼지를 풍기며 달려온다. 그런데 뛰는 폼이 웃기다. 시선은 하늘을 보고, 양다리는 벌리고, 양팔을 앞, 뒤가 아닌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뛰는데 신발은 또 벗겨질 듯 불안하다. 흡사 뛰는 폼이 예전 TV 프로그램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시작할 때 '우와'하는 시그널 음악과 함께 나온 목도리 도마뱀과 비슷하다.
난 그 순간 아들의 운동 신경은 일찌감치 단념했다. 그래도 결과가 궁금한가? 뒤에서 두 번째. 꼴등은 여자애였다.
아들의 트레이닝복 고집 얘기를 하다가 딴 데로 흘렀다. 이렇듯 운동과는 담을 쌓은 아이인데 트레이닝복만 입는 것은 순전히 편해서라고 아까 얘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트레이닝복만 입는다는 것. 좀 점잖은 자리에 가거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가더라도 트레이닝복을 꺼낸다.
어제는 내 여동생의 생일이라 부모님과 함께 양쪽의 온 가족이 모였다. 내 여동생이니 아들에게는 고모이다. 전날 아들 친구 두 명이 우리 집에 와서 자느라 밤새 놀고 피곤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들도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라는 걸 알기에 안 간다고 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 또 트레이닝복을 입는 것이었다. 할머니나 고모네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강남 센트럴 시티의 식당을 예약했기에 눈에 확 거슬렸다.
웬만하면 잔소리를 안 하는 나이지만 트레이닝복이 아닌 청바지를 입었으면 하고 한마디를 했더니 갈아입기는 했지만 가는 차 안에서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표정이 어둡고 누가 뭘 물어도 간신히 대답 정도만 한다.
나의 엄마가 왜 그러냐고 하기에 옷 얘기가 나왔고, 온 가족이 다 있는데서 다시 알아듣기 좋게 조근 조근 얘기를 했다. 나의 특기인 적절한 예까지 들어가면서. 그랬더니 그 얘기는 두 달 전에 들었던 건데 또 들어야 하냐고 한다. 그리고 그놈의 격식이 뭐가 중요하냐며.
그. 놈. 의.
그렇다. 분명히 내 아들의 입에서 나온 세 음절이었다. 그리고 또 분명히 나에게 얘기한 단어였다. 내 여동생은 아들이 나에게 말 한 '그놈의'라는 표현에 놀랍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리곤 이내 아빠한테 '그놈의'가 뭐냐고 타이른다. 식당을 나오면서 나한테 걱정된 눈빛으로 괜찮으냐고 묻기에 중학생들 가르치다 보면 대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에둘러 얘기한다.
사실 그 나이의 소년에게 옷이 주는 인상과 '그놈의' 격식을 이해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 나이의 아이들은 특정한 단어나 표현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기도 한다. '선생님이 나한테 시비를 건다.'고 표현하는 건 일부러 예의 없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딱히 다른 표현을 몰라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렇다. 내 아들이 이제 중2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고 목 놓아 부르던 김광석의 노래는 중2 아들을 둔 아빠에게 이등병의 노래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제 다시 아들 하나를 새로 기르는 느낌이다. 그동안 알고 있던 내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보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첫 번째 반항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나의 중학교 시절엔 나를 비롯해서 친구들도 아버지한테 반항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지금보다 아버지의 권위가 훨씬 높았다는 것. 가장의 말 한마디는 그 집안의 법이 될 정도로 위세가 있었으며, 소통이나 대화와는 거리가 먼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시절의 대부분 아버지들에겐 밖에서 돈을 버는 일이 가장의 일이고, 가정교육은 엄마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아이와 놀아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는 아버지 보다는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오는 아버지, 남편이 최고라는 인식.
엄마한테 혼나서 무릎 꿇고 손들고 벌을 받고 있다가도 아버지가 들어오면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그런 존재. 그러니 머리가 아주 크기 전에 반항이라는 건 생각도 하기 힘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당시 은행원이었고, 우리나라 경제가 한창 호황일 때라 퇴근 후 바로 들어오시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말에도 테니스다, 골프 접대다 해서 새벽부터 나가시곤 했으니 그런 아버지와 평소 접촉이나 대화가 많아야 반항이라도 할 텐데 주로 대화는 가끔 일찍 들어오셔서 저녁 식사 중에 반주 한잔과 함께 들려주는 인생의 조언과 덕담들. 물론 그 얘기들은 내 인생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아주 잘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마찰이 없었다. 공부를 잘하니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교를 갈 거라고 기대도 컸다. 당시 우리 집은 서울 봉천동의 낙성대 근처였고, 그 낙성대에서 몇 백 미터만 올라가면 서울대학교 후문이 나왔다.
그런데 남자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성적이라는 게 올라가는 건 힘들어도 떨어지는 건 정말 쉽게도, 그리고 빠르게도 떨어졌다. 중학교 때 전교 등수가 반 등수가 되더니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서는 전교 등수가 100등 밖으로 떨어졌다. 여자 친구를 만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쌈박질을 하고, 술을 배우고 나서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의 설명은 자장가로 들려왔고, '수학의 정석'은 나에겐 집합의 정석이었다.
처음으로 전교 100등 밖으로 떨어진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성적표를 어떻게 보여드리나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엔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내밀었다. 엄마는 예의 그 폭풍 잔소리와 걱정을 늘어놓았지만 아버지는 너무 크게 실망한 듯 별 말이 없었다. 아마도 아들에 대한 기대가 다 무너진 듯 몇 시간 동안 애꿎은 성적표만 잔뜩 찌푸린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다음날부터 난 폭풍 전야를 맞은 선원처럼 밤이 되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맨 정신엔 아무 말 없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도 과연 나에게 아무 말 안할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
이, 삼일쯤 지난 뒤였나보다. 아버지가 열두시가 넘도록 안 들어오니 불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내방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몇 시쯤 되었을까? 거실에서 아버지의 술 취한 고성이 들려왔다. 엄마는 자는 애 깨우려고 그러느냐, 왜 그러냐고 같이 화를 내고. 말리는 엄마를 밀치고 내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까지 들려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계속 들려오는 아버지의 술 취한 고성. 그리고 충격적인 말들.
공부도 못하는 놈이 공부 안하고 벌써 자냐는. 공부 못하는 놈은 자식새끼도 아니라는.
내 방에 앉아 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듣고만 있다가 이내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공부 못하는 놈은 자식새끼도 아니라는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말리는 엄마를 무시하고 계속 들려오는 아버지의 험한 말들을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순간 이 집에서 더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방문을 세게 열고 거실로 나가 아버지한테 소리 질렀다. 공부 못하는 놈은 자식도 아니라고 하니 공부 못하는 나는 이만 이 집을 나가겠다고. 그 새벽에 분에 가득 찬 고성의 설전을 벌이다 신발을 신고 나가려고 하니 엄마가 내 팔을 잡았다. 엄마를 뿌리치고 나가려는데 이상하게도 힘이 훨씬 센 아들이 엄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잡고 있는 엄마의 손톱은 부러졌고, 잡힌 내 팔엔 긁힌 상처가 깊게 패였다.
엄마가 계속 끌고 들어와 내 방으로 들어왔더니 이번엔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속이 상해 그 길로 나가서 친구를 만났다고 다음날 엄마한테 들었다. 그런데 동 틀 무렵 들어온 아버지의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옷은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왔다고 했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감정이 상해 싸웠다고 했다는데 자세한건 기가 막혀서 엄마도 묻지 않았고, 나 역시 물을 수가 없었다. 다만 다 자란 아들이 소리 지르고 대드는데 때릴 수도 없고,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 아들을 기르는 내가 그 시절의 일을 물어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술이 많이 취해서 기억이 안 나는지,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과오를 애써 지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이제 그 때의 나의 아버지를 이해한다. 중학교 때 그렇게 공부 잘하던 아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 엉망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심정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무너졌을 때 아버지의 심정을. 그러한 마음을 아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꾹꾹 참아오다가 술에 취해 터뜨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고 그런 마음도 모르고 같이 소리 지르고 덤벼드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을. 아들을 낳아서 기르다보니 이제 알 것 같다.
아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나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 아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잔 말 말고 아빠가 입으라는 대로 입어!"라고 소리 한번 꽥 지르면 때론 좋겠지만 언제까지 엄마, 아빠가 꺼내 주는 옷만 입으라고 할 것인가?
앞으로 '그놈의'보다 더 한 얘기가 아들의 입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들의 반항에 나의 아버지처럼 나가서 술로 삭히고 싶진 않다. 감정을 쌓아 두었다 한 번에 터뜨리지 않고 그 때, 그 때 얘기하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의 첫 번째 반항은 나로 하여금 아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내 아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 본인 스스로 요즘 자신의 생각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하는 만큼 슬기롭게 사춘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
이번 주말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소주 한잔 하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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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2?.. 아직 많이 남았네요.
나는 아들 나이가 스물셋인데 여전히 힘들어요. 때로는 화가날 때도 있지만 엄마처럼 사사건건 야단치면 안 될 것 같아
인내하고 있죠. 지금 트레이닝복만 입는다고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진짜 속터질 때가 올 수 있어요 ^^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더군요. 즉 아이 하나가 부모 속 썩이는 건 누구나 그 양이 일정해서 어릴때 말썽 안부리면 커서라도 말썽을 부려 힘들게 한다는 법칙이입니다. 제 아들은 워낙 순하게 커서 여태껏 큰소리 한번 안쳤는데 커서 말썽 부릴까 때론 두렵기도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이 글이 아버지들이 읽으시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군요. 저는 제 입장에서만 썼지, 아버지의 시각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내 아들은 2년 전에 누굴 뚜드려 패서 천만 원 물어준 적도 있어요. 어쩝니까^^^ 그냥 네 자식인 걸요....
그쵸. 미우나 고우나 자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