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부의 렙톤 두닢 -
☆ 2013년 다해 11월26일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청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다니 2, 31 - 45
† 복음 : 루카 21, 5 - 11
★ 다니엘은 바빌론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풀이한다. 그 꿈에 따르면, 바빌론 이후에 강대국들이 연이어
등장하겠지만 그 나라들은 모두 영원하지 않다. 오직 주님께서 세우신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도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라고 이르신다. 그때에는 서로 속이고 다투며 곳곳에
지진과 기근, 전염병 등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할 것이고,
또한 전쟁과 반란, 큰 지진, 기근, 전염병뿐 아니라 천체의 재앙들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40년이
지난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수가 백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나,
학자들은 이 숫자가 과장된 것이라며, 대략 팔만 명의 희생이 있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무렵 예수님의 말씀대로 대규모의
학살과 약탈, 기아 등이 있었고, 인근 18킬로미터 이내 지역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예루살렘은 황폐화되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예고를 하셨던 것일까요?
그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오던 신앙생활의 방식이
무너진다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의 예고를 통하여
성전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곧 지금까지
해 오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의 방식이 사라지고 새로운 방식의
신앙생활이 온 것입니다. 그 새로운 방식이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는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의 시대가 지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심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가
성전 파괴가 오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는 성전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우리의 성전으로 삼아 그분의 돌아가심을 성전의
파괴로, 그분의 부활을 영원한 새 성전의 재건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이상 기온과 돌풍으로 인해 배가 좌초되어 기름이 유출되고 철빔이
휘어지고 교회의 첨탑이 무너지는 등 많은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세찬바람과 함께 몰려온 한파를 마주하며 한 겨울을 어찌 겪어내야
할까 생각합니다.
교구청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늦가을 단풍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외로이 서 있는 감나무는 단풍나무와는 달리 잎을 다 떨어뜨린 잘 익은
감을 주렁, 주렁 매달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 신부님께 “왜 저감을 따먹지
않고 그냥 두어요?” 했더니 “야! 저것을 왜 따냐! 감이 먹고 싶으면 시장에
가서 사먹지. 저것은 관상용이야, 그리고 까치밥도 필요하지!”했습니다.
그 신부님과 저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먹을 것을 생각했고 그분은
자연을 즐겼습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창 너머 단풍을 구경하라며
좌석까지 안배해 주셨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가진 신부님들이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교구청은 참으로 평온했습니다.
마음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내가 평정을 얻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표징이 일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면
결국은 그분과 하나가 되어 약속해 주신 천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안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않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합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를 즐기는 여유가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참된
말도 있고 달콤한 말도 있고 헛소리도 있고 뜬소문도 있습니다. 그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슴에 대고 하는 참된 말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리를 듣던 주님 안에 뿌리
내리면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 내리지 못하고, 속이 비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 어떠한 처지나
여건, 환경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루카 21,8) 하고
떠들더라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참말로 알아듣는 사람은 그대로 할 것이요, 헛소리로
알아듣는 사람은 다른 달콤한 말을 쫓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끝 날을 예고해
주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를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얼마나 했는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것이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습니다. 성인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루카21,5)할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품어야 하겠습니다.
온갖 쓸데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줄이고 시기 질투에서 오는 거짓을
전하지도 말 것이며 성경을 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바를 행하는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세상 종말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요즘 매일 산책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아프신 분들이 많아서 그들을 위한 지향을 두고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지요. 어제 역시 묵주기도를 바치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너무나도
추운 것입니다. 바람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게 불어대고 여기에 약간의
빗방울도 뿌려댑니다.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추운데 나가지
말까? 그냥 성당에 앉아서 묵주기도를 바칠까?’ 등등의 갈등을 가지고
있다가, 제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라 우산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역시 추웠고, 비바람으로 인해 걷는데 많은 불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길을 걷다가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났거든요.
신학생 때 뵌 것이 마지막이니까 거의 20년 만에 만난 것입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눴고, 서로 안부를 나누면서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요.
춥고 귀찮다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이 소중한 만남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만남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고통과 시련을 굳이 피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이겨내기 힘들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또 다른 선물들이 주어질 때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가 세상 종말에 대해서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생각하면 끔찍해서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들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일부 이단
종파에서 외치는 종말 신앙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또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이러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세상 종말이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구원 역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말에 대해 굳이 두려워할
필요 없으며, 또 굳이 언제 종말의 일들이 일어나고 그때 일어날
표징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저 지금의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언젠가 맞이할 주님의 시간 안에서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심한 비바람으로 나무에 붙어 있었던 나뭇잎들이 거의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았습니다. 초라한
이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이 나무는 끝났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나뭇잎들이
나와서 언제 초라했냐는 듯이 자신의 멋지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언젠가 올 마지막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지금을 열심히 사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멋진 모습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종말은 우리가 두려워할 시간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미래에 관한 한 그대가 할 일은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생텍쥐페리).
아무도 없는 빈 골목 길. 그러나 아침이 되면 많은 이들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살쾡이의 사냥
살쾡이는 나무를 잘 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다람쥐는 나무
위를 재빠르게 오갈 수가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글쎄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살쾡이가 나무를 잘 타는 다람쥐를
사냥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함정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함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글쎄 살쾡이가 다람쥐를 발견하면 그냥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라고 하네요. 그것도 극도의 살기를 뿜어내면서 말이지요. 이 눈을
보는 순간, 다람쥐는 공포를 느끼면서 균형을 잃어 나무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로의 집중력. 그 집중력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사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러한 집중이 필요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집중으로 불가능한 일들도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역사도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 종말이 언젠가 올 것이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날 그 시간을 위해서 지금 최선을 다해 집중하며 살아갈 때 더 큰
구원의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11월26일
어제 우연히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화보집을 보았습니다.
‘1885년부터 2005년’까지의 화보집입니다. 저는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신학교엘 다녔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신학교를 방문하셨습니다. 103위성인 시성식도
있었고, 세계 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30년 전의 사진을 보니 새삼
아련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지금의 신학교는 제가 다닐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도서관, 강의실, 식당, 기숙사, 운동장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하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창 신부의 면회를 갔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한 친구가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병문안을 간 동창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병실의 벽에는 그동안 병문안을 온 교우, 동창,
선배, 친지들의 사진을 붙여 놓았습니다. 저는 잠시 시간을 내서,
벽에 붙어 있는 사진과 사진 아래에 병문안을 온 분들이 써 놓은
글들을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부님께서 건강을 회복하고,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신자 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병실에 있는 동창 신부님을 보면서, 예전에 제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1991년 9월 10일에 청량리 바오로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9월 5일에 중곡동 성당의 보좌 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5일 만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열이 너무 많이 나서, 병원엘
갔더니, 바로 중환자 실로 가라고 하더군요. 열을 재니, 40도였습니다.
20여일 병실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 건강한 것과 아픈 것, 제가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였습니다.
동창 신부도, 누님께서 정성스럽게 간호를 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병문안을 오는 분들의 사진을 찍어서, 그 자리에서 인화를 하고,
병문안 오신 분들의 글을 적어 병실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해서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저와 동창 신부는 조금 일찍, 삶의 끝자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제 동창도
앞으로의 삶을 하느님께서 주신 ‘덤’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그때
이후로 저의 삶은 주님께서 주신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별로 두려워 할 것도 없고, 큰 욕심도 없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큰 가르침이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저의 동창이 자신을 찾아온 친구와 이웃들을 사진에 찍어서 병실의 벽에
붙여 놓았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병실의 벽에 붙어있는 사진과 글들을 읽으면서
언젠가 하느님 앞에 있을 저를 잠시 묵상했었습니다. 잠시 내 앞에 있을
‘승진’과 ‘시험’을 앞두고 우리는 얼마나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합니까!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서 ‘덤’으로 주신 우리의 인생, 하느님 나라의
벽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 붙여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시대의 징표'를 대하는 자세
2013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복음 : 루카 21,5-11
< '시대의 징표'를 대하는 자세 >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
(Christiane Northrup. M. D.)은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믿게 되고,
믿는 대로 되어간다’라고 말하며 재미있는 실험결과를 제시합니다.
1990년경 엘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30년
전인 1959년에 유행하던 옷을 입었고, 당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또 그 때의 신문과 잡지를 보았으며 그 당시에 사는 것처럼
대화를 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그 당시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박사는 그들에게서 노화와 더불어 퇴화되는 증상들을
측정해 보았습니다. 측정의 기준은 근력, 인식력, 지각력, 미각, 청각
등이었습니다. 그러한 증상들은 노인병전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생물학적 지표들입니다. 닷새 동안 그러한 생활을 끝낸 후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청력과 기억력도
개선되었습니다.
랭거 박사는 “노화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간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이렇듯 편협한 정신자세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노년을 보다 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참조: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한문화 2000, 66)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의사로서 자신에게 나타났던 신체적인
증상들을 약물로만 치료하지 않고 그것이 내면 상태의 표현이라고
믿고 내적인 치유를 통해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될 수 있음을 깨달아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란 책을 썼습니다. 그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소중히 여기고 몸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귀담아 들을
때 우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게 된다. 몸의 지혜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련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구조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몸의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니다. “몸의 징후는
영혼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겉으로 드러낸 표현”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한 징후를 외적인 ‘치료’만으로 덮어버릴 때 관심과
변화를 요구하는 삶의 치유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p.70)
엘랜 랭거의 실험처럼 우리 마음은 육체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몸이 우리 영혼의 상태를
말해 준다면, 어쩌면 자연재해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 인간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요즘은 전쟁이 일어나도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뭐가 일어나도
대형입니다. 그만큼 마지막 때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징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치료를 해 나가야합니다. 당장 벌어진 일
수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깊은 원인엔 인간이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병에 걸린 것이 내 책임이란 말입니까?”
노스럽 박사가 병에 대한 심리치료를 제한할 때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합니다. 물론 전쟁이나 기아, 자연재해가 완전히 내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뀌면 전쟁이나 기아도 줄어들고
자연재해도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가까운 친구인 마사의 사례를 듭니다. 마사는
‘척추의 퇴행성 변화’ 탓으로 목과 어깨의 만성적인 통증으로 고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0대 후반이 되자 어린 시절의 괴로웠던
기억들이 무의식중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고통을
억제하지 않았고 마음껏 느끼려고 애썼습니다.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시간씩 실컷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한 감정들을 토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밀매업자였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두컴컴한 술집을
들락거리던 시간들을 자세히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술집에
앉아있는 동안 낯선 여자들과 키스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또 어머니가 교도소로 아버지를 면회하러 간 동안 그녀는 숙모와 지내야
했는데, 외눈이었던 숙모가 그녀와 여동생을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골방에 가두어 놓았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먹을 것은 크래커뿐이었고
천장에는 작은 전구 하나만이 달랑 매달려 있었습니다. 55년 동안이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을 때 마사는 비로소
마음껏 통곡할 수 있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옆에 두고 지칠
때까지 울었습니다. 그 이후 목과 어깨의 만성적인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같은 책, 71-2)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인재와 자연재해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몸이나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나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나부터 변화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이 세상을 유지하는 데 작은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아름다운 배역이 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주인공이 아닌 아름다운 배역이 되십시오.'
2013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 3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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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을 연극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연극은 각본이 없다고도 말한다.
또한 그 연극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도 자주 듣게 된다.
우리 각자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각본을 써나가고 있을까?
보통 소설, 연극, 드라마, 영화를 보면 재미난 현상이 하나 있다.
선하고 옳은 주인공이 있다. 작가는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관객들에게 재미와 호응을 일으키기 위해서, 가능하면 나쁜 역할의
배역을 최대한으로 악하게 만든다.
나쁜 역할의 배역이 악하면 악할수록 관객들은 더욱 흥분하고 선한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흔히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도 자연스럽게 미화되고 만다.
이렇게 쓰는 각본을 보통 세상논리에 맞춘 각본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써야 할 연극은 하느님이 가장 큰 관객이 되시는
연극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 연극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은 잘못된 말일지도 모른다. 혼자의 삶도 될 수도 없고,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삶도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주인공이 아닌
역할로 밀어내어서는 행복한 끝을 맺을 수 없는 연극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차라리 주인공이 되라는 말보다는 선하고 옳은 배역을 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일회 상연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연극 속에
스스로 악한 역할의 배역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비록
바보스럽다는 말을 듣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른 역할의 배역을
선택해야 한다.
2.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속이려 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사실 지나간 시간들 속에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났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거짓 그리스도는 단지 거짓으로 영원한 생명을 들먹이는
미치광이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온갖 종류의 권력으로 세상의 눈을 멀게 하려는 어두운 힘을 말한다.
이 어두운 힘이 가장 힘을 쏟는 것은 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일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원래 순수할 수 없는 정치꾼들의 이야기나, 그 힘에
기생하며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요즘 한국 사회가 너무 어수선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힘을 청해야 한다.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고 불의에 굽히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속이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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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세월은 일정하게 흐릅니다.
2013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세월은 일정하게 흐릅니다.
태풍은 아니지만 초속 몇십m의 강한 바람이 불어도 피해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은 완벽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도 자신의 확신이 그렇고 사회조직도 그렇고 다 변하게 마련입니다.
모난 돌들이 계곡물에 쓸려 내려가며 강가에 이르면 둥근 자갈이 되지요.
모난 사람들도 세파와 생사고락에 쓸려가며 살다보면 그리 됩니다.
자기주장 고집 비방 등등 모나게 굴어도 세월은 일정하게 흐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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