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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암산 일송정
중국연변 포석조명희문학제 충북방문단 소속으로 다녀온 연변기행
2016.5.25.수-30.월(5박6일)
다녀온 곳
청주 국제공항▶연길 조양천 국제공항▶모아산▶15회 연변 포석 조명희문학제(연변 가무단 극장)
▶백두산 천지▶장백폭포▶온천지대 관광▶지하삼림관광▶소천지▶녹원담▶해란강▶비암산 일송정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 윤동주 기념관, 이상설기념관▶용두레 우물,용정초등학교▶애심원
▶새벽상설시장▶윤동주생가(명동촌)▶발마사지 체험▶북한접경지역 도문▶연길체육관(축구결승)▶서시장
2편
비암산 일송정ㆍ해란강ㆍ윤동주기념관ㆍ용두레우물ㆍ애심원
여행 세쨋날 첫 일정으로 일송정이다.
날씨도 화창하고 좋은 날 아침, 우리 일행 13명은 미니버스에 올라 아침을 달린다.
저어 뾰족 산꼭대기에 정자 하나 보이는데 바로 우리가 올라야 가야 할 일송정이다.
가이드왈, 보통 여행사버스는
손가락으로 '저어기'라며 알려주곤 지나친다는데 우린 그곳까지 오르게 되었다.
일송정 입구에 위치한 일송정 비 앞에서 기념촬영
일송정 비 좌측에 있는 돌비가 '비암산 진달래비'
비암산 진달래 / 조 룡남
산.산. 비암산 봄이 오는 산
봄눈 녹는 길목마다 피는 진달래
꽃가지 부는 바람 연분홍 바람
네마음 내마음에 꽃물이 드네
꽃술을 세여보자 꽃말을 읽자
세전벌 오십리에 밭갈이 노래
산.산. 비암산 꽃이 피는 산
꽃눈트는 굽이마다 우는 솔쫑새
-님아. 님아. 오시리 오시리잇고
일송정 추녀아래 꽃꿈이 곱네
꽃잎 따서 그리운 편지에 접어
룡정의 봄소식을 전하여주자
2004.4.20
일송정 비 우측에 있는 돌비가 '용정 찬가비'
룡정찬가 / 이태수 龍井贊歌/李泰洙
백룡승천白龍升天
신비한 전설傳說
용드레우물에
무지개로 섰다
그 광환光環
해란海蘭에 비끼고
비암琵岩에 걸려
서전산야瑞甸山野를 비추니
천지정기天地正氣
인걸人杰에 용龍꿈을 선사하는
천혜天惠의 땅
성聖스러운 터 룡정龍井
2004.4.20
용정찬가와 비암산 진달래 시가 새겨진 바위에는 원래 '선구자'와 '고향의 봄' 가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선구자 노래 가사는 일송정 비 아래 기단에 자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龍井의 노래 (先驅者)
作詞 尹海榮 作曲 趙斗南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마음 길이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선구자 노래비 앞에서 조철호회장님의 해설을 경청중인 일행들
선구자 노래비 앞에서 하모니카연주에 맞춰 일행들 제창중이다.
가곡 "선구자" 는 학창시절부터 많이 불러왔던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면
일제시대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독립군의 장엄한 모습이 연상되고 선구자의 기개가 전해온다.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일송정은 용정에서 서남쪽에 있는 비암산 자락에 위치한다.
조선 멸망 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회합장소로 쓰였으며, 항일의지를 불태웠던 곳이다.
소나무 한그루가 항일의 상징이 되자, 일제는 이를 사격장으로 만들고, 일송정을
사격 과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91년 한국의 후원을 받아 옛자리에 소나무를 심어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송정으로 오른다.
일송정(一松亭)
'연변문화유물략편(延邊文化遺物略篇)'에 의하면 해발높이 500m되는 비암산(琵岩山)은
꼭대기 서쪽의 높은 비탈이 바로 BC 3,000년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비암산유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막상 이 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것은 한 그루의 나무때문이다.
물론 산에 오르면
사처에 사철 푸른 소나무 투성이지만 이 소나무만은 그 위상이 남다르다. 1980년대 룡정시의
사회단체들은 그 옛날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설화가 담긴 소나무를 복원하기로 합의를 보고
복원식수를 하였다. 소나무를 떠다 심었고 나무곁에 팔각정자도 세웠다.
하늘향해 비첨(飛檐)이 건뜩 들리고 단청무늬가 아름다운 정자의 천정에는
가곡 '룡정(龍井)의 노래'에 나오는 주요한 줄거리를 소재로 하여 우물, 말 탄 사람,
달빛어린 해란강, 룡주사, 룡문교, 대성중학교 등 룡정의 경관을 그려넣었다.
이후 일송정이 섰는 산정(山頂)에로 오르는 돌층계, 일송정 기념비, 팔각정자,
조선족 유명작가 시인들이 지은 룡정관련 시구를 새긴 노래비 등을 건립하여 한동안 인적기
드물던 산정에 제법 하나의 풍경구(風景區)가 조성되었다. *岳岩 整理에서
뱀처럼 길다란 하얀 길따라 오른쪽으로 꼭 실개천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해란강이다.
일송정에서 만감에 젖어계신 조철호회장님
일송정에서 바라 본 해란강은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으로 그 물줄기가 실개천처럼 보인다.
해란강은 간도(만주) 지역을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인데 연길 시내 중심을 관통해 흐르고 있다.
우리 민족이 간도 지역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해란강 주변의 들판인데
주로 옥수수를 재배하던 중국인들과는 달리 이곳 북방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던 억척같았던
선조들에게 해란강은 생명의 젖줄이었다.
하얀 길 오른쪽으로 한 줄기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일송정에서 바라본 해란강과 평강벌이다.
일송정은 그 이미지 만큼이나 아픈 상처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송정(一松亭)은 중국 지린성 연변자치주 용정시에서 서남쪽으로 4km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우뚝 서서 일제시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중심지인 용정시를 굽어보고 있다.
일송정에 올라가면 용정시 양쪽으로 대평원이 펼쳐지고 뒤쪽으로 해란강이 한줄기로
굽이굽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송정 바로 옆 절벽 끝에 한그루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정자를 닮은 소나무로 인해 일송정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또는 한그루 소나무 옆에 나무정자가 있어 한그루 소나무, 하나의 정자라는 뜻으로
일송정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일제시대 일송정은 용정 일대 구국 청년들의 항일운동의 요람이며 성지로서
주민의 관심과 칭송이 높아지자 일제는 정자를 없애고 옆의 소나무도 베어버렸단다.
이곳에는 1938년도까지만 해도 수백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겪어온 아름들이 큰 소나무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후 중국 용정시 정부는 1989년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를 심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계속 잘리거나 말라죽고 현재 서 있는 소나무는
2003년에 9번째로 심은 것이라 한다.
비암산 정상, 바로 세전벌을 굽어보고 있는 일송정(一松亭) 앞에서 필자.
일송정(一松亭)의 한자 유래
고도(古都) 룡정(龍井)에서 서남쪽방향으로 약 4km 쯤에서 룡정(龍井)을 보듬어 안은
세전이벌과 평강벌의 복판에 분수령(分水嶺)으로 솟아 있는 비암산(琵岩山)이라는
고운 이름의 산이다.
1930년대에 이미 있었다고 하는데,
이 소나무는 현재는 복원식수이지만, 흡사 큰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亭子)와
비슷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부르고 있다.
용정중학교 교문
독립투사의 얼이 숨쉬고 있는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
민족교육의 발상지 용정중학교는
1921년 7월 11일 대성중학교로 개교했고, 일제 수난기를 거쳐 1946년 9월 16일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 광명중학교, 명신중학교, 동흥중학교, 광명여자중학교 등 6개 학교가 연합해서
조선족만 다니는 '길림성립 용정중학교'가 되었다.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나눠 신관은 용정중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구관 2층에는
대성중학교 역사와 용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족교육 운동,
독립운동 관련 사진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관이다.
전시관으로 이동중인 일행들의 뒷모습이다.
전시관에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역사와 인물들이 시기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윤동주기념관으로
윤동주시비 앞에서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의 특징은
일제강점기 상황("밤') 에서 순수한 표상인 이상('별') 을 실현하는데
현실적 어려움('바람') 에 부딪쳐 끊임없이 시달리며
갈등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늘, 바람, 별, 잎새 자연적 소의 상징화로 적절한
시각적 심상으로 활용한 서정시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동주와 친구들.. 출처:다음백과
뒷줄 왼쪽 장준하,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앞줄 가운데 정일권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었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이었던 9월 28일, 친정에서 살던 고모 윤신영이 아들 송몽규를 낳았다.
고종사촌 관계인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렇듯 한집에서 태어나 후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너도 나도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간도의 자동으로 이사했고,
1900년에는 기독교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하현에 의해 명동촌으로 재차 이사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이상설과 이동녕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용정을 떠나며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이 명동에
명동서숙을 세운 다음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명동서숙은 1908년 4월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친구 문익환 목사와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던 그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고, 5학년 때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등사잡지를 만드는 등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년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이면서도 의연했고 씩씩했다. 재봉틀로 해진 교복을 직접
고쳐 입었고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살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공부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佩), 옥(玉), 경(鏡)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다.
이듬해인 1932년에 그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명동 북쪽의 소도시 용정(龍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집도 용정으로 이사했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교내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화제로 참가하여 1등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윤동주 기념관에서 사진 촬영금지여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대신 이상설 전시관에서는 사진촬영이 허용되어 여러 자료들을 남긴다.
윤동주기념관 옆 이상설전시관에서
헤이그 밀사 중 한 명인 이상설이 용정에서 청년 교육에 크게 힘을 쏟았다
연변 조선족 근대교육의 효시인 서전서숙(瑞甸書塾)
연변 조선족들의 초기 서당교육..서전서숙의 민족교육을 감시했던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
-(을사륵약)전문
(이 문건에는 조약문의 명칭과 광무황제의 비준이 없다)
-일제의(을사륵약) 강압 당시 경운궁 대안문앞에서 경계중인 일본군
-'코리안 뉴스페이퍼'지에 실린 (을사륵약) 강제 풍자 삽화
헤이그에 세 특사를 파견했던 광무황제(1852-1919)
헤이그 특사 이동경로
리준 서울 출발(1907.4.22)
↓
부산(1907.4.23)
↓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블라디보스토크 출발
리상설 합류
↓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착
상트페테르부르크 출발
리위종 합류
↓
헤이그 도착(1907.6.25)
만국평화회의 개최장소인 헤이그
'드 리더잘(knightHall)과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
미주에서의 활동
-1908년 초 미국에 도착한 리상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구권회복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리승만, 정재관(鄭在寬),최정익(崔正益)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의하는 한편 독립운동 단체 결성에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다.
-리상설이 국민회 결성 등 미국에서 활동할 무렵 머물던 공립협회 중앙회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 리상설은 두 의사가 일으킨 거사의
의의를 밝힌 '량의사합뎐'을 썼다.
-1909년 4월 7일 '신한민보' 제127호에 게재된 리상설의 '량의사합뎐'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가 스티븐스를 총살 응징한 장소인 샌프란시스코의 페리부두 빌딩
-1908년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회에 연해주 대표로 참석한 리상설
윤동주 교실
기념관 관람을 모두 마치고 기념촬영
WC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인 용정중학교 관람을 모두 마치고 교문을 빠져 나온다.
다음일정으로 최초 교육기관이었던 '서전서숙' 기념비를 찾아 이동이다.
서전서숙
1906년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한 만주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만주지역 교육기관 설치
기여했다. 1906 년 만주 용정에서 이상설. 여준. 정순만. 이동녕 등이 서전평야의 이름을
따 설립했다. 숙장 이상설, 운영 이동녕, 정순만 등 교사 이상설, 여준, 황달영, 김우용 등이
철저한 항일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4월 이상설 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된 것을
계기로 재정난과 일제의 감시와 탄압 등으로 폐교되었다. 1년 미만의 짧은 역사임에도
만주지역에 수많은 신식 민족교육 기관이 설립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건물은 없고, 위치는 길림성 용정시 용정실험소학교의 운동장으로 비정된다.
현재 용정실험소학 교정에는 1995년 용정항일역사연구회에서 세운
"1906년 4월 반일지사 이상설 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라는
내용의 서전서숙기념비가 서 있다.
지금의 룡정실험소학교, 조선족학교는 서전서숙이 있었던 옛터로 운동장 안쪽에
서전서숙 기념비와 이상설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정순만, 여준 등 민족 운동가들이 사재를 털어
1906년 8월 서전평야 이름을 따 설립했다는 최초 교육기관 '서전서숙'(瑞甸書熟) 기념비
이상설정자가 기념비 옆에 시설되어 있었다.
운동장에선 민족의 얼을 이어가는 슬기로운 룡정어린이들이 한창 축구경기중이다.
용정 용두레 우물로 이동이다.
거룡우호공원내에 용두레 우물이 있다.
우리 민족이 처음 용정에 이주하여 발견했다는 용두레 우물
『룡정지명기원지 우물』
- 이 우물은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이민 장인석, 박인언이 발견하였다.
이민들은 우물가에다 <용드레>를 세웠는데 룡정지명은 여기서부터 나왔다.
1934년 룡정촌의 주민 타기섭이 발기하여 우물을 수선하고 약 2M 높이의 비석 하나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룡정지명기원지 우물>이라고 새겼다. 1986년 룡정현 인민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이 우물을 다시파고 비석을 세웠다. -
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을 빠져 나오며 애심원으로 이동이다.
거리에서 만난 웨딩차량이다.
거리에서 웨딩을 마친 신랑신부가 탄 차량을 만난다.
꽃으로 예쁘게 치장하고 달리니 그 또한 볼거리였다.
애심원은
김학원 원장님이 초년부터 연변시내에서 3명의 고아와 더불어 시작된 고아원이다.
충북 진천출신이신 김학원원장님은 조철호회장님관 오래도록 각별한 친분관계로 지내
이번에 회장님의 안내로 찾아오게 되었다.
김원장님이 20여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장애우를 포함하여 약60명의 원생이 생활하고 있다.
김원장님은 손수 땅을 파서 건물을 자원봉사자들과 1993년부터 시작하여
현재는 중국정부로 부터 외국인으로써 처음으로 허가를 득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직도 직접 건물을 짓고 있었다.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곳입니다.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사랑의 향기가 가득한 곳입니다.
사랑을 배우는 곳입니다.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밝고 깨끗하고 고아원 건물은 무슨 문화센터를 보는 듯 했다.
김원장님이 직접 아이디어를 가지고 집을 직접 짓고 내부 가구를 만들어 짜 넣고 등.
그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해서 본인의 아이를 포기하고 고아들의 아빠노릇
사모님은 고아들의 엄마노릇을 하고 계신다.
'봉사는 습관이다'를 몸소 실천하며 생활하는 위대한 분이셨다.
뒷면에 보이는 건물은 여러사람의 아이디어를 모아서
냉난방이 특히 잘된중국 연변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건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물을 잘 지은 이유는 고아라고 해서 열악한 환경에 살고 싶게 하지 않으셨고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란다.
그로 인해 수많은 고아들이 길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되었고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원장님의 뜻을 높이 사고 있는 중국 분들도 많다고 한다.
워낙 오랜세월을 한길로 일을 해 온 분이라서 그 분의 의지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좌측 조철호회장님 안쪽 옆에 계신분이 애심원 김학원 원장님이시다.
김원장사모님은 또 사모님대로 위대한 힘을 가진 소유자였다.
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사람의 병을 찾아내는 초능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사모님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 수시로 손님도 찾아온다고 했다.
우리 일행분들께도 사모님이 따뜻한 손길로 한분한분 살펴주셨는데......
한분한분 받으실때마다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필자역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연변에서 만난 위대하신 한국인 두분이시다.
김학원원장님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짠해지는 가슴을 억누를길이 없었다.
연변에서 만난 아름다우신 두 내외분께 경의를 표하며 하시는 일에 항상 행운이 깃들길 빌면서..
또 하루여정을 마친다.
저녁 만찬에서 또 한 잔의 술로 하루의 피로를 푼다.
위하여!
情 타는 냄새는 까매지는 연변의 밤을 향기로 피어 낸다.
용정중학교 교문에서..3편은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도 소개됩니다.
기대하세요.
사진편집ㆍ글 /찬란한빛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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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침 일찍 잘 보고갑니다.
처음 보는 귀한 자료도 더러 있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