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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 지킨다고 수행 잘하는 것 아니더라’
“맞아, 백번 맞는 말이제. 금욕만 한다고 수행하는 건 아니잖이여. 잘 혔어!”
<한겨레> 종교면의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한 선승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평소에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스님이라서 이심전심으로 우리는 그렇게 웃었습니다.
선(禪)이 그렇듯이 제가 아는 선승들의 대부분은 단순하고 명쾌하고 솔직합니다. 그것은 성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기사를 본 다른 젊은 선승이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온갖 여자들하고 다 놀고, 젊은 놈들을 다 잡아다가 장가도 못하게 해놓고, 이제 50이 다 됐는데, 도(道)도 안터지니, 우짜면 좋노? 부처님, 내 청춘 돌리도!”
그의 농담 속에서 우리는 또한번 호탕하게 웃었지만, 그의 말 속에 어떤 진실도 담겨있지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겐 세가지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먹어야만 하는 식욕, 자야만 하는 수면욕, 그리고 성욕.
출가자는 모든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래도 먹고 자는데 대한 제약은 ‘성적 제약’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출가자에게 ‘성’은 어찌 보면 ‘해결 난망’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성숙하면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성욕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조차합니다.
그러나 역대 고승들은 수행의 최대 마장으로 늘 ‘성적인 욕망’을 꼽았습니다.
보조 지눌스님은 여색에 빠지는 것은 독사에 물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많은 고승들이 남자의 물건을 여자의 그것에 넣는 것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또 보조 지눌 스님은 계율을 지키지않고 100년을 사는 것보다 계율을 지키면서 하루를 사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서산대사도 수행자는 재색을 가장 먼저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고승들이 색욕을 경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성기가 한 개이기 망정이지 두개만 있었다면 이 세상에 수행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만큼 성적인 쾌락에서도 동요하지않기가 참으로 쉽지않습니다. 더구나 일상적으로 성을 접촉해보지 않은 출가자가 성을 접촉했을 때, 그에게 가 닿을 충격파는 대단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은 성적 감각을 탐닉하면서 선정(禪定)을 얻고자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적인 쾌락에 빠져서는 결코 수행의 진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스님들이 이를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싸워 이겨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손가락을 태우는 소신연비를 해가면서 그 욕망을 이겨내고, 어떤 이는 염불에, 어떤 이는 화두에 몰입하면서 이를 이겨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정상적인 어른에게 성적인 관심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직접 해 본 사람보다 해보지 않은 사람에겐 10대 어린이가 잡지와 비디오를 훔쳐보듯이 더욱 더 호기심이 크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동진 출가자가 별로 없고, 대부분의 스님들이 나이가 들어서 출가하는 추세이지만, 예전엔 여성을 접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가운데 10대에 출가한 스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선방의 사랑방 격인 지대방에서 늘 화제의 일미는 성이었습니다. 다양한 음담패설을 아는 스님이 지대방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저와 절친한 한 스님은 출가자 중에서도 ‘별종’에 해당될만한 분입니다. 그 분은 전생에 신라시대 스님이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번 환생하면서 한 번도 여자와 성적 접촉이 없어서 ‘신라시대부터 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 스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조차도 기괴한 음담패설을 들려줘 저를 놀라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에 대한 욕구가 이런 음담패설로 해결될 수만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어찌 모든 분들이 그 정도로 욕구를 다 해소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행을 하다보면 기운이 더욱 넘치고 정력이 더욱 더 세지니, 음욕이 해결되지 않으면, 수행력만큼이나 마장도 그 만큼 높아가겠지요.
한 선승은 물건이 발기된 채로 1주일 동안 단 한 순간도 물건이 고개를 숙이지 않더랍니다. 그로 인한 통증도 통증이지만, 절 집에도 공양주 보살 등 여성들이 있으니, 남부끄럽기도 하고, 괴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그는 그만 견디다 못해 못으로 그 물건을 찍어버렸습니다. 피가 터지자 발기는 가라앉았지만, 피투성이가 되었지요. 그래서 도반들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하게 한 적도 있었답니다.
그래도 그의 경우는 낫습니다. 제가 아는 한 스님은 아예 물건을 잘라 버린 분도 계십니다. 출가해 열심히 살아가던 그는 친형처럼 따르던 사형들이 하나둘씩 절 집안을 떠나는 것을 보고 그 때마다 눈물을 삼켰습니다. 왜 큰 결심으로 출가를 감행했을 사형들이 다시 하산하는지 궁금했던 그가 절에 오래 살던 한 보살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보살이 말했습니다.
“그 놈의 물건 때문이지!”
그는 그 길로 부엌칼을 들고 자기의 물건을 잘라버렸습니다. 절대 속퇴하고 싶지않았던 그는 스님들을 하산시키는 원인이 그 물건이라니 그 물건을 아예 잘라버린것입니다.
스님들이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하산하는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스님들은 늘 보이던 스님이 보이지 않으면 “조개가 물어갔구만”하고 농담을 하곤 합니다. 어느 여성에게 넘어갔다는 얘기입니다.
사람마다 성적인 욕구의 정도도, 정신력도 다르니만큼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렵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그 고통스런 애욕을 수행으로 극복해내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처럼’ 넉넉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엔 그 애욕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늪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금욕과 깨달음’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한 고려대 조성택 교수의 말대로 조계종의 스님들도 원불교 교무나 성공회 신부들 처럼, 결혼할 분은 하고, 독신을 유지할 분은 유지하도록 2원화 시키는 방안을 논의해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대다수 일반인들이 성적인 문제나 음주 등 계율에 대해 스님들에게 철저한 잣대를 드리대곤 합니다. 자신은 개차반처럼 살아도, 스님은 절대 그렇게 해선 안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며 진솔한 얘기를 나누어온 저로선 대개의 일반인들과는 관점이 많이 다릅니다.
물론 저 또한 성적인 욕망 뿐 아니라 욕구를 잘 다스리고, 마음을 잘 챙겨 여여한 수도자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그렇다고 그렇지 못한 스님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몸으로 계율을 지킨다고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수천번 간음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많은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수행자가 수행의 자세를 잃지않는다면, 결국은 자신을 일신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려는 쪽입니다. 타락한 어느 한 장면만을 보고 그를 마귀로 보는 것도, 어느 한 자비행을 보고 그를 보살로 숭배하는 것도 맞지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성이 최고의 마장일 수 있지만, 수행으로 이끄는 최고의 에너지이자, 최고의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제가 최근에 펴낸 책 <은둔>에 소개했던 춘성 선사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늘 진솔하고, 욕을 밥먹듯이 했던 욕쟁이 선사 춘성은 선승들에게 외치곤 했습니다.
“야, 이놈들아. 아침에 좇은 빳빳하게 서냐? 좇이 빳빳하게 서야 한다.”
그가 상스러운 잡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미처 스쳐 지나가기도 전에 분별을 자르는 춘성의 경책이 이어졌습니다.
“그 힘을 헛곳에 쓰지 말고, ‘이렇게 일어나게 하는 놈이 무엇인가’하고 화두심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놈들아!”
한겨례 블로거의 휴심산방의 조현님의 글입니다
첫댓글 스님들의 결혼을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일로 만들고
스님들의 고충을 덜어들이기 위해
유진스님 장가보내기 해야겠습니다 ㅋㅋ
수행의 초기, 일정단계에 이르면 -라즈니쉬의 표현대로 제일 아래 차크라(섹스차크라)가 열려 性에너지가 쌓이게 됩니다. 몸과 맘이 둘이 아닐진데 몸속의 그 에너지는 분명 마음에 작용하겠죠. 잦은 발기에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생명력의 변화-왕성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춘성선사의 일화에 눈이 가는군요.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보면 아주아주 빳빳하게 서있는데 그럼 이녀석들이 엄마의 자궁에서 나오면서 성욕이 일어나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